폭력과 싸우고 근본주의와도 싸우기

김진석 지음

판매가(적립금) 16,000 (800원)
분류 나남신서 1004
판형 신국판
면수 360
발행일 2003-11-25
ISBN 89-300-80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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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도서 금액     16,000
* 기우뚱한 균형 : 폭력과 근본주의 사이로

'철저한 원전해석'만을 부르짖고, 자생적 담론의 모색을 위한다는 명분 아래 서구담론의 수용 및 이해에만 몰두하는, 아직도 아카데미즘의 위세가 대단한 한국 철학계에서 김진석은 다소 의외의 인물이다. 독일에서 니체를 전공한 현직 대학교수(인하대 철학과)인 그는 문학비평에 관심을 두다가 몇 년 전부터는《사회비평》의 편집주간으로, 그리고 지금은《인물과 사상》의 편집위원으로 활동하며 '지금, 여기'의 문제를 고민하고 있다. 지난 3년간《사회비평》및《인물과 사상》에 기고한 글을 묶어 낸 이 책《폭력과 싸우고 근본주의와도 싸우기》도 그러한 고민의 산물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일단 폭력과 싸우기를 자청한다. 그러나 모든 폭력을 한 묶음으로 묶지는 않는다. 폭력에는 여러 가지가 있고, 여러 계보가 있기 때문이다. 파시즘이나 극우세력처럼 거대하고 명백한 악이 있는 듯하지만, 문화권력의 경우처럼 문화에 관한 세심한 구별이 요구되는 폭력도 있다. 그래서 저자는 일단 뚜렷하고 명백한 것부터 끄집어낸다.
그런데 폭력과 파시즘을 비판하는 일에는 이상한 맹점이 있음을 저자는 지적한다. 이것들을 추방해야 한다는 열성이 지나친 나머지, 알게 모르게 모든 폭력을 파시즘과 동일하게 여기는 이들이 적지 않은데, 모든 폭력적 경향이나 제도들이 그 자체로 악이며 따라서 아예 뿌리를 뽑아야 한다는 주장은 거기서 불과 한 걸음 거리에 있다. 저자의 분석에 따르면, 도덕적 근본주의에도 여러 가지가 있다. 일상생활의 관습과 제도 속에 조금이라도 폭력의 기미가 있으면 깜짝 놀란 표정을 지으며 '여기 또 파시즘이 있다!'라고 호들갑을 떨며 소리치는 지식인들이 있는가 하면, 종교적 평화주의를 근거하여 보통 세속인들이 실행하는 다소 복잡한 모양의 행위와 실천에 모두 폭력의 낙인을 찍는 지식인들도 있다는 것이다.
이들은 자신들의 도덕적 혹은 종교적 근본주의가 그 이념에서 현실적 폭력을 반대하기에 실제로도 폭력과 뚝 떨어져 있다고 생각한다. 저자는 유감스럽게도 이런 근본주의도 폭력적 성향을 띤다고 본다. 즉, 폭력이 전혀 없는 상태를 가정하는 것은 그 자체로는 별 탈이 없는 이상주의 같지만, 어떤 폭력적 실천이든 파시즘이라고 비난하고 추방하려고 하는 즉시 그것 또한 그것에 고유한 폭력을 행사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폭력은 아주 오랜 전통을 가지고 있는데, 이를테면 사제적 권력의 전통이 그러하다.
물론 저자가 이 근본주의가 폭력에 반대한다는 명분을 내세우면서 나름대로 긍정적 역할을 함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현존하는 폭력을 때때로 막거나 감소시키는 역할을 하고, 어떤 차원에서는 평화에 대한 포괄적 관심을 유발시키기도 한다. 또 그런 이념을 내세우면서, 실제로는 아주 소박하고 깨끗한 삶을 실천하는 사람들도 있다. 실천으로서의 평화운동에 대해서 저자는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그러나 담론으로서의 근본주의는 경우가 다르다고 본다. 폭력과 권력에 대한 철학적이고 사회학적이며 정치적인 분석은 그런 근본주의를 중요한 분석의 대상으로 삼는다.
그러나 근본주의는 단순히 분석의 대상에 그치지 않는다. 그 근본주의는 현실적 폭력과 권력을 형성하는 데 실제로 기여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저자의 논지는 이렇다. 이상적 근본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그것은 그저 이상적 담론의 역할을 하는 듯하지만, 실제로는 아주 현실적인 정치경제적 폭력에 상응하는 짝패 역할을 하기도 한다. 현재 미국의 정치권력이 일방주의적 패권주의 혹은 신보수주의 경향을 띠는 것은 잘 알려져 있는데, 그 핵심을 이루는 정치세력이 다름 아닌 기독교 근본주의이다. 그리고 그 제국주의적 권력과 가장 맹렬하게 충돌하는 주체를 구성하는 한 축도 다름 아닌 이슬람 근본주의이다. 후자의 경우 근본주의가 홀로 정치적 힘을 형성하지는 않고 현대화 과정에 대한 적대적 경향과 결합하기는 하지만, 어쨌든 매우 종교적인 근본주의가 현실적 폭력과 권력을 구성하는 데 기여하는 것이다. 물론 세부적으로 들어가면 근본주의는 정교일체형 국가로 나타나기도 하고, 현대화와 세계화에 반대하는 테러집단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마찬가지로 한국 사회에서 호전적 냉전주의 혹은 반공주의를 주장하면서 미국을 숭상하는 세력의 한 핵도 다름 아닌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이었다. 그래서 겉으로 모든 폭력에 반대한다는 근본주의를 내세우는 지식인들은 지금도 극우 경향의 매체에 쉽게 투항하거나 협조한다.
따라서 저자는 여러 차원에서 폭력과도 싸우고 근본주의와도 싸운다. 싸우기를 자청한다. 이 '자청'의 방식에 저자는 특히 주의를 기울인다. 다른 것도 아니고 폭력과 근본주의를 분석하고 그것에 대항하는 전략을 모색하는 와중에서, 저자는 다시 '싸우기'를 자청하고 그것의 어쩔 수 없음을 인식한다. 폭력뿐 아니라 근본주의는 어떤 차원에서는 그저 분석하거나 서술하는 것으로는 부족하기 때문이다. 현재 한국 사회에서 폭력과 근본주의가 드러나는 방식에 대해 글을 쓰면서, 저자는 싸우는 방식을 자청했다.
이렇게 양쪽으로 싸움을 자청하면서만, 저자는 전쟁과 평화 사이에서 균형을 잡을 수 있다고 여긴다. 저자의 표현을 빌자면 그것도 기껏해야 '기우뚱한 균형'일 뿐이다. 흔히 모든 폭력과 권력을 부정하는 근본주의적 태도가 평화로 가는 정도라고 여겨지지만, 저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평화는 그것보다는 복잡하다는 것이다. 근본주의를 표방하면서도 평화적 실천을 하는 사람도 얼마든지 있을 것이지만, 철학적·정치적 담론의 차원에서는 폭력과 근본주의를 다 경계하면서만 평화의 길이 겨우 열린다고 저자는 생각한다.
이 싸움은 물론 단순히 양쪽으로만 진행되지는 않는다.《사회비평》주간을 하면서 저자는 전인권과 대담을 했는데, 그 대담을 통해 마약을 근절하려는 근본주의의 폭력적 무모함을 고발한다. 또 저자가 단순히 부정적으로만 폭력과 싸우고 근본주의와 싸우는 것은 아니다. 양날로 싸우는 일은 긍정적 실천으로 이어지지 않으면 공허할 것이다. 이를 위한 한 예가 '개혁적 자유주의'이다. 저자는 그것에 일정하게 동의하고 그를 위한 전략적 문제들에 개입한다. 그러나 개혁적 자유주의를 위해서도 한국에서는 동시에 공공성이 확보되어야 한다는 점에서, 여러 정치철학적 문제가 제기될 뿐 아니라 실천적 갈등이 일어난다는 데 저자는 주목한다.
이 책에 나타난 그의 지난 싸움과 모색의 내용 및 방식을 보며 우리는 그에게 동조할 수도 있고 그를 비판할 수도 있다. 그의 싸움을 보며 우리는 그와 함께 '분열'할지도 모르지만, 동시에 '폭력과 근본주의 사이로 난 사잇길'을 걸으며 '기우뚱한 균형'감각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 보도자료

* 파시즘, 개혁적 자유주의 문제 등에 대한 날카로운 비평. 계간 '사회비평'에 연재했던 글 모음. - 한국일보 2003. 12. 6
* 근본주의는 '공공의 적'이다

김진석 교수(인하대·철학)가 <폭력과 싸우고 근본주의와도 싸우기>를 펴냈다. 계간 <사회비평> 주간으로 활동하던 지난 3년여 동안 주로 이 잡지에 썼던 글들을 한데 묶은 정치적 성격이 강한 비평집이다.
정치적 성격이 강하긴 하지만, 여기 실린 글들은 정치 자체를 직접 겨냥해 썼다기보다는 정치적 자장 안에서 정치적으로 해석될 수밖에 없는 학문적 담론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있다. 그러니까 담론에 대한 담론, 곧 메타담론 형식의 글인 셈이다.
정치·사회 비평 계간지의 성격상 해당 시기의 뜨거운 이슈를 주제로 잡는 까닭에 소재 자체만 보면 시사성이 조금은 떨어진다고 볼 수도 있다. 이를테면, 이제는 사회적 상식으로 자리잡은 ‘안티조선’이나 한바탕 바람을 탔다가 시들해진 ‘우리 안의 파시즘’ 따위가 그런 소재들이다. 그러나 지은이의 글쓰기 방향이 유행 담론의 토대를 살피는 쪽에 맞춰져 있는 만큼, 그 성찰적 태도가 품고 있는 울림은 여전하다.
책을 통해 드러난 바에 따르면, 지은이는 정치·사상적으로 ‘개혁적 자유주의자’의 자리에 서 있다. 그는 이 개혁적 자유주의가 1990년대 말쯤에 정치적 투쟁 담론으로 탄생했다고 말한다. “민중성에 치우쳤던 1980년대의 운동과 포스트모더니즘에 치우쳤던 1990년대의 운동”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 ‘허탈한 무관심’과 ‘패배주의’만이 자라던 풍경을 일시에 바꿔놓은 것이 이 개혁적 자유주의였다고 지은이는 말한다. 지은이 자신도 프랑스의 탈근대론을 전파하던 입장에서 돌아서 이 개혁적 자유주의에 합류했음은 물론이다.
논의의 출발점은 <조선일보>에 반대하는 ‘안티조선운동’이다. 지은이는 극우헤게모니를 장악한 정치적 담론권력인 <조선일보>로 대표되는 지배세력의 물리적·언어적 폭력과 싸우는 것은 아주 정당하다고 역설하면서도, 그 신문과 손잡은 지식인을 비판하는 방식엔 이의를 제기한다. 자칫하면, 도덕주의적 근본주의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 도덕 근본주의의 좀더 분명한 사례를 안티조선과 연결돼 터져나왔던 ‘일상적 파시즘’, ‘우리 안의 파시즘’ 논란에서 찾을 수 있다. 지은이는 일상적 파시즘 논자들이 전통주의·권위주의·가족주의 등으로 얽힌 모든 권력관계를 파시즘이라고 몰아치면서, 그런 관계 속에서 일상을 살아갈 수밖에 없는 민중을 파시즘의 공범자로 모는 것이야말로 도덕주의적 근본주의이며, 그런 식의 비판이야말로 파시즘적이라고 비판한다.
더 큰 문제는 이들이 민중을 파시즘 협력자로 규정함으로써 이들을 규탄하고 그것을 초월한 심판자적 위치에 올라 담론권력을 행사한다는 사실에 있다. 평신도를 단죄하는 사제적 권력과 유사한 권력이 되는 셈이다. 더구나, 이들이 파시즘을 그토록 비판하면서도 “그런 파시즘을 재생산하려고 모든 방식을 강구하는 <조선일보>에 대해 일상적으로 눈을 감는” 것은 기만이며 위선이다. 지은이는 근본주의의 함정에 빠져 휘두르는 개념의 폭력을 폭력으로 인식해야 하며, 때로는 폭력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민중의 구체적인 삶을 느끼는 윤리적 감수성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고명섭 기자
- 한겨레 > 책과 사람 > 지성 (2003. 12. 6 토)


제1부 안티조선에서부터
- 권력비판의 방식들, 단절 혹은 느슨한 연대 속에서
- 상징적 지식권력의 위기와 대안

제2부 통제권력에 시달리는 자율
- 통제 및 치료권력의 구조 : 마약의 경우
- "나, 전인권은 범죄자가 아니다" : 전인권과의 대담

제3부 위험한 근본주의에 빠진 파시즘론
- 위험한 근본주의에 빠진 '일상적 파시즘론'과 비폭력주의
- 파시즘 개념의 무분별한 확장을 경계하며
- 폭력적 경쟁의 계보 : 조폭신문, 문화권력, 폭력문화

제4부 개혁을 위한 철학
- 개혁적 자유주의의 탄생과 성장에 얽힌 몇 이야기
- 파시즘과 싸우면서 근본주의와도 싸우기
: 강준만의 반론에 대한 보론(補論) 혹은 해론(解論)으로
- 혁명보다 쉬운, 그리고 혁명보다 민주적인 '개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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