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생활>책과 사람 2003. 11. 8 (토)* 반민특위 활동은 민족국가 건설운동‘반민특위’ 문제를 종합적으로 정리한 연구서가 나왔다. 역사문제연구소 연구원인 이강수씨가 펴낸 ‘반민특위연구’(나남출판)는 역사주의적 관점에서 반민특위 문제를 총정리하고, 기존 연구에서 잘못 알려진 사실을 복원한다. 지은이는 “반민특위는 해방 이후 우리 민족의 역사적 과제와 민족적 요구를 계승하여 일제 잔재 청산을 통해 왜곡된 한국 사회를 개혁하려는 근대적 민족국가 건설운동의 일환”이라고 규정한다. 그러나 1948∼50년 한국 사회의 각 정치 세력의 관계와 중앙·지방 사회의 구조적 문제로 반민특위가 와해될 수밖에 없었다. 남한 사회가 이미 친일파와 그들의 비호세력에 의해 장악된 것이 가장 큰 원인이라는 것.책은 정부기록보존소와 국회, 국회도서관 자료, 개인소장 기록, 반민특위 관계자 증언 자료, 미국 국가문서기록국(NARA) 기록 등을 활용, 반민특위의 실체를 복원한다. 새로운 자료도 눈에 띈다. 1949년 ‘국무회의록’에는 “의명친전(依命親傳)으로 반민법 제5조 해당자를 비밀조사하야 선처”하라는 이승만 당시 대통령의 통첩 기록이 실려 있다. 이강수씨는 친일파가 숙청되지 않고 한국 사회의 핵심으로 자리잡았으며, 이로 인해 한국 사회가 왜곡되고 병폐를 떠안게 됐다고 문제를 제기한다. 이런 과거사를 객관적으로 진단하고 반성해야 새로운 사회를 건설할 수 있다고 역설한다. - 세계일보>학술 2003. 11. 5(수)* 특위요인 암살음모 개입 가능성정부기록보존소 이강수 학예연구사(40·역사문제연구소 연구원)가 5일 공개한 자료들은 이승만 정권의 반민특위 활동 방해와 해체 움직임이 얼마나 집요하게 이뤄졌는가를 실증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 연구사는 또 최근 펴낸 학술서 ‘반민특위 연구’(나남출판)에서 반민특위의 활동과정과 해체이유를 집중분석했다.이 책은 정부기록보존소·국회도서관·국사편찬위원회의 기록, 미국 국가기록관리청(NARA)의 반민특위 파일 등을 토대로 밝혀지지 않았던 반민특위에 대한 새로운 사실을 밝혀냈다.이연구사는 당시 ‘국무회의록’을 토대로 이승만 대통령이 반민특위 활동기간 동안 집요하게 반민특위 활동을 방해하거나 특위를 와해시키려 했음을 밝혔다. 반민특위 활동이 활발했던 1949년 한해동안 이승만 대통령이 국무회의에서 반민특위의 활동을 논의하거나 지시를 내린 사항은 모두 31건. 이해 열린 국무회의가 모두 113회였다는 걸 감안하면 3~4회에 한번꼴로 반민특위가 논의될 정도로 반민특위문제는 국정의 초미 관심사였던 셈이다.그러나 ‘국무회의록’에 나타난 반민특위에 대한 이승만 정권의 태도는 ‘반대와 방해’로 일관하고 있다. 1949년 1월21일자 회의록에는 ‘대통령의 의명친전(依命親傳)으로 반민법 해당자를 비밀조사하여 선처하라고 (관리들에게) 통첩했다’라고 적혀 있어 이승만 대통령이 친일파를 적극 비호했음을 확인시켜주고 있다. 특히 1월28일자 국무회의록에 따르면 이대통령이 친일파로 체포된 노덕술에 대해 그가 치안기술자임을 들어 정부가 보증해서라도 보석시킬 것을 지시했다.또 이승만 정권은 국무위원과 특위위원의 ‘합동좌담회’를 개최(4월4일자 국무회의록), 반민법 피의자 문제의 정치적 해결을 시도했을 뿐 아니라 11차례에 걸쳐 반민법 개정을 논의했다는 사실도 보여주고 있다.이연구사는 이와 함께 ‘반민피의자에 대한 진정서 및 탄원서’를 통해 장·차관, 고위관리 등 이승만 정권의 핵심인물들이 반민특위의 재판과정에서 친일파의 증인으로 나서거나 이들을 위해 탄원하면서 반민피의자들을 비호했음을 증명했다.대표적인 사례가 김성수의 동생 김연수. 반민 피의자로 체포된 김연수를 비호하기 위해 현상윤(당시 고려대학장), 최두선(동아일보 사장), 백관수(제헌국회의원) 등 8명이나 되는 거물급이 증인으로 동원됐다.당시 반민특위 재판기록은 “증인으로 출석한 백관수가 ‘김연수는 만주국 총영사 임명을 거부했으나 조선총독부가 강제로 임명했으며 중추원 참의도 김연수는 모르는 사이 된 것’으로 증언했다”고 적고 있다.이연구사는 특위요인 암살음모사건에 대한 대법원의 ‘최종판결문’을 발굴, 이 사건에 반민피의자 박흥식이 경찰국에 10만원의 사건자금을 제공했다는 사실을 새롭게 밝혀냈다. 또 이 사건에 대한 주한미국대사보고서를 인용, “정부가 (암살사건과 관련한) 법률 집행을 저지하려는 사람들을 원조했다”고 밝혀 특위요인 암살음모사건이 이승만 정권에 의해 은폐·조작됐을 가능성을 제기했다.이연구사는 “각종 자료들은 이승만 정권이 반민특위 와해공작에 깊숙이 간여했음을 확인시켜 주고 있다”며 “친일파 비호세력이 국가권력을 장악했다는 점이 반민특위 실패의 주요원인”이라고 말했다. 문화 (2003. 11. 6 목)" />

반민특위 연구

이강수 지음

판매가(적립금) 20,000 (1,000원)
분류 나남신서 996
판형 신국판
면수 446
발행일 2003-10-25
ISBN 89-300-3996-0
수량
총 도서 금액     20,000
해방이 된 지 근 60년, 반민특위가 와해된 지 50여 년이 지났다. 그러나 몇 해 전부터 학계와 시민단체를 중심으로 '친일파인명사전' 작업이 추진되었고, 지난해 12월 국회에서는 친일파 708명의 명단을 공개하는 등, 친일파 청산에 대한 전 국민적 갈등은 여전히 해소되지 않고 있다. 친일파 청산이 단지 개인의 보복적 차원이 아닌 한국사회의 발전을 위한 역사적 과업이었기에 친일파 청산을 다하지 못한 아쉬움이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가슴 한 쪽을 더욱 무겁게 하고 있다. 현 시점에서 친일파를 다시 재판에 회부할 수도 없고 설령 재판에 회부한다 해도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다. 현재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친일파에 대해 역사적으로 평가하고, 친일파를 청산할 수 없었던 사회구조적 원인을 객관적으로 진단해서 친일파와 그 비호세력에 의해 구축된 기형적 구조의 고리를 하나씩 끊어 내는 것이다.
- '책을 내면서' 에서

해방이 된 지 근 60년 만에 "반민특위"에 대한 종합적 연구서가 간행되었다. 1960년대까지 남한사회에서 반민특위 문제는 잊혀진 기억이었다. 그러다가 1960년대 한일회담을 계기로 친일파·반민특위 문제가 다시 주목받기 시작하였고, 1980년 민주화운동과 함께 반민특위 연구도 증가되었다. 그럼에도 반민특위에 대한 기존 연구는 선언적이고 나열적인 경향을 보였다. 당시로서는 반민특위의 실체를 일반에게 알린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하게 작용한 결과였다. 그런데 이번에 간행된《반민특위 연구》는 기존 연구에서 다루어지지 않은 자료를 기초로 역사주의적 관점에서 반민특위 문제를 총정리하고, 기존 연구에서 잘못 알려진 사실을 복원하고 있다.
《반민특위 연구》는 반민특위 문제를 학문적으로 접근한 연구서인데, 무엇보다도 친일파 문제에 대한 실증적 태도가 돋보인다. 일례로 저자인 이강수 박사(역사문제연구소 연구원, 정부기록보존소 학예연구사)는 "필자의 잘못으로 다른 사람이 반민피의자로 거론되지 않도록", 확인된 670여 명의 반민피의자들이 체포되거나 조사 받은 자료의 근거를 개인별로 각각 기술한다. 이 작업을 위해 저자는 반민피의자 명단의 확인, 그들의 체포일자·체포지역, 체포한 조사관·조사담당자, 특별검찰부·특별재판부의 송치일자, 재판일자, 구형량·선고량 등을 정리한 자료를 엑셀파일로만 수십 개로 나누어 작성했고, 재작성 작업만도 수차례 했다고 한다.
《반민특위 연구》는 상당부분이 새로운 자료로 채워져 있다. 반민피의자 조사과정에서 생산된 각종〈조사보고서〉,〈심문조서〉,〈소행조서〉,〈송치서〉와〈탄원서〉, 임시정부 국무위원이었고 한국독립당 감찰위원이었던 김승학(金承學)의 유고(《親日派群像》,《參考件第一》),《민주중보》·《대구시보》·《강원일보》·《호남신문》·《군산신문》등 1948∼50년 지방신문 등이 그것이다. 특히 1949년《국무회의록》의 경우, 이승만 대통령이 "의명친전(依命親傳)으로 반민법 제5조 해당자를 비밀조사하야 선처"하라는 '통첩'을 내린 사실과, 국무위원들이 특위와 "합동좌담회"를 개최하여 군(軍)·관료 등 정부 내 친일파숙청 문제를 정치적으로 해결하려 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임이 이 책의 연구를 통해 확인되었다.
반민특위요인암살음모사건의 경우, 기존 연구는 당시 신문을 통해 개략적으로 서술하는 데 그쳤지만, 이 책에서 필자는 특위요인암살음모사건에 대한 대법원의〈최종판결문〉을 발굴하여 이 사건의 발생과 처리과정, 사건 주도세력, 테러리스트 백민태의 증언내용 등을 분석하여 이 사건의 실체를 복원한다. 기획처(현 기획예산처)가 국무회의에 보고한〈예산서〉, 특위업무 비협조의 비난에 대한 대응으로서 나온 검찰총장의〈지시문〉, 검찰총장과 법무장관의〈지시서〉등은 반민특위 방해공작의 일단을 이해하는 중요한 자료인 것으로 평가된다.
또한 이 책에서는 반민특위 조사관의 증언자료를 추가하여 반민특위 와해 후, 한국전쟁 중 특위참여세력이 반민피의자에게 당한 역공의 실상을 제시한다. 뿐만 아니라 미국 국가기록관리청(NARA) 기록물 중〈National Traitors Act, 1948∼1949〉(American Mission in Korea, Seoul ; Records of the U. S. Department of State relation affairs of Korea, 1945∼1949, File 895) 등 주한미대사가 수집한 반민특위에 대한 날짜별〈보고서〉도 처음으로 소개하면서 반민특위에 대한 이해를 확대시킨다.
이렇게《반민특위 연구》는 정부기록보존소와 국회 및 국회도서관의 자료, 개인소장기록, 반민특위 관계자의 증언자료, 미국국가기록청(NARA)의 기록 등을 활용하여 반민특위의 실체를 복원한다. 필자는 해방 이후 한국사회의 왜곡된 첫 출발이 친일파와 직·간접적으로 연관되어 있음에도, 해방 후 60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친일파에 대해 이렇다 할 역사적 심판을 내리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인지, 왜 친일파들은 숙청되지 못하고 오히려 한국사회의 핵심으로 자리했는지 등의 원인을 규명하려 했다. 그런데, 저자는 친일파숙청 문제를 단순히 친일파와 반민특위와의 관계에서 접근하는 것을 거부한다. 즉, 친일파숙청 문제는 친일파 개개인의 처벌문제만이 아니라 친일파들에 의해 형성된 왜곡된 한국사회의 개혁의 문제이고, 더 나아가 과거사에 대한 객관적 반성을 기초로 통일시대를 준비하는 작업이라는 문제의식에서, 반민특위 와해원인을 1948∼50년 한국사회의 각 정치세력과의 관계 및 중앙과 지방사회의 구조적 측면에서 접근한 것이다.
실제로《반민특위 연구》는 반민특위 와해의 첫 번째 원인을 남한사회가 이미 친일파와 그들의 비호세력에 의해 장악되었다는 사실에서 찾는다. 반민피의자에 대한 '증인' 및 '탄원서' 등을 분석하여 이승만 정권의 장·차관, 고위관리, 국회의원, 정치·사회단체인사, 대학총장, 지역유지 등 사회핵심인물들이 반민특위의 재판과정에서 친일파의 '증인'으로 나서거나 이들을 위해 '탄원'하면서 반민피의자들을 비호했음을 증명한다. 이 책에 등장하는 예를 들어보자. 이종현 농림부장관은 1949년 7월 노기주의 증인으로 나와 "몸은 비록 왜경일망정 민족정신은 생동하고 있다"고 하며 반민피의자를 '애국자'로 둔갑시켰다. 반민피의자를 비호하기 위해 나온 증언자는 다양했고, 재력과 권력이 있는 경우 더욱 심했다. 대표적 사례가《동아일보》의 사장 김성수의 동생 김연수였다. 제헌국회의원인 백관수는 김연수가 만주국 총영사로 임명된 것을 "거부"했으나 조선총독부가 강제로 임명한 것이라고 하고, 중추원참의가 된 것도 김연수는 "모르는 사이" 된 것이며, 관선도회의원 임명도 "강제 임명"이었다고 하며 모든 사실을 부정했다. 김연수와 일본 유학시절부터 알고 지내던 현상윤 당시 고려대학장은 "중앙학원의 건실한 발전이 주로 피고인의 물심양면의 적극적 원조에 의한 것"이라고 하며 해방 이후 교육사업·건국사업의 공신이라고 증언했다. 미군정청 교육부고등교육위원 출신으로 국립서울대학교 교수였던 김동일,《동아일보》사장 출신 최두선 등도 김연수의 증인으로 나왔다. 다음으로, 국회의원 최봉식은 반민피의자 손영목의 증인으로 나와 손영목이 울산군수 시절 1면(面) 1교(校) 운동을 전개하고 일본인 교장을 조선인 교장으로 교체했으며, "경상남도 재직중에는 선정을 했고, 강원도 재직중에는 도민을 위하여 공출제도를 반대했으며, 전라도 재직중에는 창씨를 반대"하여 "일반이 다 애국자로 인정"했다면서 역시 반민피의자를 애국자로 둔갑시켰다. 이외에도 1949년 4월 1일 연희대학교 총장 백낙준, 이화여자대학교 총장대리 김애마 등은 양주삼의 증인으로 나왔으며, 이화여대 미술부 교수 장선희는 강락원의 처 오현주의 증인으로 나왔다.
그런데 이러한 현상은 중앙만 아니라 지방에서도 자행되었음이 드러난다. 전라북도의 경우 중추원참의 출신 홍종철(洪鍾轍)의 석방을 위해 김수학 상공부차관, 전북 출신 백관수 의원 등을 필두로, 전북 남원군 농회장, 전라북도 농무국장, 전북 고창인쇄소장, 전북 고창병원장, 전북 고창여중 교장 등 지역유지들이 총동원되었다. 탄원자들은 일제시기 같은 지역에서 조직된 영우회(英友會) 회원들로, 이것은 일제시기 친일인맥이 정부수립 이후에도 이어져 서로 비호하는 집단으로 구조화되었음을 보여주는 예이다. 이렇게 구조화된 지방에서의 특위 압박은 중앙보다 다양했다. 반민자를 애국자로 둔갑시키는 연판장을 돌리는 건 일반적 현상이었고, 위원장에 대한 암살테러(강원도조사부), 증인에 대한 협박사건(전라남도조사부), 투서함 파괴사건(전라북도조사부), 도조사부 관계자에 대한 협박장 발송(경상남도조사부), 조사서 바꿔치기(전라남도조사부) 등 모든 방법이 총동원되었다. 결국《반민특위 연구》는 친일파숙청문제가 단순히 친일파 개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구조의 문제임을 명백히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이 책은 반민특위 와해 후 반민피의자의 행적을 추적하여, 현재 한국사회의 성격을 이해하는 데 길잡이가 된다. 이 책에서는 반민피의자 상당수가 한국의 정치·경제·사회·문화계에 진출했음을 확인한다. 가령, 정계에 진출한 인물들은 한국민주당과 이승만 중심의 대한국민당·민주국민당에 결집했고 일제시기 관료 출신들은 정부수립 후 재차 공직사회로 진출했다는 점, 일제시기 경찰 출신도 여전히 이승만 정권의 경찰로 작동되었으며 일제시대 경제계의 주역도 역시 1940·50년대 남한경제를 이끌었다는 점, 그리고 사회단체는 일제시기 밀정이나 경찰출신이 참여하거나 직접 조직하여 이승만 정권의 수족이 되었다는 점, 정치자금을 모금했던 단체에도 반민피의자들이 중심이 되어 '건국자금'을 제공했다는 점 등을 분석함으로써, 반민피의자들이 한국사회 각 분야의 첫 출발에서 일제시기와 마찬가지로 주도적 위치를 차지했음을 보인다.
이와 같이《반민특위 연구》는 풍부한 자료를 기초로 반민특위·친일파문제를 1948∼50년 한국사회의 문제, 더 나아가 현재의 한국사회의 문제와 연결시켜 이해한다. 친일파 숙청문제로 시작한 이 책은 현재 시민단체·학계·국회를 중심으로 논의되고 있는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특별법"이 어떤 방향으로 제정되어야 하는지에 대해 시사점을 던져주며, IMF 사태를 겪은 이후 최근에도 여전히 논란이 되고 있는 정경유착·정치자금 등 한국사회의 구조적 문제의 연원을 이해하는 데도 매우 유익할 것으로 여겨진다. - 보도자료

* 이승만 "일제 고등검찰 경력자 선처하라"
- 이강수씨 '반민특위…'서 밝혀
친일파 문제는 우리 사회에서 여전히 ‘뜨거운 감자’다. 해방과 함께 역사적 심판을 받았어야 할 친일파들이 반세기가 넘도록 한국 사회의 핵심을 차지해왔기 때문이다. 1948년 국회 결의로 구성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는 친일파들의 집요한 위협과 방해공작으로 결국 해체되고 말았다. 최근 나온 〈반민특위 연구〉(이강수 지음, 나남출판·2만원)는 반민특위의 전개 과정과 해체 이유를 실증적으로 분석한 학술서다. 국민대 대학원 국사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현재 정부기록보존소 학예연구사로 있는 지은이가 자신의 박사학위 논문을 수정·보완한 것이다.
반민특위 연구는 90년대 들어 본격화하면서 연구영역도 급속히 넓혀졌다. 그럼에도 몇가지 한계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지은이에 따르면, △북한의 친일파 숙청, 반민 피의자의 친일논리 및 무죄증명 시도의 과정, 반민특위 와해 이후 피의자의 행적 등이 다뤄지지 않아 반민특위의 총체적 복원이 미흡한 점 △반민특위의 와해 배경에 대한 추론적 연구를 넘어선 실체적 증명 부실 △자료 이용의 협소함과 부정확성 △1948~50년 한국사회에 대한 이해와 연결시키는 문제의식 부족 등이 그것이다.
지은이는 기존의 각종 단행본 및 연구논문, 재판기록과 보고서 등에 더해, 정부기록보존소 소장 기록, 국회도서관 및 국사편찬위원회 기록, 개인소장 자료, 미국 국가기록관리청 파일 등 무려 300여편에 이르는 방대한 자료를 바탕으로 ‘반민특위’의 진실과 의미에 한발짝 더 다가서고 있다. 이 과정에서 그동안 밝혀지지 않았던 몇가지 새로운 사실들이 확인되기도 했다. 예컨대, 1949년 국무회의록을 보면, 이승만 대통령이 직접 “반민법 제5조(일제 치하 고등검찰직 경력자의 공무원 임용 금지) 해당자를 비밀조사하여 선처하라”는 통첩을 내렸는가 하면, 국무위원들이 반민특위와 합동좌담회를 열어 친일파 처리를 ‘정치적으로’ 해결하려 시도했다. 이승만 정권의 친일파 숙청 반대 행위가 정부 기록을 통해 구체적으로 드러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지은이는 이승만 정권의 고위관리와 정치인, 대학 교수, 지역유지 등 사회 핵심인물들이 반민특위 재판 과정에서 친일파 피의자들을 적극 비호한 사실도 유형별로 증명해 보인다. 대표적 사례가 〈동아일보〉 사장 김성수의 동생 김연수다. 만주국 총영사와 중추원 참의를 지낸 경력에 대해, 친형은 물론이고 일본 유학을 함께 했던 현상윤 고려대 학장, 김동일 서울대 교수, 국회의원 백관수·홍성하 등 사회지도층 인사 8명이 증인으로 나서 김씨의 혐의를 변호했다. 지은이는 결론에서 “반민특위는 해방 이후 우리 민족의 역사적·민족적 개혁과제를 계승한 근대적 민족국가건설운동”이라고 규정하고, “친일파 숙청은 단순히 개개인의 처벌 문제가 아니라 그들에 의해 왜곡된 한국사회의 개혁, 나아가 과거사 반성을 기초로 통일시대를 준비하는 작업”이라는 점을 거듭 확인하고 있다.
- 한겨레>문화생활>책과 사람 2003. 11. 8 (토)

* 반민특위 활동은 민족국가 건설운동
‘반민특위’ 문제를 종합적으로 정리한 연구서가 나왔다. 역사문제연구소 연구원인 이강수씨가 펴낸 ‘반민특위연구’(나남출판)는 역사주의적 관점에서 반민특위 문제를 총정리하고, 기존 연구에서 잘못 알려진 사실을 복원한다. 지은이는 “반민특위는 해방 이후 우리 민족의 역사적 과제와 민족적 요구를 계승하여 일제 잔재 청산을 통해 왜곡된 한국 사회를 개혁하려는 근대적 민족국가 건설운동의 일환”이라고 규정한다. 그러나 1948∼50년 한국 사회의 각 정치 세력의 관계와 중앙·지방 사회의 구조적 문제로 반민특위가 와해될 수밖에 없었다. 남한 사회가 이미 친일파와 그들의 비호세력에 의해 장악된 것이 가장 큰 원인이라는 것.
책은 정부기록보존소와 국회, 국회도서관 자료, 개인소장 기록, 반민특위 관계자 증언 자료, 미국 국가문서기록국(NARA) 기록 등을 활용, 반민특위의 실체를 복원한다. 새로운 자료도 눈에 띈다. 1949년 ‘국무회의록’에는 “의명친전(依命親傳)으로 반민법 제5조 해당자를 비밀조사하야 선처”하라는 이승만 당시 대통령의 통첩 기록이 실려 있다. 이강수씨는 친일파가 숙청되지 않고 한국 사회의 핵심으로 자리잡았으며, 이로 인해 한국 사회가 왜곡되고 병폐를 떠안게 됐다고 문제를 제기한다. 이런 과거사를 객관적으로 진단하고 반성해야 새로운 사회를 건설할 수 있다고 역설한다.
- 세계일보>학술 2003. 11. 5(수)

* 특위요인 암살음모 개입 가능성
정부기록보존소 이강수 학예연구사(40·역사문제연구소 연구원)가 5일 공개한 자료들은 이승만 정권의 반민특위 활동 방해와 해체 움직임이 얼마나 집요하게 이뤄졌는가를 실증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 연구사는 또 최근 펴낸 학술서 ‘반민특위 연구’(나남출판)에서 반민특위의 활동과정과 해체이유를 집중분석했다.
이 책은 정부기록보존소·국회도서관·국사편찬위원회의 기록, 미국 국가기록관리청(NARA)의 반민특위 파일 등을 토대로 밝혀지지 않았던 반민특위에 대한 새로운 사실을 밝혀냈다.
이연구사는 당시 ‘국무회의록’을 토대로 이승만 대통령이 반민특위 활동기간 동안 집요하게 반민특위 활동을 방해하거나 특위를 와해시키려 했음을 밝혔다. 반민특위 활동이 활발했던 1949년 한해동안 이승만 대통령이 국무회의에서 반민특위의 활동을 논의하거나 지시를 내린 사항은 모두 31건. 이해 열린 국무회의가 모두 113회였다는 걸 감안하면 3~4회에 한번꼴로 반민특위가 논의될 정도로 반민특위문제는 국정의 초미 관심사였던 셈이다.
그러나 ‘국무회의록’에 나타난 반민특위에 대한 이승만 정권의 태도는 ‘반대와 방해’로 일관하고 있다. 1949년 1월21일자 회의록에는 ‘대통령의 의명친전(依命親傳)으로 반민법 해당자를 비밀조사하여 선처하라고 (관리들에게) 통첩했다’라고 적혀 있어 이승만 대통령이 친일파를 적극 비호했음을 확인시켜주고 있다. 특히 1월28일자 국무회의록에 따르면 이대통령이 친일파로 체포된 노덕술에 대해 그가 치안기술자임을 들어 정부가 보증해서라도 보석시킬 것을 지시했다.
또 이승만 정권은 국무위원과 특위위원의 ‘합동좌담회’를 개최(4월4일자 국무회의록), 반민법 피의자 문제의 정치적 해결을 시도했을 뿐 아니라 11차례에 걸쳐 반민법 개정을 논의했다는 사실도 보여주고 있다.
이연구사는 이와 함께 ‘반민피의자에 대한 진정서 및 탄원서’를 통해 장·차관, 고위관리 등 이승만 정권의 핵심인물들이 반민특위의 재판과정에서 친일파의 증인으로 나서거나 이들을 위해 탄원하면서 반민피의자들을 비호했음을 증명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김성수의 동생 김연수. 반민 피의자로 체포된 김연수를 비호하기 위해 현상윤(당시 고려대학장), 최두선(동아일보 사장), 백관수(제헌국회의원) 등 8명이나 되는 거물급이 증인으로 동원됐다.
당시 반민특위 재판기록은 “증인으로 출석한 백관수가 ‘김연수는 만주국 총영사 임명을 거부했으나 조선총독부가 강제로 임명했으며 중추원 참의도 김연수는 모르는 사이 된 것’으로 증언했다”고 적고 있다.
이연구사는 특위요인 암살음모사건에 대한 대법원의 ‘최종판결문’을 발굴, 이 사건에 반민피의자 박흥식이 경찰국에 10만원의 사건자금을 제공했다는 사실을 새롭게 밝혀냈다. 또 이 사건에 대한 주한미국대사보고서를 인용, “정부가 (암살사건과 관련한) 법률 집행을 저지하려는 사람들을 원조했다”고 밝혀 특위요인 암살음모사건이 이승만 정권에 의해 은폐·조작됐을 가능성을 제기했다.
이연구사는 “각종 자료들은 이승만 정권이 반민특위 와해공작에 깊숙이 간여했음을 확인시켜 주고 있다”며 “친일파 비호세력이 국가권력을 장악했다는 점이 반민특위 실패의 주요원인”이라고 말했다.
<조운찬기자 sidol@kyunghyang.com〉
- 경향신문 > 문화 (2003. 11. 6 목)


책을 내면서
서론
제1장 반민특위의 배경 : 해방 직후 친일파 숙청 활동
제2장 참여적 개혁세력의 대두와 반민특위의 조직
제3장 반민특위 방해공작과 친일파 비호세력
제4장 반민특위의 활동과 와해
결론

부록 : 반민 피의자 명단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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