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노동당사

고세훈 (고려대)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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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나남신서 695
판형 양장본
면수 590
발행일 1999-08-20
ISBN 89-300-36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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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노동당사- 한 노동운동의 정치화 이야기

고려대 고세훈 교수가《영국노동당사》를 펴냈다. 이 책은 금세기 이후 영국 노동운동의 정치적 줄기인 노동당에 관한 기술로서, 선진국 정치에 대한 심층적인 사례연구가 극히 드문 우리 현실에서 매우 예외적인 업적으로 평가된다.

1900년 영국 노동당의 태동으로부터 최근 블레어의 '신노동당', '제3의 길' 구상에 이르기까지, 저자는 지난 100년의 영국 노동당사를 제도와 구조 그리고 에이전트들 간의 상호 다이나믹스, 정책과 당이데올로기의 변화 추이를 중심으로 기술, 분석하였다. 저자의 기본적인 관점은 블레어가 들어서기 전까지 영국 노동당의 정치란 노조운동의 적극적 관심 또는 태만(default)이 정해주는 경계 내에서 이루어져 왔다는 것이다. 이러한 시각에서 저자는 당지도부와 노동조합 진영, 의회노동당, 그리고 언제나 소수이면서 결정적인 시기마다 당정치를 주도하곤 했던 당내 좌파(Labour Left) 등 노동당 정치의 핵심적인 행위자들 상호간, 그리고 이들과 제도적 제약 사이의 역동적 상호작용을 드러내보이려고 시도한다. 그러한 과정을 통해 한 진보정당의 역사가 반드시 구조나 에이전트의 어느 일방에 의해 결정되지 않는다는 점을 확인하는 것이다.

특히 노동당 창당의 전후 맥락이 다소 상세하게 (전체 책 분량의 1/5 가량) 서술된 것이 눈에 띄는데, 이는 현재 진행중인 이 땅의 진보정당 창당 움직임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다. 이제까지 있어온 한국의 진보정당 실험은 그 시도 자체가 엘리트들, 즉 '위'로부터 비롯했다는 데서 근본적인 한계를 갖는다. 진보란 것이 ― 그 어떤 도저한 명분에도 불구하고 ― 결국 '아래'를 실천적으로 동원하지 않고는 그 정의가 불가능한 것이라면, '아래'의 조직과 동원이 어려울수록 더더욱 그 일은 절실한 과제일 수 밖에 없다. 한국의 노동운동은 그 자체로서 가장 활성화 되어야 할 때, 또 그럴 만할 때면 늘 자본과 국가의 노골적인 공세 앞에서 지레 기가 꺾였던 경험을 갖고 있다. 이제 절차 수준의 민주화가 웬만큼 진행되고나니, 이번에는 하나의 단위로서 노동운동을 조직하고 동원하기에는 이미 계급과 고용구조가 너무 딴판으로 변해 있는 것이다. 노동자 정당이 부재했던 그간의 현실과 더불어 계급형성 또한 변변한 단계에 와 있지도 못하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노동운동의 정치화란 어차피 장기적인 개념임을 인식하는 일이다. 노동당이 출범할 즈음 영국의 노조 조직율은 10%를 겨우 웃돌았고, 그나마 전 노조원의 2/3 이상과 노조운동의 정상기관인 노동조합회의(Trade Union Congress) 가입 노조원의 절반 이상이 거기에 참여하지 않았던 것이다. 더욱이 광부노조와 섬유노조를 포함한 대표적인 거대노조들은 아예 노동운동의 정치화 자체에 무관심하였다. 어찌보면 영국노동계급은 처음부터 정치화를 원하지 않았다고 보는 편이 옳다. 결국 ― 19세기 노조운동의 악명높은 숙련 / 비숙련 균열, 자발주의(voluntarism) 전통, 자유당과의 공조체제(Lib-Labism), 노동계급이 지배층에 대해 가진 영국 특유의 경외(deference) 문화 등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 노동당이 결성되기까지는 정치화에 목숨을 걸었던 소수 엘리트들의 부단한 노력과 자기양보가 있었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다. 특히 결정적인 역사적 계기마다 그것을 포착하여 전향적으로 활용하려 했던 이들 정치행위자들의 투철한 역사의식과 결연한 자기희생을 인정해야한다. 그들은 이론에 기대 역사의 흐름을 지레 예단하거나 구조를 빗대 전망을 냉소하지 않았고 또한 과도한 낙관에 빠지지도 않았다. 바로 이 점이야말로 현재 우리의 진보정당 결성의 움직임이 영국 노동당의 역사로부터 얻을 수 있는 교훈일 것이다.

책 마지막 부분에서 저자는 최근 서유럽 중도좌파 정치를 주도하는 블레어의 '신노동당'과 '제3의 길'에 관해 논의한다. 저자는 블레어의 노선보다는 그것을 다분히 의심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는 당내좌파들의 주장에 훨씬 동조적이다. 저자에 따르면 '제3의 길'은 하나의 정연한 이론체계이거나 당장 실천에 옮길 수 있는 정책제안이라기 보다는 블레어의 현실정치적 필요에 의해 산출된 측면이 강하다. 애초에 절충적이고 일견 '모두를 즐겁게' 하지만, 그러한 만큼 냉혹한 선택의 연속인 현실정치의 논리와는 상충할 수밖에 없다. 사실 블레어가 집권할 즈음에는, 영국의 정치지형은 이미 완전히 우편향적으로 기울어 있었다. 보수당(특히 대처)의 장기집권(그리고 현실사회주의의 몰락)이 영국정치에서 정책논쟁의 지평 자체를 이전시켜 버린 것이다. 대처리즘이 그 절정으로 치닫던 1983년에 웨스트민스터에 첫발을 디뎠던 블레어의 정치적 순항(順航) ― 그늘내각의 에너지장관, 고용장관, 내무장관을 거쳐 당수와 총리에 오르는 ― 기간은 동시에 노동당 내부에서 권력구조 개편이 본격적으로 진행된 시기와 정확히 일치한다. 노동당 내의 좌파진영은 거듭된 총선 패배의 책임공방 와중에서 급속히 한계화되었고, 창당 이후 당내정치의 핵심적 변수였던 노조진영과의 제도적 '거리두기'는 가속화되었으며, 좌파정치의 온상이었던 지구당 간부들(activists)의 입지는 사실상 거세되었다. 블레어가 당수로 되면서 노동당이 80년간 지탱해온 당헌의 사회주의조항(조항4)이 전격적으로 폐기되는 등 당이념과 조직에서의 우경화는 더욱 가속화되었다. 특히 한때 50%를 상회했던 노조가입율은 이제 30%를 간신히 넘는 실정이며, 노동당 총수입의 90% 이상을 점했던 노조 가입비의 기여분은 이제 60% 미만으로 떨어졌다. 전당대회와 중앙집행위원회 등 당의 핵심적 정책기관에서 노조의 지분은 급속히 축소되었고, 노조가 누리던 전통의 블록투표는 아예 폐지되었다.

그러나 저자의 시각은 명확하다. 즉, 거의 유례없는 압승으로 총리에 오른 블레어일지라도 '선출된 독재'의 길을 막무가내로 택할 수는 없으리라는 것이다. 블레어 총리 주위에 포진한 존 프레스코트 부총리와 고든 브라운 재무장관 그리고 로빈 쿡 외무장관은 모두 당권의 야심을 한시도 놓지않은 역전의 전사들이며 동시에 넓은 의미의 이데올로그들이다. 노동당 집권 이후 이들 사이에는 때론 보이고 때론 보이지 않게 긴장과 갈등이 끊이지 않았거니와 지금처럼 노동당이 의회에서 넉넉한 다수를 유지하는 한 그간 침묵하던 평의원들(backbenchers)과 좌파진영의 목소리 또한 심심치 않게 들려올 것임이 분명하다.

더욱이 영국 노동당은 하디(Keir Hardie)에서 토니(Richard Henry Tawney)를 거쳐 나이 베반(Nye Bevan)에 이르기까지, 현실정치적 실천과는 별도로 사회주의의 정신만은 일정하게 견지해온 정당이다. 예컨대 서유럽의 사민정당들이 현실정치의 논리에 밀려 생산수단의 공공소유를 포기한 후에 점차 케인즈주의의 폐기를 추구했던 것과는 달리 영국 노동당의 경우는 1976년 당시의 캘러한 총리가 케인즈주의의 공식적 소멸을 공언한 이후 20년이 지난 1995년에 이르러서야 (블레어가) 국유화를 당의 공식적 목표로 명기했던 유명한 조항4를 당헌에서 제외시켰다. 케인즈주의적 사민주의가 근본주의에 앞서서 포기된 기이한 전도였다. 문자적 규정이나 현실정치적 논리 혹은 언명에 의해 쉽사리 소멸되기 어려운 것이 곧 '정신'이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노동당정치가 '죽지 않았다'고 주시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더불어 과거 18년 동안 보수당의 퇴진에 총력을 기울였으며, 또한 지난 2년간은 블레어의 '제3의 길' 실험을 반신반의하며 관망해 오던 진보적 지식인들 ― 이들은 영국학계와 언론계에 광범위하게 포진해 있다 ― 의 차후 행태도 블레어 정부의 운신을 제약하는 빼놓을 수 없는 요인으로 작용할 것이다.

끝으로 책 말미에 첨부한 보론〈영국 보수당 보수주의와 대처리즘〉은 독자들에게 영국보수당의 이념사를 일별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할 것이다. 최근 회자되는 대처식 신자유주의의 역사적 성격에 대한 이해와 더불어 보수당 정치와의 대비 속에서 노동당 정치를 파악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제1장 전사(前史)와 태동(~1900)
제2장 출범과 모색(1900~1914)
제3장 전쟁과 개편(1914~1918)
제4장 약진과 관망(1918~1929)
제5장 시련과 재기(1929~1939)
제6장 참여와 구상(1939~1945)
제7장 개혁과 갈등(1945~1951)
제8장 합의와 소강(1951~1964)
제9장 권력과 오만(1):1964~1974
제10장 권력과 오만(2):1974~1979
제11장 내홍과 침체(1979~1987)
제12장 타협과 변신(1987~1992)
제13장 정치와 도약(1992~1997)
제14장 후기:'제3의길'과 블레어 정치의 허실

보 론 영국 보수당 보수주의와 대처리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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