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정치사상사

신복룡(건국대) 지음

판매가(적립금) 12,000 (600원)
분류 나남신서 553
면수 420
발행일 1997-08-30
ISBN 89-300-35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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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도서 금액     12,000
이 책은 기존의 사상사의 틀을 깨고 있다. 복잡하고 전문가들 이외에는 이해하기 힘든 개념과 이론에 대한 논쟁들을 다루는 대신 시대와 인물에 대한 풍부한 정보와 분석을 바탕으로 보다 포괄적인 의미에서의 '사상'에 접근하고자 했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저자는 정치사상에 대해 주제별로 접근하고 있다.

책은 전체적으로 3부로 나뉘어 있다. 독립된 장을 형성하는 서장에서는 기존의 역사학계에 대하여 신랄한 비판을 가한다. '비분강개의 역사학', '학문의 근친상간', '대룡시각', '빗나간 민중주의 사관' 등의 소제목에서도 볼 수 있듯이 저자는 한국 역사학계의 문제점들을 정면으로 파헤치고 있다. 제1부는 '서구와의 만남 : 전통과 근대의 갈등'으로 서낭의 군사적 의미, 천주학의 전래와 조
선조 지식인의 고뇌, 개화파의 정치사상 등의 3장으로 형성되어 있다. 이 장들은 각기 전통민중문화와 유교문화가 외세에 의해서, 그리고 근대화의 과정을 통해서 어떻게 변질되어 갔는가를 살펴본다. 여기에서 저자는 정치사와 지성사는 물론 고고-인류학적, 향토사학자적 방법론을 채용하며 종횡무진, 실로 다양한 차원에서 전통과 근대의 만남을 분석해 내고 있다.
제2부는 '한국민족주의의 이해 : 태동과 전개'라는 제목하에 '한국사에서의 해양정신', '한국민족주의를 보는 시각', '근대한국 민족주의의 갈등 구조 : 1860-1910', '위정척사와 의병의 정치사상', '해방정국에서의 우파 이데올로기 : 민족주의적 정향을 중심으로' 등의 글들이 있다.

'한국사에서의 해양정신'에서 저자는 신라시대의 장보고에서 시작되어 삼별초, 충무공에 의하면 면면히 이어온
해양정신을 부각시면서 한국민족주의의 새로운 지평을 열 것을 촉구한다. 여기에서 중요한 사실은 저자가 결코 '민족주의'를 '단일민족의 신화'와 같이 핏줄이나 지연 등의 차원에서 바라보기보다는 '공동운명체적 연대의식'에서 찾을 것을 주장하고 있다는 점이다. 즉, 저자는 민족주의를 긍정하면서도 그것이 켤코 흔히 볼 수 있는 원시적인 집단의식의 수준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된다는
점을 지적한다. 이것은 우리 역사학계, 그리고 나아가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단순하고 일차원적인 민족주의 사관에 대한 따끔한 비판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저자의 이같은 개방적인 민족주의관은 다른 글들을 통해서도 여실히 드러나고 있다. 민족주의를 주장하면서도 그것이 특정한 인종, 종교, 사상에 국한되지도 않고 국한되어서도 안된다는 것을 저자는 다양한 시대의 정치사와
사상사를 통하여 보여주고 있다.
제3부는 '한국 민주주의의 시련 : 유산과 한계'라는 제목하에 '한국 민주주의의 유산과 그 미래', '동학의 정치사상', '조선조 말기의 개혁사상', '한국의 지역 감정의 역사적 배경 : 호남 phobia를 중심으로' 등의 글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 부에서도 역시 저자는 언뜻 보기에는 연관성이 없어 보일 수도 있는 주제들을 통하여 한국의 민주주의의 과거와 미래를 심층적으로 다루고 있다. '한국
민주주의의 유산과 그 미래'에서는 민주주의의 정착과 발전에 긍정적인 기여를 할 수 있는 문화적 유산들과 비민주적인 요소들을 갖고 있는 유산들을 포괄적으로 다루고 있다.

'두레', '품앗이', '부락제'에서 '향약', 고구려의 관료제도, 백제의 민의제, 신라의 화백제도, 고려의 사심관, 조선의 삼사, 언로 등에 이르기까지 의식, 제도들에 대한 분석을 통하여 한국의 전통이 민주적인 요소들을 많이 갖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한국의 다양한 사상과 제도가 지극히 비민주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음도 철저히 파헤치고 있다. 그리고 일본군국주의, 민족분단, 자본주의 등 현대 정치사의 경험들이 민주주의에 끼치는 해악에 대해서도 분석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여기에서도 저자는 어느 특정 종교나 사상, 제도를 완전히 민주적이라거나 비민주적이라는 단순한 이분법적 논리에 빠지지 않고 분석하고 있다는 점이다.
정치사상사를 고집하지 않고 책을 읽기 시작한다면 이 책이 왜 '한국정치사상사'인가를 알 수 있게 된다. 현대 한국의 민주주의와 민족주의, 그리고 서양의 외래사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한국의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는 지성사와 정치사는 물론 사회사와 경제사, 종교사를 살펴보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러한 어려운 작업을 수행하면서도 어느 특정 주의나 사관에 치우치지 않고 있다. 사실 역사를, 그것도 정치사상사를 기술하는 과정에서 특정 이념에 바탕을 둔 사관의 관점을 피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특히 한국의 지성사와 정치사가 여전히 그 당시의 정치적 상황과 사상적 담론의 객관적인 실체를 드러내기보다는 특정한 정치적 당위를 주장하고 설파하기 위한 도구로 전락하는 경우가 허다하다는 사실을 상기해 볼 때 객관성과 중립성을 유지한다는 것은 매우 어렵다.

함재봉(연세대 정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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