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 한국사회 저변을 흐르는 힘의 주체
매체명 : 간행물윤리   게재일 : 2001-12-01   조회수 : 9627

간행물윤리 | 2001. 12. 1.

 

출판, 한국사회 저변을 흐르는 힘의 주체

 

 

나남출판사의 엘리베이터 안에는 작은 글씨로 “나남은 책을 만들고 책은 사람을 만듭니다”라고 씌어 있다. 삼단논법이고 뭐고 따질 일 없이 ‘나남이 사람을 만든다’는 말 아닌가. 무심코 지나치면 안보일 만큼 작은 글씨지만 대단히 야심 찬 구호이다. 출판사 입구에 붙여놓고 주인이든 손이든 지나갈 때마다 이 말을 음미하고 다짐한다.

시인 조지훈을 흠모해서 아들 이름을 ‘지훈’으로 지었다는 소문을 들었는데 자세히 보니 출판사가 든 빌딩이름도 ‘지훈’이었다. 사장실은 꼭대기층에 따로 있다고 했다. 자그만 계단을 올라가 다락방같이 자리 잡은 꼭대기층의 문을 열자 무슨 동화 속처럼 넓은 방이 나왔다. 그 방 앞은 푸른 식물이 자라는 널찍한 공중화단이었다. 푸른 식물은 자세히 보니 대나무가 주종이었다. 벽면엔 책이 빽빽했고 내가 동경하던 아주 큼직한 책상이 놓여 있었고 그 책상 앞에 선비 같기도 하고 호걸 같기도 한 방 주인이 앉아 있었다.

엘리베이터에서 그 방까지 가는 길의 참신함에 나는 이미 조금 흥분해 있었다. 통로까지 책으로 터널을 이루던 영세한 출판사에 익숙하던 내 눈에는 나남출판사의 멋진 빌딩 자체가 감탄이었고, 대나무를 내다보며 가죽소파에 앉는 사장실의 규모 자체가 유쾌하고 통쾌했다. 그래서 방 임자에게 대뜸 이렇게 말했다.

“와아, 대단히 좋은 방입니다. 출판사에 와서 이런 좋은 방은 처음 봤습니다. 성공하셨다는 것을 한눈에 알겠습니다.”

조상호 사장은 “에이, 여보시오” 하면서 내가 앉은자리로 천천히 걸어왔다.

“엘리베이터 안의 강력한 구호를 봤습니다. 처음부터 그런 이상과 야심을 가지신 채 출판사를 시작하신 거로군요? 출판사를 해서 ‘사람을 만들어줄 책을 만들’ 결심은 도대체 언제부터 하셨던 겁니까?”

그는 다시 한번 “에이, 여보시오. 그런 말 마시오”라고 손을 저었다. 

 

“이상은 무슨 이상. 다 먹고살기 위해서 하는 거지. 그렇게 근사하게 의미 부여하지 마시오.”

나는 당황했다. 그렇지만 입에 신물이 확 고일 만큼 흥미가 당겼다.

“그렇지만 하고많은 일 중에서 출판을 택하셨을 때는 무슨 이유가 있었을 것 아닙니까?”

“우연히 했을 뿐이오. 우연히.” 

 

냉소인지 겸손인지 그냥 말버릇인지. 주인의 이야기보따리를 펼치려면 접근을 어떻게 해야 좋을지 탐색하는 나에게 조 사장은 다시 한번 일갈했다.

“사람들은 먹고산다고 하면 우습게 생각하지만 사실 먹고사는 게 제일 중요한 거 아니오? 고슴도치가 새끼를 껴안는 것을 거룩한 사랑이라고 말하지만 사실 본능 아니오? 잠깐 와서 몇 마디 얻어듣고 날 평가하려고 하지 마시오. 난 인터뷰 좋아하지 않아.”

인터뷰를 좋아하지는 않을지라도 그가 이야기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인 줄은 곧 눈치챌 만했다. 열정이 많은 가슴을 가진 이가 입을 꾹 다물고 있기가 어디 쉬울까. “상당한 괴짜시군요.” 하자 이야기가 줄줄이 쏟아졌다.

대졸실업자가 늘어난다는 신문기사를 지적하면서 “사회에서 대졸자에 대한 기대치가 없어졌는데 그렇게 말하는 건 문제지요. 본질적으로 불평등한 것은 불평등하게 대하는 것이 평등 아니겠소. 100을 노력하고 60만 받아도 감사해야 할 판에 노력은 50을 해놓고 100을 못 받는다고 불평해서는 안 되는 일이잖소” 하기도 하고, “작은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이 너무 많지 않아요? 규칙을 어기는 것이 요령 좋은 것처럼 인정되는 것은 큰일”이라는 개탄도 했다.

그는 세상에 대해 독설과 야유를 쏟아놓기에는 호탕한 실천자의 면모이고, 타협하며 물러앉기에는 순결한 이상주의자인지도 모르겠다. 그의 이력이 그것을 말해준다. 나남의 책의 목록도 그렇게 말하고 있다.

그의 신념을 말하려면 조지훈 선생 얘기부터 우선 시작해야 한다. 광주고 시절 문학강연을 하러 광주에 내려온 지훈 선생을 처음 뵈었다. 검정 두루마기를 입고 선비의 지조를 말하는 선생에게서 ‘지사에 대한 충격’을 받았다. 그는 망설임 없이 지훈 선생이 계시던 고려대학으로 진학했다. 법대였다. 아쉽게도 선생이 세상을 떠나시는 바람에 직접 배우지는 못했다. 그러나 선생의 글은 언제나 그의 지침이었다. 그가 애송한다는 지훈의 시 한 구절만 훔쳐 읽자. 나남출판사의 출판이념과도 일맥상통한다.


마음이 가난한 게 유일한 재산이올시다.
어떠한 고난에도 부질없이 생명을 포기하지 않을 신념이 있습니다.
조금만 건드려도 넘어질 사람이지만
폭력 앞에 침을 뱉을 힘을 가진 약자올시다.


1971년 대학 2학년. 청계 피복노조사건으로 소란스럽던 시절, 대학 내 지하신문인 〈한맥〉을 만들었다. 경기도 광주 철거민단지 소요사건을 기사화한 것이 화근이었다. 위수령으로 제적되고 강제징집되어 휴전선 철책에서 총을 들고 보초를 섰다.

내놓고 말하지는 않지만 ‘팔리지는 않아도 있어야 할 책’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은 이때부터 싹텄던 모양이다. 1976년 복학해서 전 6권의 조지훈 전집을 사서 책 앞장에다 이렇게 쓴다. “라이온스 장학금의 힘을 입어 지훈의 품에 안기다.”

아들을 낳아 이름을 지훈으로 짓고 뜻을 세운 출판사를 들어앉힐 빌딩 이름을 존경하는 스승 이름을 따고, 마침내 올해는 상금 천만 원을 주는 ‘지훈상’을 만들어 시상했다. 존경하는 사람이 없다고 말하는 이가 태반인 쓸쓸한 시대에 조 사장의 외곬사랑은 하도 아름다워 그 흔한 ‘신지식인’ 칭호라도 붙여주고 싶을 지경이다. 지훈이 지사였으니 그도 지사일 수밖에 없다. 뜻을 세우고 굽히지 않는 삶을 살았다. 입으로 “에이. 여보시오”, “먹고살기 위해서”를 반복하는 자체가 지사적 태도일 거라는 의심도 간다.

1979년 졸업하고 ‘나남’이란 출판사의 간판을 내걸었다. ‘나남’이 신채호의 사관(史觀)인 역사란 ‘나와 남과의 투쟁’이라는 의미에서 연유되었다는 말을 그에게서 직접 듣지는 못했다. “출판을 통해 어떤 권력에도 꺾이지 않는 정의의 강처럼 한국사회의 밑바닥을 흐르는 힘의 주체를 그려보고자 했다”는 말도 자료에서 읽었다.

그는 처음 출판을 비즈니스로 알고 시작한 사람이 아니었다. ‘쉽게 팔리지 않고 오래 팔리는 책’이 뭘까를 궁리하는 사람이었다. 첫 출판은 러셀의 《희망의 철학》이었다. 까딱하면 금서가 되기 십상인 책이었다. 팔릴 기대는 애초에 없었다. 그러나 이변이 생겼다. 이화여대에서 교재로 4천 권을 주문해 온 것이다. 꽃다운 처녀들이 품고 다닐 책이라니. 그는 먼지 속에 쌓여 있던 초판 3천 부를 몽땅 폐기하고 외장을 멋지게 바꿔 새로 찍었다. 그러면서 깨달았다. 책도 잘 만들면 사업이 되는구나.

그 후 나남은 사회과학 전문출판사로 우리 지성사에 뚜렷한 맥을 이뤘다. 나남신서, 나남문학선, 나남산문선, 사회비평총서 해서 총 도서목록이 2천 종을 훌쩍 뛰어넘는다. 언론학, 광고학 등 커뮤니케이션 관련 책이 가장 많다. “나남의 책이 없으면 신문방송학과 커리큘럼을 짤 수 없다”는 말이 전혀 과장이 아니다.

그는 종종 “출판을 통해 언론을 도와주고 싶었다”고 말한다. 이건 두 가지 의미로 들어도 무방할 듯하다. 첫째는 그의 장래희망에 관한 얘기. 그는 철들면서부터 신문사 사장이 되는 것이 꿈이었다. 그러다 신문사 사장이 못될 바에는 신문인력을 기르는 대학교수들에게 내 손으로 책이나 만들어주자 싶었다. 두 번째는 출판의 사회적 기능에 관한 얘기. 제도언론이 제대로 구실하지 못하던 시절, 사회비판 기능을 담당하기 위해 출판은 피나는 싸움을 벌였고 그 중심에 언제나 나남이 있었다.

그는 한양대학에서 “한국 언론과 출판저널리즘”이란 논문으로 학위를 받은 박사 사장이다. 그 서문에 써놓은 글을 보자. 그의 출판인으로서의 삶을 절실하게 말해주는 구절이 있다.


책 속에서 내가 가지 못했던 길을 가는 사람들의 땀 냄새에 취하면서 사람다운 사람을 만들고 책다운 책을 만들겠다는 자기암시로 견딘 시간들이었다.…어쩌면 칭기즈칸의 말채찍을 빌려 지적 유배의 어두운 동굴을 박차고 나가고픈 자기 입증의 궤적일지도 모른다.…상인이면서도 그런 상인일 수 없다고 되뇔수록 상인세계의 냉혹한 질서는 거센 파도가 되어, 권리는 없고 스스로에게 포박당한 의무밖에 없는 사회과학출판의 발행인이라는 방파제를 그렇게 덮쳐 안으로 멍이 들 때마다 더욱 의연해야 했다.


나남은 내년 박경리의 《토지》를 새로 낸다. 선생에게 인세 아닌 최대 예우로 일괄지급방식을 취하고서. 조 사장 같은 거물이 아니면 내놓기 어려운 제안이었다.

“책 한 권이 나올 때마다 배 속에 아이를 품고 있는 것 같죠. 불안하고 설레고…. 그 속 타는 것을 누구한테 다 말하겠소?”

그는 이룰 꿈이 있다. 국립묘지가 국가유공자를 묻는 묘역이라면 그는 우리 정신문화에 큰 족적을 남긴 실천지식인, 문화예술인을 모시는 아름다운 묘원을 만들고 싶다고 한다. 거기 묻히는 일 자체가 영예가 되고 거기 묻힐 자격을 유지하려고 노년이 되어도 자신의 삶을 개결하게 추스를 수 있는 묘원, 평생 모실 스승을 가진 사람다운 멋진 발상이다.

나는 탄복하며 무릎을 친다. 휴일이면 그는 포천시 광릉수목원 곁에 마련한 나남농장에 나가 매화나무를 심는다. 꽃을 보고 매실을 따며 허허롭게 웃는다. 이런 말은 사양하겠지만 그는 큰사람임이 틀림없다.

 

글 | 김서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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