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은 생명이며 세상의 창"
매체명 : 한겨레   게재일 : 1999-12-02   조회수 : 9650

한겨레 | 1999. 12. 2.

 

"책은 생명이며 세상의 창"


 

단행본 발행 국내 정상급, 70ㆍ80년대 책을 통해 사회참여 이끌어

 

“조 사장은 한국에서 가장 정력적으로 책을 만드는 사람이에요.”


“아이구, 사돈네 남 말 하시네.”

한길사 김언호(54) 사장과 나남출판 조상호(49) 사장. 서울 효창공원 나무 둥치에서 사진을 찍으며 두 사람은 서로를 추어올리기에 바빴다. 그럴 만도 하다. 인문사회과학 출판사로서 20년 넘게 한우물을 파 출판계의 정상에 섰으니까. 김 사장은 자신의 ‘출판론’을 들어 조 사장의 ‘에너지’를 칭찬한다.


"도저한 문화주의 감탄" "온몸으로 책 만들어" 서로의 열정 추어올려


“책은 머리로 만드는 것도 아니고, 발로 만드는 것도 아니고, 온몸으로 만드는 것이다. 이게 내 지론인데, 머리와 가슴과 다리를 총동원해서 책을 만드는 사람이 조 사장이요.”

조 사장은 상대방의 ‘도저한 문화주의’에 감탄한다. “이 시대에 이런 문화론자가 없어요. 출판사 사장이라고 한정할 수 없는 분이에요. 1980년대 엄혹한 상황에서 사람을 끌어모아 지식인 연대를 만들었잖아요. 조직이 아니라 개인이 이런 일을 해낸 건 처음이었어요.”

조 사장의 말은 김 사장이 1980년대 중반부터 ‘한길역사강좌’, ‘한길역사기행’, ‘한길사회과학강좌’ 같은, 우리 현실을 역사적ㆍ사회과학적 시각으로 인식하는 문화운동을 일으킨 것을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이다.

두 사람의 대화는 자연스럽게 1970~1980년대 사회과학 출판운동의 의미로 옮아갔다.

“1970년대에 시작돼 1980년대에 본격화한 사회비판적 지식인 연대는 출판사가 했다고 봐야 해요. 사실은 역사의 고비고비마다 출판이 큰일을 했지요. 일제시대, 해방정국, 그리고 긴 군사독재 치하에서 출판인들이 책을 만들었어요. 싸움의 동력이었지요. 책을 통한 사회참여는 중요하게 기록돼야 할 일입니다”(김 사장).

“《해방전후사의 인식》 같은 책은 분단문제에 대해 눈을 뜨게 해준 책이었어요. 사회과학의 이름으로 당시 언론이 하지 못한 일을 대신 한 것이었죠. 더 가치 있는 것은, 그때의 출판운동이 무슨 대가를 바라고 한 일은 아니었다는 것이죠”(조 사장).

확실히 한길사는 언론이 침묵하던 독재체제 아래서 할 말을 대신한 출판운동체의 한 모범이었다. 〈동아일보〉에서 해직된 김 사장은 1976년 한길사라는 이름의 출판사를 차리고 1977년부터 ‘오늘의 사상신서’를 기획, 출판하기 시작해 리영희 교수의 《우상과 이성》과 같은 시대의 폐부를 찌르는 책을 잇달아 내놓았다. 1979년부터는 10년에 걸쳐 《해방전후사의 인식》 전 6권을 펴내 지식인과 대학생의 사회인식을 확 바꿔놓았다. 이른바 ‘의식화 서적’의 전형이었던 셈이다.

조 사장이 사회과학 출판에 뛰어든 것도 김 사장의 경우와 크게 다르지 않다. 대학 시절 지하신문을 만들고, 감옥에 가고 제적생이 된 그에게 사회과학출판은 운동의 연장선상에서 이루어진 일이었다. 1979년 나남출판사를 세워 김준엽의 《장정》, 김중배의 《하늘이여 땅이여 사람이여》를 비롯한 사회의식이 강한 책들을 그의 주요 출판 목록에 올렸다.

그렇다고 두 사람이 시대적 사명감 때문에 모든 걸 팽개쳤다는 건 아니다. “한국사회에서 나름대로 의미 있고 영향력 있는 고급스러운 책을 만들면서, 먹고사는 문제, 아이들 키우는 문제를 해결한 것은 굉장한 행운이죠. 사실 그만한 행복이 없어요.”

두 출판사가 내는 책의 규모로 보면 단행본 출판사로는 국내 정상급이다. 한길사는 24년 동안 모두 1,500여 권의 책을 펴냈다. 그중에 27권으로 된 《한국사》는 8년의 산고 끝에 나왔고, 20권으로 이루어진 《함석헌 전집》은 김 사장이 가장 소중히 여기는 역작이다.

나남출판은 20년 동안 1,600권을 만들었다. 1990년대 들어서는 한 해도 거르지 않고 해마다 100권씩 책을 펴내고 있다. 조 사장이 특히 주력하는 분야는 언론학 관련 서적. 지금까지 400여 권이 나왔다. “커뮤니케이션학에서 커리큘럼을 형성했다”고 자부할 만도 하다. 하지만 그가 가장 자랑하는 건 9권으로 갈무리한 《조지훈 전집》이다.

“출판인은 결국 마음에 가장 깊이 품고 있는 사람의 책을 내게 돼 있는데, 김 사장이 함석헌 선생이라면 나는 조지훈 선생인 셈이죠.”

두 사람이 각기 존경하는 사람이 따로 있듯이, 관심 있는 책도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 김 사장은 1990년대 들어 특히 인문학의 고전을 소개하는 데 열정을 기울이고 있다.

“한국 사회를 보면 지식의 깊이와 넓이가 아쉬울 때가 많아요. 또 너무 감성적이어서 이성적인 면이 부족하죠. 때문에 우리 사회를 이성적 사회로 만드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봐요. 그러려면 역시 필요한 것은 보편적 사상입니다. 우리 것을 지키면서도 세계적 수준의 보편적 정신을 담고 있는 깊이 있는 책을 많이 소개하고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죠.”

김 사장이 1990년대 들어 기획한 ‘한길그레이트북스’, ‘세계철학사’, ‘신한국사상사’, ‘한길로로로’ 등이 대체로 이런 전제에서 나온 출판목록이다. 반면 나남출판의 관심은 조금 다르다. “이제까지 사회과학 출판사들이 외국 것 번역해 내놓는 데 급급했는데, 이제는 우리 이야기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시대가 가벼워질수록 출판의 몫 커져" 지식사회 르네상스 꿈꿔

 

“지난 수십 년 동안 우리는 격동의 세월을 살았어요. 지금은 이 경험을 기저로 한 책을 많이 생산해야 할 때입니다. 평등을 이야기해도 우리의 경험으로 우리 얘기를 해야지요.”

생각의 편차가 있긴 하지만 두 사람의 공통관심은 “담론의 수준을 한 단계 높이고 지식사회의 르네상스를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반대쪽으로 경솔하고 부박한 쪽으로만 가고 있다.” 그렇다고 이런 시대 흐름을 마냥 외면할 수도 없다.

“진지한 내용을 담고 있으면서도 시대와의 접점을 찾는 것이 필요합니다. 인터넷이 새로운 문명사적 현상이니만큼 인터넷을 활용하는 출판전략을 짜야지요. 인문학을 전문적으로 소개하는 인터넷 사이트를 내는 것, 인터넷을 통해 서적 판매망을 확보하는 것도 하나의 실험이 될 수 있겠죠. 인터넷이 채팅 마당만 돼서는 안 되잖겠습니까. 출판이 이니셔티브를 쥐고 인터넷 시대로 들어갈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김 사장).

김 사장은 자신의 저서 머리말에서 “책은 생명”이라고 말했다. 조 사장은 자신의 저서에서 “출판은 세상을 보는 창”이라고 규정했다.

사람이 만들어서 사람을 만드는 것이 책이니 살아 있는 생명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요, 무지를 깨우쳐 인간정신을 고양시켜 주는 것이 책인 만큼 출판이 세상을 보는 창인 것도 사실이다. 두 사람은 “상상력을 해방시키고 이성이 살아 숨 쉬는 사회를 만드는 일 한가운데 책을 쓰고 만들고 읽는 사람이 있다”며, “시대가 가벼워질수록 출판의 몫은 커진다”고 입을 모으며 이야기를 마쳤다.

  

글 | 고명섭 기자 michael@hani.co.kr

사진 | 김봉규 기자 bong9@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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