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상호 사장의 박사학위논문을 읽고
매체명 : 나남출판 4반세기   게재일 : 1997-07-01   조회수 : 9665

나남출판 4반세기(나남 펴냄) | 1997. 7. 1.

 

조상호 사장의 박사학위논문을 읽고

 

 

1970년대에서 1987년에 이르기까지 권위주의하의 대항문화로서 출판 담당자들의 인적 배경과 그 역할을 논의했다. 그 인적 배경을 세 집단으로 제시하는데, 해직기자, 해직교수, 제적학생이 그들이다. 마비된 언론체제하에서 배제된 지식인들은 자연히 대체언론으로서 출판을 택했다. 예컨대, 1970년대에는 창비의 활동이 두드러졌고, 1980년대에는 한길사의 역할이 두드러졌다. 이들의 활동은 1987년의 민주화에 일조했다. 또한 한국출판 고급화의 빠른 성장을 가능케 했다. 그들의 기본이념은 ‘지사정신’으로 요약되며, 1980년대의 한때는 이른바 ‘좌파상업주의’(주 1)라고 하는 또 다른 걸림돌과 만나기도 한다. 또한 미분화상태에서 탈피하여 좀더 전문화된 자본주의 기업으로의 변신이라는 과제를 남기고 있다. 이들에 대한 좀더 심층적 평가는 아직 후일의 과제로 남지만, 어쨌든 저자는 한국 정치발전에서 이들의 긍정적 역할을 인정한다.

전체적 서술은 방만하다는 느낌을 준다. 그 이유는 첫째, 박사학위논문이라는 형식에서 오는 구조적 제약이다. 즉, 체면을 차리기 위해 쓸데없는 전문개념들을 나열했다. 이는 보기 드물게 비평과 사실묘사가 적절히 어우러져 살아 움직이는 이 논문을 3분의 1쯤은 죽였다. 둘째, 감성적 측면이 너무 조상호 사장의 박사학위논문을 읽고 드러난다. 이는 서술대상이 되는 격동의 현장이 저자 스스로가 뼈저리게 겪었던 상황이기 때문일 것이다. 논문에서는 결코 감성을 드러내서는 안 되는 제도권 학계의 죽은 논리를 찬성하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감성’은 비판적 성찰이 철저히 유지되지 않을 경우 객관성의 한 귀퉁이를 손상시킬 여지가 있다. 셋째, 저항운동과 정부의 탄압정책의 서술이 과다했다. 출판사(史)와 비교할 때 운동사(史)는 식상한 느낌을 주었다. 이는 간단히 요약하고 참고문헌을 소개하는 정도로 끝내고, 좀더 심층적 출판사(史) 분석으로 들어갔으면 더욱 좋았을 것이다. 넷째, 정작 중요한 개념인 ‘지사정신’과 ‘좌파상업주의’는 시종일관 모호하게 사용된다. 개념정의상으로 전자는 운동사와는 달리 독자가 참고문헌을 참조해야 하는 수고를 해야 할 것 같다. 또한 이 개념이 1960년대에서 1980년대의 모든 저항적 출판운동가들 모두에게 적용되는지, 아니면 그중 일부에게만 적용되는지가 모호하다. 후자는 저자가 명확한 개념정의를 제시하지만, 그 대상이 모호하다. 당시의 사회과학출판 담당자들이 이 말을 들으면, “Who? Me?”라고 반문해 올 것 같다. 이 개념들이 좀더 명확히 사용되었으면, 훨씬 응집성 높은 글이 될 뻔했다.

요약하면, 이 책의 서술에서 느껴지는 방만함은 박사학위논문에 요구되는 형식성과 체험에서 우러나온 주관성이 서로 격리된 채 나열된 데서 오는 것 같다. 박사학위논문이란 것이 원래 연구목적, 연구방법, 이론적 배경 등을 형식적으로 나열해야 한다는 제약이 있다는 점에서 크게 이해 못 할 일은 아니나 약간 아쉬운 것도 사실이다. 현란한 학술적 치장이 일반 독자의 접근을 방해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와 같은 주제에 대해 자료, 경험, 시각의 측면에서 저자를 능가하는 후학이 나오기는 당분간 어려울 것 같다. 아니, 그런 것을 떠나서 이처럼 생생한 1970~1980년대에 대한 사회사적 저술이 과연 몇 개나 될까? 이것만으로도 이 글은 충분히 가치 있다.

그중에서도 무엇보다도 1970~1980년대의 사회과학출판을 ‘대체 언론활동’으로 규정하는 시각을 제공한 것이 가장 큰 공로다. 그것은 그 시대 출판의 많은 부분을 설명해준다. 왜 저자나 역자 중에 교수보다 기자가 더 많았는지(1980년대에 대학을 다닌 나는 저술이란 원래 기자들이 하는 것인 줄 알았었다). 그토록 어려운 여건에서도 왜 그토록 막대한 양의 사회과학출판이 이루어졌는지, 그리고 상황이 조금은 바뀐 오늘날에는 왜 그토록 급속도로 사회과학출판이 사라져 갔는지에 대한 명쾌한 해답을 준다.

이는 당시의 사회과학출판의 공로와 한계를 드러낸다. 경제적으로 정치적으로 어려운 여건 속에서 헌신적으로 출판을 강행함으로써 정치발전에 일조한 그들의 공로는 크다(주 2). 그러나 그들이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다른 대안이 없었다는 한계 상황 때문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출판장이’ 및 ‘전문저술가’라기보다는 출판을 매개로 한 ‘운동가’ 쪽에 가까웠다. 이때는 전문성과 함께 책임성을 담보하기가 어렵다. 이와 같은 한계는 저자가 좌파상업주의라 규정하는 집단에서 가장 극명히 나타날 것이며, 대체언론으로서의 출판인 모두에게 조금씩은 있을 것이다. 그리고 상황이 변한 지금, 그들의 존재이유는 사라졌으며, 그들은 지금 조금은 방황할 수도 있을 것이다. 사실상, 현시점에서 당시에 출판된 막대한 양의 책들이 시장에서 학계에서 생명력을 상실하고 있다면, 그 이유는 아카데미즘이 아닌 저널리즘이었기 때문이다.

이는 1990년대의 출판인들과 저자들에게 현재의 위치를 알려준다. 1990년대의 개방과 세계화 바람은 사회과학의 저자와 출판인들에게 또 하나의 시련을 던져주는데, 그것은 국제경쟁력이다. 사회과학출판의 국제경쟁력은, 저자가 책의 타 매체에 대한 비교우위성 설명에서 제시하듯이, 호흡이 긴 깊이 있는 아카데미즘에서 나온다. 하지만, 1990년대 후반의 현시점에서 이런 것은 이미 존재하지 않는다. 1990년대에는 사회과학적 상상력에서 촉발된 아규먼트는 사라지고 적당히 표절하고 짜깁기한 상업주의적이고 과시적인 교과서들만이 난무한다고 보면 지나칠까? 이 문제는 후일에 또 누군가가 정확히 평가하겠지만, 지금 당장은 이와 같은 인상적 판단을 지울 수 없다.

저널리스트들에게 아카데미즘의 부담까지 떠맡길 수는 없다. 하지만, 독재정권이 사라진 자리에 진짜 아카데미즘을 담당해야 할 상아탑은 변함이 없다. 그들은 1970년대에도 1980년대에도 죽은 언어들만을 되뇌며, 침묵을 지켰다. 이제 그들의 역할이 강력히 요청되는 1990년대에도 여전히 그들의 자랑스러운 미덕은 침묵이다. 물론 가뭄에 콩 나듯 독창적 저술들이 나타나기는 하지만 결코 학문공동체 내의 체계적 아규먼트로 연결되지는 않는다. 폭력적 권위주의 정권(주 3)이 해체되자 우습게도 그 안에 온존하던 학문공동체의 비효율성, 비합리성, 폐쇄성, 무능력이 백일하에 드러나는 형국이다. 좋은 세상(?)이 왔는데도 왜들 가만히 있을까? 1970~1980년대의 해직자 집단을 내몰았던 강력한 사회적 압력이 지금은 사라졌기 때문일까? 돈이 안 되기 때문일까? 그렇다면, 사회과학출판은 이제 존재할 필요가 없는 것인가? 1990년대의 고민은 바로 여기에 있다.

저자는 결론 부분에서 갑자기 ‘전문성’을 확보하자는 요청을 한다. 애정 어린 묘사로 일관되던 글이 끝부분에서 갑자기 전문성이 부족하다는 비판으로 돌아선 것은 하나의 충격이다. 지금까지의 애정 어린 찬사가 사실은 비판과 질책의 비수를 숨기고 있었다는 역설이다. 중요한 것은 저자가 요청하는 전문성이란 것이 과연 정확히 무엇인지 명확하지는 않지만―특정 분야에 대한 전문성인가? 특정 기능의 전문성인가? 또 그 전문성의 정도는 어느 정도여야 전문성을 갖췄다고 할 수 있는가?―어떤 의미이든지 간에 우리의 출판계에 전문성이 희박하다는 것이 사실이다. 이 글에서 다룬 ‘대체언론적 사회과학출판사’들은 그래도 조금 나은 편이다. 대학교재출판사들 속에는 전문성은커녕 야합과 굴종의 판이다. 전문가는 존재하지 않고 싸구려 단순노동과 권위주의만 있다. 권위주의적 필자의 천박한 감각에 표지 디자인조차 끌려다니는 상황이다. 그래도 이들도 스스로를 사회과학 전문출판사라고 칭한다.

희망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한길사의 그레이트북스 시리즈와 나남의 사회비평신서 시리즈, 그리고 한울의 한울학술총서 시리즈는 1990년대에 외롭게 싸우면서 변신하는 ‘장이’의 단초를 보여준다. 하지만 결코 쉽지는 않을 것 같다. 그들이 돈이 없어서도 아니고 정치적 탄압을 받아서도 아니다. 진짜 사회과학의 지식시장이 형성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즉, 진짜 사회과학 저술가도 부족하고 수준 높은 독자층도 엷다. 학계도 정부도 이와 같은 질곡이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치부하는 듯하다. 사회과학출판인들은 이 정보화시대의 1990년대와 21세기에 또다시 19세기적 ‘지사정신’으로 외로운 싸움을 벌여야 하는가?

결론적으로 이 책은 몇 가지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많은 역사적 자료를 축적하고 독특한 관점을 제시했으며 ‘생각할 거리’를 촉발했다는 점에서 보기 드문 역작이라고 평가하고 싶다. 다시 말하면, 이 책은 한국 사회과학계의 주류를 이루는 미국식의 몰역사적이고 기능분업주의적 사회과학을 탈피하여 폭넓은 역사사회학적 방법으로 우리 사회를 조망했으며, 이런 점만으로도 이 책은 주목할 만하다. 이와 같은 방법의 한 가지 난점은 자료수집이 어렵다는 것과 폭넓은 관련 지식이 필요하다는 점인데, 이 책의 저자는 분주히 발로 뛰어 이런 난점을 극복했다는 냄새를 짙게 풍긴다. 한 아마추어 사회과학자의 작품이 한국적 역사사회학의 모범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한편으로는 기쁘고 또 한편으로는 서글프기도 하다.


(주 1) 나의 현실 경험에 따르면, 이 좌파상업주의라는 개념은 수긍하기 어렵다. 책임성 없는 극좌 이념서적의 양산이라는 현상이 있었던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지만, 그들의 출판행위를 조건 지은 주요인이 상업주의적 목적이었다고 볼 수는 없다. 그들에게는 상업주의와는 무관한 순수한 측면이 더 강했다는 것이 나의 체험적 느낌이다. 그들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해악을 굳이 꼬집자면, 특정 패러다임에 대한 종교적 독단성이다. 다시 말해, 그들을 비판적으로 규정하자면 ‘좌파교조주의’란 말이 더 어울리는 개념이라고 본다(더 심한 욕이기도 하다). 하지만 ‘좌파’라는 말도 자신이 없다. 그들이 진짜 좌파인가?

(주 2) 그들이 출판한 책들이 억압체제하의 ‘반체제 국민교과서’ 역할을 했음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들의 책을 읽은 인구는 극소수지만 그 극소수가 민주화를 주도했다. 하지만 이처럼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 그 자체로 남는다면 역사는 또다시 신비화될 것이다. 이 사실에 대한 보다 정확한 분석은 후학의 과제로 남는다.

(주 3) 나는 1970~1980년대의 권위주의 정권에 ‘폭력적’이라는 형용사를 하나 덧붙이고 싶다. 왜냐하면 그들의 일차적 지배수단이 폭력이었기 때문이다. 1990년대의 형식적으로 민주화된 체제하의 정권도 역시 내용상으로는 권위주의적이다. 단지, 이제는 그들의 일차적 지배수단이 폭력이 아닐 뿐이다. 폭력을 일차적 지배수단으로 사용하지 않는 권위주의 정권은 더욱 기만적이고 교묘한 수단에 호소하기가 쉽다. 또한 폭력적 권위주의 정권이 외생적으로 주어졌다면, 기만적 권위주의 정권이야말로 사회구조로부터, 지배세력으로부터 도출되는 도구적 성격을 띠기가 점점 더 쉬워지며, 그 분석과제는 전 시대의 그것보다 훨씬 더 복잡해진다. 즉, 권위주의 정권하의 지배-피지배의 문제는 이제야말로 진짜 아카데미즘의 영역이 되었다.

 

글 | 윤백규 일신사 대표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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