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신이 되신 김준엽 총장님
작성일 : 2017-09-14   조회수 : 223

역사의 신이 되신 김준엽 총장님



9월 17일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한국광복군(光復軍) 사령부가 창설된 날이다. 1940년 중국 중경(重慶)에서 김구(金九) 주석이 조국광복을 위한 무력투쟁의 고고한 횃불을 밝힌 그날이다. 1919년 임시정부 수립 후 20여 년 만의 일이다. 2차 대전이 극한 상황으로 치닫던 때이다. 〈백범일지〉에는 이날의 감동을 이렇게 기록했다(나남, pp. 388~389).



내가 중경에 도착한 이후 중국 당국에 교섭한 결과 교통수단이 곤란한 때에 차량 5~6대를 무료로 얻어내 대가족과 많은 짐들을 수천 리 험로에 운송하였다. 또한 진제(賑濟)위원회에 교섭하여 토교(土橋) 동감(東坎) 폭포 위쪽의 구역을 사들인 다음 기와집 3채를 세웠고, 길가의 2층 기와집 한 채를 사들여 백여 식구가 둥지를 틀게 했다. 그 밖에 우리 독립운동에 대한 원조를 청함에 냉담한 태도가 보이므로 중앙당부와 새로운 교섭에 들어갔다. 


 “중국이 대일항전으로 이렇게 곤란한 때에 도리어 원조를 구하는 것이 심히 미안한 노릇이오. 마침 미국에 만여 명의 한인교포들이 있어 나를 오라고 합니다. 미국은 부국이고 장차 미일·간 개전(開戰)을 준비중이라 대미 외교도 개시하고 싶고 여비도 문제가 없으니 여권 수속만 청구하오.” 


나의 말에 당국자가 이렇게 대답했다. 


“선생이 중국에 있느니만큼 중국과 어느 정도 관계를 맺고 해외로 나가는 것이 좋지 않겠소?”


“나 역시 그런 생각으로 몇 년간 중국의 수도(首都)를 따라왔으나 중국이 5~6개의 대도시를 상실한 나머지 홀로 싸우는 것만도 극도로 곤란한 것을 본 이상에는 한국 독립을 원조해 달라고 요구하기가 극히 미안한 까닭이오.”


당국자는 책임지고 나의 계획서를 상부에 올릴 테니 1부를 작성하여 보내라고 했다. 이에 계획서를 작성해서 광복군(光復軍), 즉 한국국군(韓國國軍)의 조직을 허가하는 것이 3천만 한민족을 총동원할 수 있는 요체임을 설명하여 장개석 장군에게 보냈다. 즉시 회신이 왔다. 김구의 광복군 계획을 기꺼이 허락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임시정부에서 이청천(李靑天)을 광복군 총사령관으로 임명하고, 미국 하와이 동포들로부터 원조받은 3~4만 원 등 가진 역량을 다하여 중국과 서양 인사들을 초청하며 우리 한인을 총동원하여 중경 가릉빈관(嘉陵賓館)에서 광복군 성립 전례식(典禮式)을 거행하였다.


이어서 30여 명의 간부를 선발해서 서안(西安)으로 보내 연전에 서안에 먼저 보냈던 조성환 일행과 합류하여 한국광복군사령부를 설치하도록 했다.


… 미주한인 동포들이 보내온 금액 중 비상금으로 저축한 돈으로 중경의 외교사절을 초대하여 광복군 성립식을 중경에서 가장 큰 가릉빈관에서 화려하고 성대히 거행한다. 중국군 장성들, 체코·터키·프랑스 대사들도 참석하여 중국에서 열린 외국인 연회로서는 굴지의 대성황을 이루었다. 당시 연합국의 신문기자들도 광복군 창설소식을 각국에 널리 보도했다(위의 책, p. 403).


암울한 식민지 시대에 피 끓는 젊은이들에게 임시정부는 조국광복의 희망을 밝히는 북극성(北極星)이었다. 그 중심에 청년 김준엽(金俊燁)이 있다. 일본 게이오대학 유학생이던 그는 학병(學兵)으로 중국 땅에 내몰린다. 고향인 압록강가에서 독립군의 거친 말발굽 소리의 신화와 함께 성장했는데, 아무리 세상이 하수상하더라도 제국주의 일본 병정으로 살 수는 없는 일이다. 학병 탈출 제1호로 중경의 임시정부를 찾아 중국대륙 절반을 관통하는 6천 리 장정(長征) 길에 나선다. 장준하 동지와 돌베개를 같이 베며 후손에게 부끄러운 조상이 되지 말자고 수없이 다짐한다. 생사를 넘나드는 천신만고의 장정 끝에 김구 주석의 품에 안긴 것은 정의와 진리와 선(善)은 반드시 승리한다는 ‘역사의 신(神)’에 대한 굳은 신념 때문이었다. 


조국이 광복되자 광복군은 개선장군처럼 보무(步武)당당하게 태극기가 물결치는 국민의 환호 속에 그렇게 그리던 서울에 입성해도 좋았다. 식민지 시절 유일한 희망의 등대였던 임시정부가 승리한 연합국의 일원으로 고국을 해방시키려 돌아온 것이 아닌가. 프랑스 드골 장군의 파리 입성처럼 그랬어야 했다. OSS특수훈련까지 마친 광복군의 국내(國內) 정진대(挺進隊)의 투입 바로 전에 항복한 일본이나, 국토분단으로 치닫게 한 강대국의 정치놀음이 그렇게 원망스러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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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군 국내정진(挺進)대원 노능서, 김준엽, 장준하(1945. 8. 20)


우리 광복군은 풍찬노숙(風餐露宿)의 투쟁에 대한 무슨 보상을 바라기보다는 다시는 이민족(異民族)에게 나라를 빼앗기지 않을 부국강병의 새나라 건설에 매진해야 할 자랑스러운 원동력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청년 김준엽은 입신양명의 화려한 유혹보다는 독립운동사를 연구하는 학자의 길을 간다. 일생일대의 고독한 선택이었다. 마지막 임시정부의 광복군으로 복무하면서 터득한 조국광복에 헌신한 선열들의 기록을 청사(靑史)에 남겨야 역사의 수레바퀴가 올곧게 전진할 수 있다는 신념을 확고히 한다. 얄팍한 권력의 부나비들이 쉽게 범접할 수 없는 외롭고 고고한 성채(城砦)를 평생 지켜냈다. 광복군으로서 임시정부청사 복원, 광복지사 유해송환이 그것이고, 독립운동 사학자로서 줄기찬 독립군 무장투쟁 연구, 고려대 교수와 총장으로써 아세아연구소 설립과 국제학술활동, 수천수만의 의연한 기상의 젊은 호랑이 양육,    사회과학원장으로써 〈계간사상〉 발행과 중국과의 문화교류를 위한 중국명문대학에 ‘한국학연구소’ 설립 등이 그것이다. 이를 모두는 김준엽 선생이 아니고서는 아무도 이룰 수 없는 아는 이만 아는 마음에 아로 새겨진 자유와 정의의 광장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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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 총장 취임식


임시정부 독립운동가들이 누구인가. 조국에 남았던 가족들은 일제 점령군과 일신의 영화를 위해 아부하는 친일파들에게 얼마나 시달렸던가. 광복된 조국이 그분들에게 대접한 것은 무엇인지? 압축성장 잔치와 권력욕과 사욕을 채우려 하이에나처럼 이전투구하던 그들은 광복(光復)의 열사(烈士)들을 애써 잊은 채 그렇게 살았다. 


이제 문재인 정부에서 광복군의 역사를 국군(國軍)의 역사에 기록하게 하고, 국가보훈처에서는 독립유공자 후손들 3대까지 지원한다고 한다. 6·25 전쟁이 한창이던 그때 38선을 넘어 북진하던 1950년 10월 1일을 기려서 정한 ‘국군의 날’기념일을 광복군 사령부가 설립된 1940년 9월 17일로 변경하자는 입법안이 국회에 제출되었다. 늦었지만 헌법전문에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고 분명하게 밝힌 데 진력하신 김준엽 선생님이 하늘에서 흐뭇한 미소를 띠우실 것 같다. 


엊그제 김준엽 선생님이 고려대 총장시절의 학생들이었던 50대 중반의 제자들이 총장님 탄생 백주년 기념사업을 준비하는 모임을 가졌다. “현실에 살지 말고 역사에 살아라”라는 유훈(遺訓)이 그들의 평생 좌우명이 된 것 같았다. 고대 인촌기념관에서 열린 ‘김준엽 총장님 추모의 밤’에서 《김준엽 현대사―장정(長征)》 5권을 다시 읽었다. 전두환 군사권력이 강요한 총장사퇴 반대데모만으로도 총장님을 지키지 못해 미안했다고 했지만, 이제 이 사회의 지도자가 된 그들의 참스승에 대한 존경심이 믿음직스럽고 무척 고마웠다. 거인(巨人)의 한 자락이라도 올바르게 이해했는지는 모르지만 나는 출판장이가 되지 않았으면 30년 동안 어른을 직접 모실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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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들의 총장사퇴 반대 데모


한 시대의 서러움과 환희를 안고 깊은 잠에 드신 지 벌써 7년이 지났다. 우리 선생님은 광복된 조국이 통일되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워 한국혼(韓國魂)의 거대한 학(鶴)이 되어 지금도 고향인 압록강변 강계 위를 날고 계실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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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례식 고대병원에서. 영정을 든 장손 김현국, 맨뒤 장남 김홍규, 오른쪽이 필자


 

 

이 글의 일부는 2017년 9월 15일 〈한국일보〉의 '삶과 문화' 칼럼에 기고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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