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로운 기업은 실패하지 않는다
〈미래산업〉 창업자 정문술의 낭만경영론
2016년 3월 11일, ‘인류 대표’ 이세돌 9단과 바둑 승부를 겨룬 알파고의 개발회사인 구글 딥마인드의 데미스 하사비스 대표는 KAIST의 젊은 과학도를 대상으로 강연하기 위해 대전 KAIST를 방문했다. ‘인공지능과 미래’라는 주제의 강연은 ‘정문술 빌딩’에서 열렸다. 인공지능과 관련된 바이오테크 분야를 연구하는 ‘바이오및뇌공학과’가 위치한 연구동이다. 바로 이 정문술 빌딩과 바이오및뇌공학과는 〈미래산업〉 정문술 회장이 2001년 뇌과학을 연구해 달라며 KAIST에 내놓은 기부금으로 조성되었다. 미래를 꿰뚫어 보는 정문술 회장의 통찰력이 돋보인 한 장면이다.
정문술 회장은 1983년 반도체 제조장비업체 〈미래산업〉을 창업하였다. 18년간의 중앙정보부 생활을 마치고 사회로 나와 엉겁결에 인수한 금형업체에서 한 차례의 실패를 경험한 후였다. 이 실패를 통해 기술 개발의 중요성을 뼈저리게 인식한 그는 무엇보다도 독자적인 기술 개발에 사운을 걸었다. 늘어만 가는 기술개발비 때문에 빚더미에 올라 자살의 문턱까지 간 끝에 정문술 회장과 〈미래산업〉은 1989년 반도체 검사장비인 테스트 핸들러의 국산화에 성공하였으며, 1999년에는 선진국들이 독점했던 전자제품 제조 기초장비인 SMD마운터의 개발에 성공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미래산업〉은 1996년에는 증권거래소, 2000년에는 국내 최초로 미국 나스닥에 상장했다.
정문술 회장은 연구개발자들에게 전권을 주고 자신은 그들이 마음 놓고 일하도록 뒷받침하는 데 진력했다. 사원이 사장의 믿음을 바탕으로 신바람이 나서 일하면 성과는 저절로 따라온다는 것이 그의 ‘낭만경영’론이었다. 엔지니어는 아니지만 어릴 때부터 뭘 만드는 데 재주를 보인 그는 물론 걸림돌이 생길 때마다 스스로도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냈다. 그는 또한 ‘좋은 게 좋다는 식’의 혈연, 지연 봐주기 방식의 경영관행을 거부하고 고집스럽게 정도(正道)를 추구했다. 정치권력의 외압이나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았다.
정문술 회장은 한국의 대표적 기업인 순위에서 2위로 선정되기도 했다. 〈월간조선〉 1999년 10월호에 보도된 “경제전문가 109인이 뽑은 한국의 50대 기업인”에서 1위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자에 이어 2위로 뽑힌 것이다. 3위는 손길승 SK 회장, 4위는 이민화 메디슨 회장, 5위는 구본무 LG 회장이었다. 이건희 삼성 회장은 9위였다. 당시 벤처 열풍이 얼마나 대단했는지는 2위, 4위가 벤처기업인인 점만으로도 짐작할 수 있다.
〈미래산업〉이 성공의 정점에 오른 2001년 1월, 정문술 사장은 돌연 은퇴를 선언, “착한 기업을 만들어 달라”는 한마디를 남기고 모든 경영권을 직원들에게 물려주었다. 능력 있는 직원이라면 누구나 〈미래산업〉의 최고경영자가 될 수 있다는 그의 평소 발언대로였다. 2세가 경영권을 물려받는 것이 당연시되는 국내 기업으로서는 극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리고는 300억 원의 재산을 KAIST에 기부하였다. 조건은 오로지 생명과학과 정보기술을 융합하여 학제 간 연구를 할 수 있는 첨단학과를 신설해 달라는 것이었다. KAIST에서는 이 자금으로 ‘바이오시스템학과’(현 바이오및뇌공학과)를 신설하고 바이오테크 연구동인 ‘정문술 빌딩’을 신축하였다. 또한, 2014년 정문술 사장은 215억 원을 추가로 기부하였다. KAIST는 이 기부금과 2001년에 기부한 금액 중 남은 140억 원을 합쳐 제2정문술 빌딩을 세우고 바이오및뇌공학과에 ‘뇌 인지과학’ 프로그램(대학원)을 신설하였다.
“기업에 필요한 인재와 자본, 기업행위에 필요한 모든 인프라는 사회가 길러 주고 조달해 주는 것”이므로 “어떤 식으로든 사회에 보답을 해야” 한다는 것이 정문술 회장의 기부에 대한 생각이다. 또한, 생명과학과 기술을 융합한 학제 간 연구를 지원하고자 한 그의 혜안은 인공지능이 화두로 떠오른 오늘날 새삼 그 가치를 재확인하게 된다.
“사원들이 노력하여 번 돈이 허튼 데 쓰이지 않고 고스란히 회사와 나의 미래를 위해 투자되고 있다는 믿음. 사장 한 사람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종업원들이 함께 지혜를 짜내고 함께 걱정하며, 능력만 있다면 얼마든지 누구라도 최고경영자가 될 수 있다는 믿음. … 이 믿음들이 고스란히 기업문화로 정착되어 전 직원의 신바람으로 승화되는 것.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우리 식 경영’이다.” ―본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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