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적 진리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민속방법론과 새로운 과학사회학
현대사회에서 과학은 진리, 또는 사실이라는 이름으로 거의 모든 활동과 판단, 심지어 학문에도 토대로 작용한다. 달리 말해, 현대사회는 과학의 토대 위에 세워져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다면 과연 과학은 사회학의 연구대상이 될 수 있을까? 과학을 내용(지식)과 제도(조직)로 나눠 볼 때, 과학의 제도는 그 속성이 사회적이니만큼 사회학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지만, 과학의 내용은 비사회적인 진리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니만큼 사회학보다는 철학의 대상이라는 것이 기존의 지배적 인식이었다.
이런 지적 환경 속에서, 과학과 사회학에 대한 기존의 통념을 전복시키려는 과감한 시도가 있었다. 그 출발점에는 영국 에든버러대학교 과학학과의 데이비드 블루어(David Bloor)가 있었다. 그는 자신의 프로그램이 지닌 급진성을 강조하고자 ‘스트롱 프로그램’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 프로그램은 만하임의 지식사회학의 문제의식을 과학지식에까지 과감하게 연장했을 뿐만 아니라 과학제도만을 연구대상으로 삼았던 머튼의 과학사회학을 비판하면서 사회학이 진정으로 다뤄야 할 것은 과학의 제도가 아니라 내용임을 강조했다. 한마디로, 과학의 인식론적 특권을 해체하고 사회학의 연구대상으로 삼을 수 있음을 천명한 것이다.
이런 급진적 주장은 당연히 사회적 반감을 불러일으켰다. 우리가 과학적 사실을 우리의 사고와 행위, 판단의 근거로 삼을 수 있는 이유는 그것이 객관적이고, 보편적이고, 합리적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과학의 신뢰는 종교적 신봉과 구분될 수 없을 것이다. 과학지식사회학은 과학의 인식론을 상대화함으로써 과학을 사회학의 분석 대상으로 삼았고, 그 결과 과학이 사회적으로 구성된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이런 과학지식사회학의 주장이 진지하다는 것을 보이려면 그 토대의 견고성을 전제해야 한다. 하지만 성찰성은 과학지식사회학의 주장도 사회적으로 구성된 것이라는 고약한 회의주의를 낳는다. 이제 과학지식사회학은 실재론과 회의주의의 딜레마에 빠진다. 회의주의를 피하기 위해서는 실재론으로 회귀해야 할 것 같고, 실재론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회의주의에 빠질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이 책의 저자인 린치는 이를 반(反)토대주의가 가질 수밖에 없는 숙명과 같은 것으로 본다. 이 책의 문제의식은 바로 이 지점에서 출발하며, 숙명의 족쇄를 깨뜨릴 수 있는 가능성을 민속방법론, 특히 민속방법론적 업무 연구에서 찾을 수 있다고 본다.
민속방법론 주장의 핵심은 모든 사회적 실천과 행위가 위치 지워져(situated) 있다는 것이다. 이는 우리가 보편성과 필연성이 아니라 맥락성과 우연성에 주목할 필요가 있음을 말해 준다. 즉 전문과학의 방법에서 우리가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은 그 방법의 초월성이나 우월성이 아니라 그 방법이 사회과학자들이라는 전문가 집단 사이에서 통용되는 ‘국지적으로 해명 가능한’ 것에 불과하다는 제한성이다. 비트겐슈타인의 언어게임은 이와 관련하여 중요한 함의를 던져 준다. 게임들마다 특정한 규칙이 있지만 그 모두를 관통하는 게임의 보편적 규칙을 상정할 필요는 없다. 게임을 처음 접하는 사람들은 규칙을 배울 필요가 있지만, 게임이 규칙 따르기 시합은 아니다. 게임을 할 줄 안다는 것은 단순히 규칙을 알고 있다는 것과 같지 않다. 마찬가지로, 문법을 아는 것과 언어의 능숙한 사용이 반드시 같지는 않다. 우리가 아무 불편 없이 말을 할 수 있는 것은 언어 사용자들이 이미 그 말에 익숙하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언어도 일종의 게임과 같은 것으로 볼 수 있다.
민속방법론적 업무 연구는 과학지식사회학에게 실재론과 회의주의라는 수렁을 빠져나갈 수 있는 통로를 제공해 준다. 그 핵심은 질문을 달리하는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의 언어게임이 그것을 잘 보여 준다. 언어게임이 묻는 것은 그 게임의 토대―즉, 보편성이나 규칙, 문법 등―가 존재하느냐 그렇지 않느냐가 아니라, 그런 토대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언어게임이 아무런 문제 없이 수행될 수 있는 이유다. 언어 사용자들은 철학자들처럼 문법적 토대의 확고한 입증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언어의 적실한 활용에 관심을 기울인다. 문법적 토대에만 기초하고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언어 사용자들이 언어를 적실하게 사용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민속방법론적 업무 연구는 이런 문제의식을 받아들여 특정 업무의 인식론적 토대가 아니라 구성원들이 해당 업무를 적실하게 수행할 수 있는 이유를 묻고 있다. 이 ‘잃어버린 무엇’(missing what)을 찾는 일이야말로 사회과학이 그동안 방기했던 중요한 임무다.
저자는 우리가 사는 세계와 이를 분석하는 것이 의미하는 바가 어떠한가를 보여 주기 위해서 교통의 선형적 사회를 예로 든다. 만약 내가 운전 중인 운전자라면 나는 교통 환경을 어떻게 파악하고 이해할 것인가? 내 시선이 닿고, 내 감각이 허락하는 선을 벗어날 수는 없을 것이다. 즉, 우리의 실천이란 초월적일 수 없고, 주어진 환경에 위치 지워진 것이다. 이런 환경 속에 있는 운전자가 교통상황 전체를 파악한다는 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이 문제는 일상적 실천과 전문적 실천의 관계를 생각해 보게 한다. 과연 전문과학의 방법은 어떤 근거로 세속과학의 방법보다 보편적으로 객관적이라고 할 수 있는가?
결국,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일상생활에서 벌어지는 실천행위를 서술하는 것이다. 이런 학문적 실천이 사회적으로 어떤 실천적 의미를 갖는지는 여전히 미지수이지만, 인식론적으로 실재론과 회의주의(상대주의)의 딜레마를 극복할 수 있는 방안으로서는 중요한 함의를 갖는다. 이 책의 저자가 인식론의 근본적 딜레마를 해결할 수 있는 완벽한 해답을 제시했다고 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문제점을 명확히 함으로써 그 해결책을 위한 중요한 일보를 내디뎠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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