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병대 훈련병 아들에게

윤승모 지음

판매가(적립금) 12,000 (600원)
분류 나남신서 94300
판형 신국변형
면수 204
발행일 2011-09-10
ISBN 9788930085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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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도서 금액     12,000
 

◉ 머리말


큰 아들 윤기열을 군대에 보내 놓고, 친구들을 만나기만 하면 어김없이 아들 군생활 얘기를 하게 된다. 몇몇 친구가 “너 언제부터 아들을 그렇게 사랑했냐”고 묻는다. 내가 20여 년간 매일 7시에 출근해 밤 12시 넘어 퇴근하는, 바쁜 기자생활을 했다는 사실을 아는 친구들이다.

일에 바쁜 아버지라고 해서 아들과 대화하지 말란 법은 없다. 그러나 나는 아들과 제대로 대화한 일이 거의 없다. 우리 사회에서 부자(父子)의 대화 단절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많지만 바로 내가 그 경우에 해당한다.

어쩌다 밥상머리에서 “기열이도 좀 노력을 해야 하지 않겠니”라고 말하면 아들은 인상을 찌푸리며 아무 말 없이 제 방으로 휙 들어가 버린다. 성적이 너무 떨어지지 않았느냐 호통 치면 마지못해 한 시간 정도 공부하는 시늉을 한다. 우리 집에서 이따금 벌어지는 풍경이다. 그나마 그게 고작이다.

남들은 주 5일 근무라고 하지만 기자라는 직업은 1주일에 하루밖에 휴일이 없었다. 그 휴일에는 낮잠 자는 게 일과라서, 가족과 함께 어디 놀러 다니지도 못했다.

‘빵점 아빠’라는 말을 들어도 싸다. 그렇다고 자식을 위해 사교육을 엄청 시켜준 것도 아니다. 아이 엄마가 “과외라도 시켜야 하지 않느냐”고 하면, “과외해서 나아지는 아이가 있고 하나마나인 아이가 있는데, 우리 아들은 하나마나다. 자기가 알아서 하든 말든 그냥 내버려 둬라”고 일축하곤 했다.

놀다가 대학을 못 가도 자기 선택이니, 스스로 책임지도록 하면 된다는, 어줍지 않은 교육철학을 들먹이며 아들에 대한 무관심을 스스로 변명하기도 했다.

그 아버지의 아들도 어지간했다. 학교는 개근상을 받을 정도로 열심히 왔다갔다 했다. 달리 말썽을 피우는 일은 없었지만 공부에는 별 취미가 없다. 뚜렷한 미래의 목표도 없는 것 같고, 도대체 동기부여가 되지 않는다. 유일한 취미는 컴퓨터 게임이다. 고3 수험생 방에서 매일 밤 컴퓨터게임 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대학? 거리가 멀다.

나는 우리 아들이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군 입대로 밀었다. 군대 가서 고생 좀 하는 것이 빨리 철들게 하는 지름길이라는 생각이었다.


“기왕이면 확실히 고생하게 해병대로 가라.”


그러나 막상 아들의 군 입대 모습을 지켜보니 안쓰럽기 그지없다. 어린 나이에 낯선 환경에서 고생할 아들에 대한 연민이 가슴 밑바닥에서 솟아오른다. 전에 없던 일이다. 그러나 이제 아들은 내 곁에 없다. 아들과 소통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은 편지뿐이다.

부모와 떨어져서 처음으로 겪는 군대, 얼마나 불안하고 외로울까. 아픈 것조차 마음대로 해서는 안 되는 군대 규율에 적응할 수 있을까. 고된 훈련은 무사히 받아낼 수 있을까.

이런 상념이 들 때마다 아들에게 편지를 썼다. 훈련병 아들도 아버지의 편지를 열심히 읽었다고 한다. 훈련병 생활실의 희미한 조명 아래 불침번 근무를 서면서 읽고 또 읽고, 읽을 때마다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그 아들이 집으로 보낸 편지에는 어린 훈련병이 겪었던 정신적 육체적 고통의 흔적이 역력하다. 집에 있는 어머니 아버지는 그 편지에 눈시울이 붉어진다. 아들이란, 어쩔 수 없는 나의 피붙이란 사실이 몸으로 느껴진다.

‘윤기열 훈련병’의 해병대 교육훈련단 7주.

그동안 부모와 자식은 그렇게 편지를 주고받으며 가족의 사랑을 깨달았다. 그 7주는 부자간에 처음으로 마음을 열고 대화할 수 있게 해준 소중한 시간이었다.


2010년 7월

윤승모

 

◉ 목 차


머리말


해병대 가면 어떨까?


현빈과 오종혁


단절의 실감


‘빽으로 초코파이 하나 얻어먹었으면’


입실과 열외


“진통제 먹고 행군하겠습니다”


“이만하면 면목이 서겠지요?”


훈련병 손등에 박인 굳은살


‘군대 적응 완료했습니다’


후기

 

◉ 지은이 소개 :  윤승모


경기도 시흥군 서면 노온사리 801번지 고향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어머니는 자수성가한 분이다. 두 분은 90이 다 돼가는 지금도 알뜰하고 억척같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덕분에 우리집은 나 어렸을 때도 못 산다는 소리를 듣지는 않았다. 아버지는 자유당 정권 당시 선출직 면의원도 했고, 작은 단위 농협의 조합장도 지냈다.


우리 동네는 서울에서 그리 멀지 않지만 깡촌이었다. 내가 중학교 2학년 때 전기가 들어왔을 정도다. 그렇다보니 우리 동네에선 초등학교를 나오면 중고등학교는 서울이나 인천 안양 등 외지로 나가는 경우가 많았다. 나도 동네 온신초등학교 6학년 때 도회지로 가고 싶다고 부모에게 떼를 써서 서울로 옮겼고  관악구 신림동에 있는 남강 중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지금 군대에 가 있는 나의 큰아들 윤기열도 조부모와 함께 고향집에서 살면서 온신초등학교 1학년까지의 어린 시절을 보냈다. 우리 동네 행정구역은 시흥군 서면 노온사리에서 광명시 노온사동으로 바뀌었지만, 그린벨트이기 때문에 여전히 시골이다. 둘째 아들 윤소열이 태어나 커가면서 아내는 아이들을 이끌고 ‘좋은 교육환경’을 찾아 서울로 전세를 얻어 나갔다. 그러나 우리 아이들에게 교육 이사는 별 효과가 없었던 듯하다. 큰 아들 윤기열은 2011년2월, 서울 양정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대학에 가지 않고 곧바로 군대를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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