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할아버지 육당 최남선

최학주 지음

판매가(적립금) 18,000 (900원)
분류 나남신서 04990
판형 신국판
면수 336
발행일 2011-03-01
ISBN 978-89-300-854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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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도서 금액     18,000
육당 장손이 쓴 ‘최남선 친일론’ 정면반박
“친일은 오해, 조선의 세계화가 할아버지의 꿈”…최남선 직계가족의 최초 본격 증언
육당 최남선의 장손 최학주(在美)씨가 그간의 침묵을 깨고 우리 사회에 기정사실로 굳은 조부의 친일론을 정면 반박하는 책《나의 할아버지 육당 최남선》(부제: 조선의 터를 닦고 길을 내다)을 출간했다. 독립선언서를 기초한 육당의 집안에서 나온 최초의 본격 증언록이 3․1절 92주년을 앞두고 나왔다는 점에서 비상한 관심을 모으고 있다.
먼저 저자가 이 책에서 강조하는 점은 육당의 행적이 조선의 세계화, 조선역사의 세계화 작업이라는 것이다. 조선사 편찬위원과 중추원 참의를 역임하는 등 육당의 친일행적으로 인식되는 부분에서 그는 근대 세계주의를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불거진 세간의 오해라고 주장한다.
저자는 “육당의 친일을 시비하는 시기는 대략 1930년대부터 광복까지로, 할아버지가 일제에 부역하는 자리에 있었다는 것”이라며 “하지만 할아버지의 조선사편수회 참가 이유는 ‘조선인이 인지하는 조선사 편찬’이었고, 총독부에 의해 이미 반(半)일본화한 조선사를 깨뜨리고자 ‘세계사의 일부로서의 조선사’를 정립한 것”이라고 밝힌다.
즉, 육당은 20세기 초 근대화가 어느 나라든 예정된 역사의 흐름이었다면 그 방향은 세계화라는 피할 수 없는 추세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당시 지배세력인 대원군이나 민씨들의 이해관계로부터 완전 자유로웠던 육당이었기에 조선의 근대화와 세계화를 동시에 진행시킬 수 있었다. 1910년대 잡지〈소년〉에 기고한 글들이 그 단적인 예다.
저자는 “할아버지는 부단히 ‘조선적’인 것의 정립을 시도하면서 ‘세계적’인 것을 소개하는데, 그 이유는 대중들이 세계적 안목을 갖추고 있어야만 ‘조선적’인 것을 인지하고, ‘조선적’인 것을 공유하는 ‘민족’의 정의가 가능해지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세계적 안목에 대한 구체적인 예는 조선의 독립 부분이다. 육당은 ‘조선의 독립은 세계사의 전개 추세에 따라 가능해진다’고 보았다. 최남선은〈내가 쓴 독립선언서〉에서 “나는 조선인의 독립운동은 조선인 독자의 이기적 동기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동양 전체에 평화 내지 세계 역사의 추세에 비추어서 불가결한 것이요, 타당성의 것임을 주장하려 했다”고 밝힌 바 있다.
당시의 다양한 독립운동 노선 가운데 무력에 의해서만 독립을 쟁취할 수 있다고 보는 노선이 있었다. 그러나 저자는 “할아버지는 무력 투쟁에 의한 조선 독립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보았고, 실제로 그러했다”며 “열강들이 세계 곳곳에 식민지를 만들고 있던 그 시대에 도대체 어느 민족이 자체의 무력만으로 독립을 쟁취했단 말인가?” 하고 반문한다.
육당이 보기에 근대화는 세계화의 문제였기에 ‘세계’와 ‘조선’이 어떤 방식으로 상호작용하는가가 중요했다. 따라서 그는 ‘제국주의의 붕괴와 식민지의 청산은 세계 질서의 재편에 의해서만 가능한 일’이라는 입장을 갖고 조선학 운동을 편다. 그 목표는 일본 제국주의라기보다 중세적 중화주의였다.
육당의 이러한 입장은 ‘친일’로 매도당한 이유가 됐다. 더욱이 외부에서 보기에 오불관언 ‘학자’로서 조선의 세계화 작업에 매진한 육당이었기에 어쩌면 그런 오해를 자초한 면도 없지 않았다. 육당이나 저자가 아쉬워하는 부분이다.
육당이 1949년 반민특위에 제출한〈자열서〉에서 “지조냐 학자냐 골라잡아야 할 때에 대중은 나에게 지조를 붙잡으라고 하거늘 나는 그 뜻을 휘뿌리고 학업을 붙잡으면서 다른 것을 버렸다. 나에 대한 대중의 분노가 여기서 시작하여 나오는 것을 내가 잘 알며 그것이 또한 나를 사랑함에서 나온 것임도 내가 잘 알 안다”고 말했다.
이 책에서 저자 역시 육당의 임종을 앞두고 나지막이 읊조린다. “다만 어린 소견으로도 내 할아버지 육당은 역사학이 아닌 정치를 했어야 했다고 생각했다. 시대가 당신에게 준 과제는 학문만으로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육당의 진정성은 외면당하지 않았다. 항일 독립투쟁의 선두에 섰던〈사상계〉발행인 장준하는 육당 별세 직후 특별호를 발행, 육당을 다음과 같이 평가한다.
“민족이 가장 암담한 절망의 골짜기에 처해 있을 때에도 선생은 우리의 가장 친근한 벗이요, 경애하는 스승이었다. 한때 선생의 지조에 대한 세간의 오해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선생의 본의가 어디까지나 이 민족의 운명과 이 나라 문화의 소장에 있었음은 오늘날 이미 사실로서 밝혀진 바요, 항간에 떠도는 요동부녀(妖童浮女)들의 억설과는 전면 그 궤를 달리하는 것이다. 사람을 사(赦)하는 법이 없고 인재를 자기 눈동자같이 아낄 줄 모르고 사물을 널리 생각하지 못하는 옳지 못한 풍조 때문에 우리는 해방된 후에도 선생에게 영광을 돌린 일이 없고 그 노고를 치하한 일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욕된 일이 적지 아니하였다. 이것은 실로 온 민족의 이름으로 부끄러워해야 할 일이다.”
이 책이 관심을 끄는 또 다른 이유는 처음 공개되는 내용과 사진이 많기 때문이다. 먼저 그간 육당에 대한 연구에서는 최남선 개인의 근대화운동만 주목했다. 하지만 이 책에서는 최남선 선대부터 개화운동에 참여해 근대화운동으로 이어지는 장면을 상세히 서술한다. 특히 대원군의 쇄국정책에 반대한 최정섭(육당의 조부)의 유지를 최헌규(육당의 부친)가 최남선에게 전하고, 이후 최헌규가 육당의 신문화운동을 적극 후원한 배경을 담고 있다. 최남선의 아버지 최헌규는 19세기 개화운동과 20세기 근대화운동을 연결한 징검다리였다. 또한 최남선 집안의 가계도는 이 책에서 처음으로 밝혀진다.
또 최남선의 집안과 교유 관계는 일제시기 지식인의 분포도를 보여주고 있다. 최남선은 카프문학의 선두 주자인 이익상과 사돈을 맺었고, 셋째 아들 최한검은 일제시기부터 사회주의 운동을 하다가 6․25전쟁 때 월북했다. 최남선의 셋째아들이 월북했다는 사실은 조금 알려져 있었으나, 이 책에서만큼 그 경위와 그의 삶에 대해 자세하게 언급된 적은 없다. 또 친일파의 거두로 평가되는 박석윤은 최남선의 매제다. 논쟁이 될 만한 부분이지만 저자는 박석윤의 독립운동을 적극적으로 평가했고, 그의 행적과 삶도 조국을 위한 것이었다고 보았다. 좌익 이익상과 친일파 박석윤은 앞뒷집에 살던 친구였다. 해방 후에는 ‘좌우익’이 모든 것을 가르는 분기점이 되지만, 적어도 일제시기 동안 조선의 지식인들은 이념에 의해 친분이 흩어지지는 않았다는 점을 보여준다. 친일, 좌익, 우익 그 모두가 용해돼 있는 최남선 집안은 그러한 일제시기 지식인의 교유 관계를 압축하고 있었다.
세 번째로 최남선이 좌우합작 노선인 신간회 운동의 구심점이라는 평가 부분이다. 그간 최남선은〈동아일보〉계열로 분류돼 자치론자로 알려졌다. 그러나 이 책에서는 최남선이〈동아일보〉계열과는 다른 입장을 취하고 있었고, 중국의 국공합작과 같은 취지로 좌우합작 노선의 신간회를 출범시켰다고 서술한다. 나아가 육당의〈시대일보〉창간 또한 좌우익의 분열을 막기 위한 노력으로 보았다. 이러한 일련의 해석과 논증은 모두 최초로 등장하는 것이다. 이 부분이 학계에서 인정받는다면 조선 근대사에서 차지하는 최남선의 운동사적 위치는 180도 달라지게 된다.
 
∙ 일러두기  24
∙ 들어가며  25

할아버지와 함께한 17년  31
제1부 가족사에 응축된 한국의 근현대
 
제1장  증조부와 개화운동
1. 해마다 설날이면  39
2. 증조부 최헌규의 자수성가  41
3. 불운의 선구자 최정욱  45
4. 할머니가 남긴 말씀  49
5. 할아버지의 자성록(自省錄)  52
6. 할아버지의 ‘자경’(自警)  57
 
제2장  이념의 교차로
1. 할아버지와 내 선친-오! 아버지 되기 어려움이여  59
2. 아들에게 들려준 조선사편수회 참여 경위  64
3. ‘문과(文科)는 하지 말라’  67
4. 신경향파 작가 외할아버지 이익상  72
5. 김성수와 구국사업을 함께한 종조부 최두선  78
6. 여운형의 건국동맹에 참여한 왕고모부 박석윤  84
 
제3장 우이동 시절과 6․25
1. 소원(素園)에서의 기억들  94
2. 반민특위와 자열서(自列書)  98
3. 셋째 삼촌은 월북하고… 102
4. 우이동에 나타난 인민군  110
5. 납북을 모면한 할아버지  114
6. 고모는 피살되고 어머니는 잡혀가고…  116
7. 잿더미 된 장서 17만 권  119
8. 환도와 선친 참척  124
9. 와병과 천주교 귀의  128
10. 할아버지 떠나시고 1년  130

제2부 근대의 터를 닦고 길을 내다
 
제1장  민족의 발견
1. 신문관-근대의 문을 열다  137
2. 조선광문회-조선학의 터를 닦다  147
3.〈독립선언서〉-민족을 창출하고 구현하다  155
제2장  조선 정체성의 정립
1.《동명》과《시대일보》-민족을 완성하다  165
2. 불함문화권 설정-단군이 조선의 근본이다  176
3. 계명구락부와 우리말사전
   -언어가 정립되어야 사고할 수 있다  183
4. 국토 예찬과 시조 운동-조선심(朝鮮心)을 일깨우다  187
5. 신간회-민족진영의 분열을 막다  197
 
제3장  조선 역사의 세계화
1. 조선사편수회 참여와 프랑스 유학 시도
   -조선사는 세계사다  205
2.〈송막연운록〉과 고대사 인식
   -민족사의 무대는 동북아시아다  213
3.《고사통》,《역사일감》,《조선상식》
   -조선의 불씨를 되살리다  219
4. 만주행과〈만몽문화〉, 그리고 학병 권유
   -‘군사학을 배워 두어라’  223
 
제4장  민국(民國) 정통성의 확립
1.《국민조선역사》-민국의 국사를 새로 쓰다  229
2.《조선역사사전》-50년 후를 내다보다  235
3.《한국해양사》-대륙 문화와 해양 문화가
                 한반도에서 합류한다  242
4.〈진실정신〉-분단 후의 세상을 성찰하다  246

제3부 육당학의 미래를 위하여
 
제1장  사후 기념사업
1. 친일 비판과 우이동 소원 기념비  253
2. 전기․전집 출판과 육당문고 설립  259
3. 근대 정신의 발상지 조선광문회 건물의 복원  265
 
제2장  육당학의 정립을 모색하며
1. 민족과 국가  269
2. 미래 지향의 ‘열린 민족주의’  273
3. 육당학과 학제 간 연구  278

∙ 나가며  281
∙ 참고문헌  285
 
부록
  자열서(自列書)  291
  육당 최남선 연보  298
  인물 생몰 참조표  309
  육당 최남선과 동시대 11인 연표  312
∙ 찾아보기  323
 
최학주
1941년 서울 출생
1960년 경기고등학교 졸업
1964년 서울대학교 공대 졸업
1966년 ROTC 예비역 편입, 한국기술개발공사 입사
1967년 미국 유학, Boston Tufts 대학원
1971년 American Cyanamid 제약공정관리부
1976년 Bristol-Myers 제약기술개발부
1981년 Block Drug(현 GlaxoSmithKline) 기술이사
2001년 Keytec, FDA Regulatory Consulting 설립
2005년 현직 은퇴. 조선광문회 건물복원추진회 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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