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 제
엔첸스베르거의 시집《타이타닉의 침몰》은 영화〈타이타닉〉과 마찬가지로 1912년 실제로 일어난 사건을 소재로 삼은 것이다. 역사적으로 실제 일어났던 사건이라는 소재의 독특성과 그 안에 담겨 있는 인간의 수많은“희망”과 “좌절” 순진하고도 무모한 “낙관주의”, “허영심” 그리고 인간이 갖는 모든 가치관들의 “덧없음”까지도 망라하는 메타포(은유)들이 다양하게 이미지화되어 표현되고 있다. 화자는가상의 타이타닉호, 과거의 쿠바, 현재 자신이 머물고 있는 독일 베를린의 서재 등 서로 다른 공간과 시간의 차원을 넘나들면서 묘사하고 있다. 이처럼 하나의 시집속에 여러 시대 수많은 인물들과 사건들, 수많은 장소들을 동시에 중첩시켜 등장시키는 고도의 수법은 시를 읽어가는 독자들에게 이 새로운 기법에 대한 흥미를 불러일으킨다.
출판사 서평
혁명적 유토피아에 대한 이별의 칸타타
시와 문학이 사회변혁의 매체가 되리라고 믿었던 사람들에게 혁명의 좌절은 어떻게 받아들여지는가? 좌절 이후에 시는 무엇을 해야 하며, 시인은 무엇을 써야 하는가? 이제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은 물음이다. 여기 그 질문에 대한 하나의 대답이라고 할 수 있는 시집이 있다. 전후 독일 최고의 시인으로 불리는 엔첸스베르거의《타이타닉의 침몰》(1978)이 그것이다.
1912년 4월 15일 새벽에 일어난 호화 유람선 타이타닉의 침몰은 20세기 내내 온갖 상상력을 자극하면서 다양한 방식으로 몰락의 메타포로 사용되었다. 엔첸스베르거도 이 대열에 합류하여, 이 비극적 사건을 소재로 68혁명과 쿠바혁명의 좌절을, 나아가 문명의 침몰을 묘사하면서 혁명적 유토피아와 오만한 근대 과학기술 문명 일반에 대한 이별의 칸타타를 쓴다.
전후 독일 문단에 혜성같이 등장하여 독일의 정치·사회상을 좌파 멜랑콜리적 색조로 비판하다가 68운동의 중심으로 뛰어들었던 시인은 사민당과 자민당의 연립내각 등장 및 동방정책 실시에 따라 동력을 상실하게 된 68운동에 좌절한 후에, 새로운 혁명의 꿈은 제3세계에서 가능하리라는 기대 속에 쿠바로 향한다. 그러나 혁명 10년째의 쿠바에서 혁명은 이미 제도화되어 버렸으며, 혁명의 이념 또한 공허해진 지 오래였다. 그때의 체험을 시인은 세 번째 노래 ‘그 당시 아바나에서는’에서 이렇게 묘사한다.
“그 당시 아바나에서는 가옥들의 회칠이 떨어져 나가고, 항구에는 변함없이 썩은 냄새가 고여 있었다. 낡은 것은 화려하게 시들어 가고, 궁핍은 밤낮으로 십 년 계획을 갉아먹고 있었다.” (본문 26쪽)
시인은 혁명의 섬이 떠있는 카리브 해를 바라보면서 “어두운 해안에, 구름 한 점 없는 밤에/ 시꺼멓고 거울처럼 미끄러운 바다에/ 거기에 떠 있는 빙산을”(34쪽) 발견하게 되고,《타이타닉의 침몰》을 쓰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때의 원고는 분실되고, 10년 후 그는 ‘살아남은 자들로 가득 찬’ 베를린의 서재에서 좌절된 혁명과 잃어버린 원고를 되새기면서《타이타닉의 침몰》을 다시 써서 발표한다.
33편의 노래와 16편의 간주곡으로 모자이크 방식으로 구성된 이 서사시집에서는 먼저, 파국 직전의 순간들을 묘사한다. 배가 침몰하는 지도 모른 채 여행을 즐기는 특등실 승객들, 재앙을 감지하고 죽음을 예견하면서도 자신을 구제할 생각은 않고 말없이 기다리는 삼등실의 승객들, 그 후 서서히 침몰하는 타이타닉의 아수라장이 된 모습, 즉 익사와 죽음, 물에 빠지는 사람들의 비명 등이 묘사된다. 거기엔 바쿠닌과 엥겔스의 모습도 등장한다. 그러나 난파 후 그들의 모습은 간데없고 그들이 설교하고 논쟁하던 탁자만이 대서양 위를 떠다니면서 현실성을 잃어버린 거대 혁명이론의 운명을 상징하고 있다. 둘째, 쿠바와 베를린에서의 시인의 내면 풍경의 변화를 묘사한다. 내일은 오늘보다 더 나아질 것이라는 진보의 기대가 어떻게 환상으로 바뀌는지가 조소와 회한이 뒤섞인 채 그려진다. 그리고 침몰에 대한 종말론적이고 신화적 형태의 비유, 그리고 침몰을 묘사하면서 일어나는 심미적 유희가 그려지고 있다. 세계의 종말을 화폭에 담으면서 자신의 예술을 즐기는 중세 베네치아 화가의 형상은 또 다른 자신의 모습일 것이다. 기록과 허구의 조합을 통해 혁명뿐 아니라 근대 과학기술 문명의 침몰 순간을 심미적으로 형상화하기, 이것이 좌절 이후 시인이 자임한 과제였다. 결국 시인은 고백한다. 진보에 대한 모든 꿈, 혁명과 변화에 대한 소망, 정의에 대한 확신이 사라졌지만 권력자와 억압된 자들의 위상은 그대로 남아 있는 상태에서 이 모든 것이 타이타닉이라는 세계의 배와 더불어 서서히 침몰해 가고, 그럼에도 베를린의 황량한 방에 앉아 타이타닉의 침몰에 대해 쓰는 즐거움을 배제할 수 없음을. 또한 그는 모든 지나간 것, 흔들리는 것, 침몰한 것에 대해 서러워하고 있음도 고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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