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훈 육필시집

조지훈 지음

판매가(적립금) 25,000 (1,250원)
분류 나남신서 851
판형 46배판
면수 352
발행일 2001-05-15
ISBN 89-300-38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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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훈육필시집> 해제

선생께서 돌아가신 후 서른 세 해 동안 고이 간수해 오던 육필 시집을 공간한다. 이에 우리는 새삼 선생의 초상을 떠올리며 애틋한 그리움과 추모의 상념에 젖는다. 한동안 잊었던 옛 스승의 의연한 모습을 접하고, 묵직한 육성을 듣는 듯한 기쁨을 누린다. 이제 이 귀중한 친필 시집을 처음 찾았을 때의 감격스런 순간으로 돌아가서 그 자초지종의 경위를 밝히는 기회를 갖기로 한다.
선생의 장례를 치른 지 한 달쯤 지난 1968년 6월 중순경, 홍일식·인권환·박노준 등은 선생의 장서와 원고 정리 작업에 착수하여 약 4개월에 걸쳐 그 대강의 일을 마쳤다. 그로부터 4년 뒤인 1972년에 다시 한달 반 동안 손질을 하여 모든 작업을 마무리하였다. 원고의 경우는 발표·미발표를 막론하고 선생의 전 업적을 찾아내어서 글의 성격에 따라 몇 갈래로 분류하여 목록에 기재해 놓고 곧 찾아올 전집 간행의 때를 미리 대비해 놓기로 하였다. 세 사람 모두 직장에 매인 몸이라 주로 주말에 시간을 내서 성북동(2차 작업시는 수유동) 선생 댁을 찾았다. 갈 때마다 너무나 일찍 스승을 잃은 비통함에 젖어 서로 대화를 나누는 일도 별로 없이 묵묵히 손을 놀리던 일이 마치 몇 년 전의 일인 양 기억에 새롭다.
그런 식으로 작업에 몰두하던 어느 날이었다. 책장 서랍 깊숙한 곳에 숨어 있던 한 뭉치의 원고 묶음을 찾아내어 풀러 본 순간, 우리는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놀라움의 나직한 탄성을 내지르고야 말았다. 당신께서 직접 정서한 두 권의 육필 시선집, 그리고 시작 노트, 그것들은 모두 우리 눈에 익숙한 선생의 글씨임이 분명하였다. 곧 흥분을 가라앉히고 사모님을 급히 모셔서 여쭤 보았으나 그분도 전혀 모르는 일이라는 응답이었다.
호방하면서도 치밀한 선생의 성품은 널리 알려진 바이다. 그러한 성품이 당신께서 이미 발표하신 시편들을 저장하는 일에까지 연동되어서 마침내 정본(定本) 의식에 의한 육필 원고로 이어질 줄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아마도 댁에서 한가한 시간을 보내실 때 짬짬이 써서 책으로 묶어 놓은 것이라고 우리는 결론을 내렸다.
여기서 잠시 선생 생존시의 성북동 서재의 분위기를 회상키로 한다. 문단과 학계의 동료 후배들의 발걸음이 잦았듯이 우리도 학부 초학년 때부터 돌아가시기 며칠 전까지 댁에 무시로 출입하였거니와 그 횟수를 어찌 셈할 수 있으랴. 낮시간에 찾아 뵐 때도 그랬지만 특히 저녁 무렵이나 밤에 방문하여서 선생과 마주할 때면 바로 그 시간이 사제간의 격의 없는 담론의 시간이었다. 사모님께서 손수 마련해 주신 술잔을 들면서 선생의 말씀을 들을 때면 강의실에서와는 전혀 다른 환경에 몰입되곤 하였다. 학문하는 방법과 인생을 살아가는 기본 자세를 선생의 서재에서 배웠고 어지러운 시대를 걱정하고 한탄하는 한숨의 소리도 그곳에서 더 많이 들었다. 동서고금의 사상과 학문과 문학을 종횡으로 넘나들던 ‘知多선생’의 박학에 노상 넋을 잃었던 곳도 바로 성북동 枕雨堂 서재였다.
경청하는 우리의 감성을 더욱 고조시킨 것은 그분의 자작시 낭송. 그곳에서 들은 시가 몇 편쯤 되는지 알지 못한다. 세인들이 일컫는 당신의 몇 대표작보다는 질적으로는 다소 뒤질지 모르나 가장 애착이 가는 시는 일제 말기 숨어서 살던 때에 지은 〈落花〉라는 말씀을 듣던 곳도 바로 거기였다.
이 모든 장면도 잊을 수 없는 것이지만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는 것은 말씀 중에 수시로 책장 서랍을 열고 꺼내 보여 주시던 각종의 원고 초안과 메모, 도표화된 자료, 서찰 등이었다. 오래된 것은 해방 전에 구상한 바를 적어 놓은 것도 있었고, 또 그 내용과 범위도 시와 국학 전반에 걸친 것이었다. 잔글씨로 빽빽하게 적어 놓은 크고 작은 종이에는 선생의 시와 학문의 씨앗들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그걸 보이면서 설명하실 때의 모습에서 우리는 선생의 시와 학문에 대한 정열과 함께 꼼꼼한 성품을 읽곤 하였다.
원고를 정리할 때, 예의 자료를 다시 접하면서 우리가 이를 예사롭게 넘긴 까닭도 방금 증언한 바와 같이 그 존재를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오늘 펴내는 이 육필 시집의 원본을 발굴(!)했을 때의 경우는 그와는 사정이 전혀 달랐다. 선생에게서 직접 들은 바도, 또한 본 바도 없는 뜻밖의 자료였으니 그때 우리의 놀라움은 참으로 컸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이 육필 시선집은 담론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판단하셨기 때문에 거기에 대해선 평소 거론하지 않으셨다고 사료된다.


독자들도 이 책의 첫 장을 넘기는 순간 쉽게 간파하겠지만, 요컨대 이 육필 시선집은 기간(旣刊)의 여러 권 시집에서 뽑은 작품들을 정서해 놓은 것이다. 이미 발표된 시들을 굳이 새로 베껴 놓을 필요가 없을 터인데도 정필로 옮긴 선생의 의도가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수 없다. 앞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아마도 정본의식에서 당신의 필적을 남기려 하신 것은 아닌지 그렇게 헤아려 볼 뿐, 더 이상의 추정은 불가능하다.
설혹 다른 관점에서 요량할지라도 어쨌거나 이 시선집은 펜이나 만년필로 다시 베껴 쓴 미공개 자료라는 점에서 그 특장을 찾을 수 있다. 바로 그 점에서 우리는 이 육필 시선집의 의의와 가치를 평가하고자 한다.
이렇게 생각해 보면 알 일이다. 즉 옛 시대의 선비나 문사들은 자신이 지은 시문과 서찰·서문·비문 등 각종의 문장을 한 벌 정서해서 남겨놓는 것을 상례로 삼았다. 사후 후손이나 제자들이 문집을 편찬할 때 초고로 쓰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 사정을 시대를 달리해서 살고 있는 우리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선생의 경우는 여기에 해당되지 않는다. 이미 활자화된 시집들이 쌓여있으니 전집 편찬에 자필 원고가 따로 소용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약 150편의 시편들을 친필로 보존코자 하였으니 이 점이 희한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또 요즘의 시인들은 어떤지 모르나 적어도 선생께서 활동하던 시대의 시인들 중에서 활자화 된 자작의 시를 다시 베껴서 정리해 놓은 예가 과연 있는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문예지 등 잡지나 신문에 발표키 위해서 보낸 원고를 본인이나 후배 제자들이 나중에 되찾아서 수집하거나, 출판사의 상업적 판단에 따라 육필시집을 간행한 경우를 제외한다면 시집을 낸 뒤 다시 그 시집의 시들을 손수 육필로 남긴 시인은 거의 찾기 힘들다고 단언을 내려도 좋지 않을까 싶다. 이런 점들을 고려하고 이 시선집을 읽으면서 그 안에 내포된 여러 가지 함의를 캐내는 일은 독자들의 몫으로 남겨두기로 한다.

이 《지훈 육필시집》은 시작 노트를 제외한 예의 두 권의 자료를 합책한 것이다. 원래는 노트本(15×19㎝)에 31편, 백지책자本(20×27.5㎝)에 117편 도합 148편이 전해 오고 있으나 전자에 실려 있는 작품들 가운데 27편이 후자에 재록되어 있어서 중복을 피하기 위하여 전자의 것을 취하고 후자의 것을 빼기로 하였다. 따라서 재편집된 이 시선집의 총 편수는 121편이 된다.
이 자필 시집을 언제부터 쓰기 시작했는 지는 연대 표기가 없어서 전혀 알 수 없다. 끝낸 시기도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다만 선생이 마지막으로 펴낸 제 5시집인 〈여운〉이 1964년에 간행된 점을 참고하여 그 시집에 수록된 작품이 육필 시선에 겹쳐 있는지 여부를 따져 보면 그 대강의 시기를 어림짐작은 할 수 있을 터이다.
두 권 중 노트本이 먼저 작성된 것만은 확실하다. 겉 표지에 〈芝薰詩初― 玩虛山房藏〉이라 題한 이 자료는 선생의 초기 작품이 주류를 이루고 있을 뿐만 아니라 노트 자체가 오래된 것이다. 노트의 각면 상단에는 고무 스탬프로 숫자가 찍혀 있는데 첫면이 ‘145’로 되어 있으므로 일견 그 앞 부분에 필사된 시들이 소실된 듯 한 느낌을 주나 사정은 그렇지 않다. 고무 스탬프의 숫자가 어떤 연유에서 비롯한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선생의 시선(詩選)과는 무관한 것이 확실하다. 그 증거로는 첫번째 작품을 시작하면서 장의 표시를 ‘Ⅰ’로 명기하였고 이어서 ‘Ⅲ’까지 연이어져 있기 때문이다. 〈芝薰詩初〉의 것을 말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사실은 여기의 글씨체가 선생의 전형적인 필체라는 점이다. 서예가는 물론 문사나 학자들도 자신의 독특한 필체가 있고 그 외 한두 가지 변체(變體)가 있는 것이 상례인데 선생의 경우도 이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후자의 표지에는 題名이 없다. 그러나 전자와는 달리 전체를 여러 장으로 나누고 장의 소제목을 따로 붙여놓았다. 면수는 밝히지 않고 있다. 시집명을 그대로 따 온 것은 한 장뿐이고 (〈역사 앞에서〉) 그 나머지는 주로 작품명으로 소제목을 삼았다.두 책 모두 기간의 시집들에 실린 작품들을 일단 흩어 놓은 뒤, 다시 몇 개의 장으로 재배열한 점과 후자의 소제목을 시집명에 따르지 않은 점 등에서 자작시 전편에 대한 선생의 최종적인 생각을 읽어야 할 것이다. 전자가 펜글씨인 반면, 후자는 만년필로 쓴 것이다. 여기에 실려 있는 118편의 작품을 한꺼번에 모두 쓰셨다고 보기는 어렵다. 시간이 나는 대로 여러 해에 걸쳐 한두 편, 또는 서너 편씩 써서 합철해 놓은 것으로 보인다. 많은 작품을, 그것도 여러 해 동안 틈틈이 쓰시다 보니 글씨체도 전형적인 필체 외에 변체도 섞여 있는 것이 이 백지책자본의 특징으로 꼽힌다. 필적을 남기려는 의도성은 이 백지책지본에서 더욱 강하게 작용되었다고 헤아려진다. 노트본을 쓰실 때는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을 터이고 또한 파한(破閑) 삼아 붓을 드시지 않았는가 추정한다. 그런데 막상 써 놓고 보니 필사본에 애착이 가고 그래서 이 일을 확장한 것이 바로 백지책자본이 아닌가 헤아려 볼 수 있다. 노트본에서 이미 쓴 작품 27편을 이 백지책자본에서 다시 쓰신 것을 보면 선생의 강한 의도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작품의 선별 기준을 어디에 두셨는지, 이 점 선생께서 함구하고 있으므로 알 수 없다. 이미 간행된 시집의 작품을 그대로 옮겨 썼음에도 오기(誤記) 이외 양자 사이에 상이한 부분이 발견되는데, 이것이 필사를 통해 활자본 시집의 것을 수정·개고코자 하신 것인지도 알 수 없다. 이런 궁금한 대목들을 비롯하여 이 육필 시선집의 자료적 가치, 이를 통해서 본 선생의 면모에 대한 성찰과 규명 등의 작업은 앞으로 현대문학 전공자가 풀어야 할 과제로 남겨 두면서 나의 증언을 겸한 해제는 여기서 마감한다.


이 책이 어찌 시인을 비롯한 문학 전공자들에게만 소중한 자료이겠는가. 선생의 시와 인간을 좋아하는 많은 일반 독자들에게도 이 육필 시집은 아주 값진 선물이 될 터이다. 시인의 체온과 문기(文氣)가 넘쳐 흐르는 친필의 시를 읽으면서 활자화된 시집에서 맛보지 못한 감흥에 흠뻑 젖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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