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수의 칼

김병언 지음

판매가(적립금) 8,000 (400원)
분류 나남창작선 62
판형 신국판
면수 310
발행일 1998-01-20
ISBN 89-300-05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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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도서 금액     8,000
소설은 음식과 같은 요소가 다분하다. … 이를테면 음식이 맛과 영양과 모양새로 평가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소설에도 맛에 상응하는 '재미', 영양에 해당하는 '감동 혹은 인문학적 요소', 그리고 모양새에 대응하는 '문체와 구성의 균형'이 고려의 대상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작가 김병언이 소설 장르에 대해 한 말이다. 소설과 비평의 역사를 훑다 보면 이와 유사한 표현은 많겠지만, 그러나 특히 음식에 비교한 그의 발상은 꽤 신선하고 아울러 정곡을 찌른 느낌을 준다.
김화영은 이 작가의 소설에 대해 "건축물로 친다면 눈에 확 띄는 참신한 설계는 아니지만, 모든 공간이 꼭 알맞은 자리에 놓이도록, 아주 견고한 자재만을 사용하여 서두르지 않고 지은 탄탄한 집"에 비유한 바 있다. 이러한 평가를 김병언 자신의 방식으로 바꾸면 이렇게 될지도 모르겠다 ― "특별히 입맛을 자극하는 요리는 없지만 명가의 전통을 이어 구색을 잘 갖춘, 그러면서도 그윽한 맛의 정찬(正餐)".
소설을 음식에 비교한 사실 자체에 대해 분격하는 문학가도 혹시 있을지 모르겠다. 하긴 어떤 서양 영화에서 우리는 맛있는 성찬 앞에서 당황해하며 죄스러워하는 검은 옷차림의 신교도들을 본 적도 있는 것이다. 바로 그렇게, 우리는 김병언으로부터 소박하면서도 진지한, 그리하여 결국은 맛깔난 음식으로부터 뭐랄지 삶에 대한 성찰까지 우러나오는 느낌을 가져다주는 저 하녀 요리사를 떠올리게 된다.

김병언의 단편들을 읽으면서 어떤 특별한 형태상의 실험 따위를 발견해내기는 어렵다. 그보다는 오히려 어느 순간엔가 퍼뜩 김동인을 떠올리게 되는데, 이러한 경험은 요즘의 동시대 작가들로부터는 좀처럼 맛보기 힘든 것이 아닐까 싶다. 더구나 그의 소설 밑바닥에 흐르는 (설득력 있는) '삶에 대한 비극적 인식'은 경박(輕薄)의 신이 지배하는 이 시대에 보기 드문 미덕이 아닐 수 없다. 예컨대 그의 첫 작품집《개를 소재로 한 세 가지 슬픈 사건》(문학과지성사, 1995)에 실린 단편〈쥐는 덫의 논리를 모른다〉와 같은 작품은 바로 그러한 미덕이 치밀하게 자리잡아 독자로 하여금 책을 덮고도 한동안 한숨을 내쉬게 했던 것이다.

음식이 세상을 바꿀 수 없듯 소설 또한 세상을 바꿀 수는 없을지 모른다. 그러나 세상을 바꿀 수 없다는 인식 또는 절망이 곧 세상과의 타협을 정당화해주지는 않는다. 누릴 것은 다 누리면서 그 사실 자체에 대해 짐짓 권태로운 표정을 연기하는 것이 포스트모더니즘이라면, 김병언의 소설은 그러한 수입된 어설픈 포즈에 대한 통절한 반박일 것이다.

그 김병언이 ― 어떤 우직함이라 해야할까? ― 이번에는 그 유명한 '광주'를 소재로 자신의 첫 장편소설을 내놓았다. (기왕에 발표했던 중편 분량의〈성수도〉(星宿圖)로는 양이 차지 않았던 모양이다.) '광주', 많은 사람들에게 아마 '지긋지긋한 광주'일 것이다. 우리네 반도에 사는 사람들은, 늘, 이제 바야흐로 착수해야할 일들을 이미 한물 간 것으로 치부해 버리는 데 대단한 소질을 보이는 것은 아닌가? 작가 자신이 이 책《목수의 칼》의 '작가의 말'에서 소개하는 사연이 그러하다.

연전에 어느 문예지의 편집자에게서 이런 말을 들었던 적이 있다. 이젠 팔십년대를 다룬 작품들에 대해 신물이 나도록 질려버려 그런 류의 원고를 접수할라치면 '또 그 얘기냐?'는 알레르기성 짜증부터 앞선다는. 역설적이게도 그 말이 나한테는 용기를 준다. 팔십년대의 지평에 이미 그 정도로 수많은 작가들의 족적이 찍혔다면 나 같은 방관자 내지 문외한이 한 사람 더 거기에 발을 들여놓는다 해도 크게 누(累)가 되진 않으리라는 생각에서 비롯된.

그의 말이 한편에서는 진정한 겸사(謙辭)라는 사실은 금세 드러난다. 그는 80년도의 '광주' 때 자신이 아무것도 한 일이 없다는 사실을 늘 가슴속에 응어리로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 문학에서 80년의 광주가 정녕, 그렇듯 '신물이 날' 정도로 다루어졌는지 여부에 대해서는 별도의 논의가 필요하겠지만, 그러나 그 광주가 우리의 의식에서 벌써 가물가물해져도 좋은지에 대해서는 새삼 물을 필요가 없을 것이다. 문학은 무엇보다 우선 이 세계에 대한 작가 자신의 실존적 대면이다. 민족이니 민주니 하는 거대담론보다도, 김병언은 우선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자신의 삶이 저 광주에서 죽고 다친 이들의 희생 위에 서 있다는 엄연한 진실을 늘 대면하고 있는 것이다.

문학은 간혹 어떤 비전에 사로잡혀 열광하곤 하지만 그러한 특정한 시기가 지나면 결국 삶에 대한 비극적 인식으로 되돌아가게 된다. 그것이 아마 이 불완전한 인간들의 세상에서 문학이 떠안게된 본연의 운명일 것이다. 이번에 김병언이 내놓은《목수의 칼》은 그 '비극' 자체도 사뭇 꾀죄죄할 수밖에 없는, 한 버림받은 인생을 그림으로써 읽는이로 하여금 처연한 느낌에 사로잡히게 한다.

'목수의 칼'은 곧 '복수의 칼'이다. 유일한 피붙이였던 딸을 '광주'에서 잃은 목수 임성구는 복수를 꿈꾸며 늘 칼을 간다(비유적인 표현이 아니다). 그러나 그 칼을 실제로 쓸 수 있는 방법을 그는 모른다. 어쩌면 그 칼을 실제로 휘두를 용기도 없었는지 모른다. 그는, 다만 (비유적인 표현을 직접 실행에 옮기는) '칼을 가는' 것 말고는 달리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너무나 갈아대서 그 칼은 이제 그 형체조차 칼 아닌 무엇처럼 바뀌고 만다 …
이렇듯 어눌해 보이는 줄거리로 소설 한 편이 성립될까? 그러나 이미 앞서 지적되었듯이 김병언의 구성력은 탁월한 데가 있다. 오생근도 이 점에 대해서는 "아무리 무거운 주제라도 독자로 하여금 소설의 첫장을 읽으면 끝의 장까지 빠짐없이 읽게 만드는 작가의 흡인력은 신선하다고 말할 수 있을 만큼 놀랍다"고 밝힌 바 있다. 그는 이《목수의 칼》에서도 자신이 겪은 사우디의 공사현장과 IMF의 현재 등을 잘 엮어내서, 읽는 재미에 결코 소홀하지 않은 한 편의 짱짱한 소설을 엮어냈다. 아직도 테러리즘(!)을 꿈꾸는 저 때묻지 않은 소년적인 감수성을, 작가는 탄탄한 지적 구성력으로 스스로 떠받치고 있는 것이다.
김병언은 남성 작가가 드문 이 시대에 다시 한번 무게를 저울질해 볼 만한 소설가임에 틀림없다. 그의 첫 장편소설에서 그 역량을 확인해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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