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독립운동가의 조국 <서울신문 2014.03.01> 목숨을 건 학도병 탈출기… 첫 기록을 꺼내다
작성일 : 2014-03-04   조회수 : 2128
어느 독립운동가의 조국/윤재현 지음/나남/592쪽/3만 5000원

“꿈에 그리던 광복군이 된 것은 한없이 기뻤으나 장쑤성 린촨시에서 보낸 시간은 지루하고 무료했다. (중략) 시간을 뜻있게 보내기 위해 우리끼리 잡지를 만들기로 하고 몇몇 동료가 함께 나섰다. 이름은 ‘등불’로 정했다.”(225쪽)






▲ 미국 보스턴칼리지 생물학 교수직을 은퇴한 직후의 고 윤재현 박사. 일제강점기에 일본 유학 중 징집된 그는 탈영을 한 뒤 광복군과 OSS에서 조국 광복을 위해 활동했다. 1990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았다.
나남 제공


3·1절 95주년을 맞은 우리에게 ‘조국’이란 무엇인가. 이 가슴 뛰는 단어를 떠올리며 세상에 나온 잡지 ‘등불’은 ‘장정’(김준엽)이나 ‘돌베개’(장준하) 등의 책에도 여러 차례 언급된 바 있다. 중국 민가의 개를 훔쳐 먹을 만큼 비참했던 광복군 간부 훈련반 시절 저자인 고(故) 윤재현 박사는 동료인 김준엽·장준하 등과 의기투합해 책을 펴냈다. 종이가 없어 속옷을 벗어 손으로 필사한 책이었다.


저자는 미국 보스턴칼리지에서 교수로 정년퇴임한 생물학자다. 유전변이 쥐를 다룬 그의 논문은 지금도 ‘네이처’나 ‘사이언스’ 등 세계적 과학저널에 인용될 만큼 인정받는다. 하지만 그가 해방 공간에 머문 시기는 불과 3년.

무장해제를 조건으로 가까스로 귀국한 광복군과 불순세력으로 내몰린 임시정부 지도자들의 처지를 한탄하다 급작스럽게 미국행을 택했다. 1948년 28세의 젊은 나이에 도미하기까지 그의 인생은 순탄하지 않았다. 함경북도 회령에서 태어난 저자는 19세에 일본 교토의 도시샤대학으로 유학 갔다. 하지만 침략 전쟁에 광분한 일제에 등떠밀려 1940년대 초 중국의 전장으로 향했다.

저자는 “‘일본군 입대’란 받아들일 수 없는 현실 앞에 몸부리치다 온갖 좌절과 분노를 쏟아냈다”고 했다. 앞장서 학병 지원을 선전하고 다닌 당시 조선 최고 지식인들은 저주의 대상이 됐다.

이후의 삶은 광풍처럼 휘몰아쳤다. 용산 25부대 입영 이후 설원을 내달려 배치된 전장, 살아 있는 중국인을 창검으로 찔러 죽이던 훈련, 중국 변방의 비참한 조선인 술집 접대부들, 고문과 사형의 위험을 무릅쓰고 감행한 탈영, 2400㎞를 걸어 73일 만에 도착한 충칭의 임시정부. 이들을 맞은 건 백범 김구였다. 저자는 “위대한 혁명 영웅을 만나 감격과 기쁨에 또 한 번 목이 메었다”고 회상했다.

몸도 씻고 수염도 깎고 화톳불을 피워 이투성이 옷을 태운 저자 일행은 밤을 지새워 목놓아 조선의 옛 노래를 불렀다고 했다. 이들 가운데 일부는 다시 미군 정보기관인 OSS에 배속돼 특수훈련을 받았다. 그리고 국내 침투가 임박한 1945년 8월 10일, 훈련 책임자로부터 일제의 항복 소식을 전해 듣는다.

이런 경험은 고스란히 우리나라 최초의 학병 탈출기인 ‘사선을 헤매며’(1948)에 담겼다. 임시정부 부주석을 지낸 우사 김규식은 책 서두의 추천사에서 “심신상의 고통은 이루 기록할 수도, 형언할 수도 없었을 것”이라고 했다. 국립중앙도서관에 단 한 권 남았던 책은 보존 상태가 불량해 내용을 알아보기가 불가능했다. 저자의 조카인 김현주 광운대 교수는 1994년에 타계한 윤 교수를 대신해 ‘사선을 헤매며’와 임시정부 소개 책자인 ‘우리 임시정부’(1946), 소설 ‘동토의 청춘’(1979)을 엮어 책을 펴냈다. 책은 우리의 태만과 방종을 꾸짖는 고함 소리와 같다.
첨부파일 SSI_20140228172459_V.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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