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pub 2014.02.19>_ 일본의 <해협> 작가 하하키기(帚木)의 일갈(一喝) '아베 총리 제발 그만 하시오'
작성일 : 2014-02-20   조회수 : 2185
이날은 아침부터 가슴이 설렜다. 하하키기 호세이(帚木蓬生·67)라는 유명 소설가와 모리야마 나리아키라(森山成杉木)라는 정신과 의사로 살고 있는 특별한 사람을 만나기로 돼 있었기 때문이다. 그와의 약속은 정오 12시였으나 후쿠오카(福岡)에서 오전 10시쯤 출발했다. 그가 일하고 있는 도시 주변을 사전에 살피기 위해서다.

멀지 않은 과거에 탄광촌이었던 나카마시(中間市)-
하하키기 호세이 씨는 인구 45,000명 정도의 작은 도시에서 멘탈 클리닉 병원을 운영하면서 소설가로 활동하고 있다. 그와는 약 2년 전에 통화를 한 적이 있었고, 2주전에 전화로 약속 시간을 잡았다. 선생은 매 주 수요일 오후는 병원이 쉬기 때문에 수요일은 언제든지 만남이 가능하다고 했다. 때마침 시간이 나서 필자는 그를 찾았다.


5만 년 전 규슈와 한반도가 강(江) 하나를 사이에 두고 인접한 이웃동네였다

규슈(九州)의 산하(山河)는 우리와 흡사했다. 5만 년 전 규슈와 한반도가 강(江) 하나를 사이에 두고 인접한 이웃동네였다는 사실에 무게가 실렸다.

산천은 푸르렀고 기온은 온화했다. 봄이 서둘러서 다가왔을까. 후쿠오카 지역의 기온이 영상 15도로 예보되고 있었다. 창문을 열어 봄 바람을 차안으로 불러 들였다. 고령(高齡)인데도 운전대를 잡고 즐거워하는 오츠보 시게다카(大坪重隆·74) 씨의 흥얼거림이 봄기운에 장단을 맞췄다.

40여분 쯤 고속도로를 달리자 기타규슈(北九州)의 표지판이 나왔다. 기타규슈는 예로부터 공장지대였다. 탄광지역에서 캐낸 석탄(石炭)을 뱃길이나 철도를 이용해서 이곳 공장들의 용광로를 지폈음에 틀림없다. 야하다(八幡), 노가타(直方) 등 눈에 익은 표지판들이 바람 따라 스쳐 지나갔다.

드디어 나카마시(中間市)를 알리는 안내판이 나타났다. 고속도로를 벗어나자 좁은 도로와 연결됐다. 나카마시는 아주 작은 도시였다. 키가 작은 나지막한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지팡이를 짚은 노인들과 병원 간판들이 유난히 많았다. 인구 90만 명의 기타규슈의 위성 도시 내지는 주거 지역(bed town)이기도 하다. 잠시 시간적 여유가 있어서 도시를 한 바퀴 돌고 소설 <해협>에 자주 등장하는 온가강(遠賀川)으로 향했다.



잔잔한 물결의 온가강


"온가강의 물도 따뜻해지는 호시절 부산 동백섬의 동백꽃도 곧 피기 시작하겠지요....금년 74세인 야마모토 산지(山本三次) N시장이 폐석더미 철거 안(案)을 들고 나왔습니다."

일본의 지인으로부터 주인공 하시근(河時根) 회장에게 보낸 편지의 한 구절이다. 물론 소설 속 이야기다. 필자 눈앞의 온가강은 역사의 아픔을 잊어버린 듯 표정 없이 잔잔하게 흐르고 있었다. 겉으로는 잔잔해도 강물은 때때로 역사의 흐름을 우리에게 일깨워 주고 있다.

온가강(遠賀川)이 흐른다.
잔잔한 표정으로

강물은 지난 날의 상처를
씻어버린 것일까.

아니다. 아니다.

잔잔한 흐름 속에
가르침이 있으리.

문학 평론가이자 교수인 김재홍 선생은 "강물은 시인의 마음으로 굽이치며 철학자의 가슴으로 흘러가면서 사랑과 삶의 법칙, 역사의 흐름을 조용조용 우리에게 일깨워 주고 있다"고 했다.

"저 쪽이 상류이고 반대쪽 하류가 기타규슈입니다. 탄광에서 캐낸 석탄은 이 강을 따라 기타 규슈로 옮겨졌습니다."

기타규슈가 고향인 오츠보(大坪) 씨의 설명이 길게 이어졌다. 실제로 이 강은 석탄이 주요 에너지이던 1900-1960년대에 석탄 운송을 하던 뱃길 이었다.


온가강과 낚시꾼


아무튼, 강바람은 제법 시원했다. 나이가 지긋한 할아버지 강태공(?)이 낚싯대를 길게 늘어뜨려 놓고 앉아 있었다. 세월을 낚는 것인지, 고기를 낚는 것인지, 분간이 되지 않을 정도로 미동도 하지 않았다.


환자들을 치료하면서 소설을 쓰는 하하키기 선생

내비게이션의 안내대로 목적지 부근을 찾았으나, 병원의 간판을 찾지 못하고 주변을 몇 바퀴 돌았다. 결국 지역민의 신세를 졌다.

"후미키리(踏切, 건널목)를 건너자마자 왼편으로 멘탈 클리닉 병원의 간판이 보일 것입니다."


하하키기 선생이 운영하는 정신 병원

아직도 우리나라에서 나이든 사람들에게 통용되는 후미키리(踏切)라는 말이 낯설지 않았다. 주민의 말대로 병원은 철도 건널목(踏切)과 딱 붙어 있었다.

병원은 작고 예뻤다. 아담한 병원에서 환자들을 치료하면서 소설을 쓰는 하하키기 선생의 모습이 연상됐다. 병원의 작은 정원에는 키 큰 사잔카(山多花) 한 그루가 빨간 꽃을 피우고 서있었다.

병원에 들어서자 세러피(therapy) 견(犬) 누렁이 한 마리가 꼬리를 흔들며 반갑게 맞이했다. 누렁이의 이름을 정신 병원답게 신군(心君)으로 불렀다. 병원 로비에서 잠시 기다리는 동안 선생의 목소리가 밖으로 새어 나왔다. 그동안 서울에서 몇 차례 통화한 대로 그의 목소리는 밝고 활기찼다. 잠시 후 백발의 머리에 빨간 티셔츠를 입은 선생이 필자에게 손을 내밀면서 반갑게 맞이했다.

"아! 어서 오십시오. 먼 길을 오셨군요."

일본의 유명 문학상을 휩쓴 하하키기 호세이 작가가 아닌 모리야먀 나리아키라 의사의 방은 결코 화려하지도 넓지도 않은 작은 공간이었다. 필자는 급한 마음에 바로 질문으로 들어갔다.


하하키기 선생(왼)과 필자


탄광촌의 실제 이야기를 토대로

▶ 아버지를 대신해서 17세의 나이에 일본의 탄광에서 생(生)과 사(死)의 문턱을 넘나들었던 세 번 건넌 해협(한글판 해협)의 주인공 하시근(河時根)의 스토리는 눈물 그 자체였습니다. 이러한 테마로 소설을 쓰시게 된 동기가 무엇입니까?

"이 지역은 본디 탄광촌입니다. 제가 의사가 돼서 이 마을 병원에서 일하게 되었을 때 환자 들이나 주변 사람들, 재일 교포 등으로부터 들은 이야기입니다. 저 역시 경력에 나와 있는 대로 대학을 두 번(도쿄대 불문과, 규슈대 의학과) 졸업한 사람입니다. 더구나 이 곳 출신이구요. 그런데도 이토록 아픈 사실이 있었다는 자체를 까맣게 몰랐습니다. 저는 단지 묻힌 역사적 사실을 발굴해서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었을 따름입니다."

▶ 요즈음 일본 정부가 식민지 문제 등 과거사에 대해 다른 시각을 내보입니다만, 굳이 이토록 밝힌 이유는 무엇입니까? 선생의 세 번 건넌 해협을 많은 한국 사람들이 감명 깊게 읽었다고 합니다. 반대로 일본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받지는 않으셨나요?

"그런 일은 없었습니다. 이 소설로 제14회 요시가와 에이지(吉川英治) 문학신인상을 받았습니다. 어떤 일본 독자는 오히려 자신의 인생사와 같다고 하기도 했습니다. 역사적 사실을 토대로 소설화 했을 뿐 거짓으로 꾸민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해협의 스토리를 설명하는 작가 하하키기 선생

▶ 소설에서 탄광 근처의 아리랑 마을이 등장합니다만, 아리랑 마을이 실제로 있었나요?

"아! 실제로 있었습니다. 기록에도 분명이 나와 있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른 탓도 있지만 그곳이 정확히 어디냐?고 물으면 하나같이 입을 다물어 버립니다. 과거의 상처를 들춰내지 않으려는 듯합니다."

▶ 다시 소설의 이야기입니다. 탄광 폐석더미(보타야마)를 허물어버리고 주택을 짓자는 N시장과 이를 반대하는 하시근의 이야기입니다. N시장은 나카마시(中間市)입니까?

"아! 그거요? 나카마시(中間市)일수도 있고, 노카다시(直方市) 일수도 있습니다... 폐석더미가 시대의 흐름을 타고 많이 없어졌으나, 그래도 몇 군데 남아 있습니다. 그것도 역사의 잔재인 만큼 남아야 하지 않을까요? 그런 의미에서 소설은 폐석더미를 남기는 쪽으로 했습니다."

선생은 소설에서 약간 벗어나서 한국의 의사들과의 교류와 한국 병원들의 최신 설비, 그리고 삼성병원과 현대 아산병원, 대학 병원들의 규모와 장례식장에 대해서 큰 부러움을 표명하면서 이 부분이 일본과 비교하면 크게 앞서간다고 했다. 그리고, 연세대·아주대 등의 유명 교수들과 강화도의 한 정신병원을 방문했던 일도 자세하게 설명했다. 작가가 아닌 의사로서의 이야기였다. 필자는 그의 유명 소설 <폐쇄병동>에 대해서 묻다가 다소 민감한 질문을 던졌다.

▶ 요즈음 아베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와 교과서 문제 등으로 한국, 중국, 일본이 대립각을 세우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 한 말씀해주시기 바랍니다. NHK 신임사장의 위안부 문제도 그렇고요. 해결 방안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제발 그만 둬야 합니다.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는 것은 대단히 잘못된 일이죠. 저는 그 사람(정치인)들의 말을 귀담아 듣고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민간의 교류가 활발해져야 합니다. 장(張) 선생이 말씀하신 후쿠오카의 나들이 회(會)에 기회가 된다면 가입하고 싶습니다. 민간교류를 통해서 정치적인 문제를 해소해야 합니다."

선생의 역사 인식은 <세 번 건넌 해협> 소설에 극명하게 묘사돼 있다. 과거 속에 우리가 배워야 할 모든 것이 들어 있으며, 역사를 비판적으로 바라볼 때에 빛을 발한다고 했다. 소설 속으로 들어가 본다.

역사를 비판적으로 바라볼 때에 빛을 발한다.

<독일이 기회 있을 때마다 자신들의 과오를 뉘우치고 끊임없이 역사를 발굴하고 재조명하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일본은 자신의 행위에 눈을 감고 타국을 유린했던 역사적 흔적을 망각으로 덮어버리려 했다. 한민족에게 열등민족이라는 낙인을 찍고 무력침략과 경제적 착취를 계획적이고 치밀하게 추진했으며, 조선통감부와 조선총독부를 근거지로 한민족의 저항에 폭력과 탄압을 계속 자행한 일본. 5천년 역사와 함께 고유 글자마저 폐하고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성(姓)과 이름까지 개명(改名)시켰던 일본.>

<그러한 과거의 일본을 사실 그대로 인식할 수 있는 일본인이 과연 몇 사람이나 있을까. 1895년 일본 정부가 조선의 궁궐에 군대와 폭도를 보내 조선 왕비를 참혹하게 살해한 역사적 사실이나, 조선 침략의 주역인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하얼빈 역(驛) 플랫폼에서 사살한 안중근 의사가 한민족의 영웅으로 존경받고 있는 사실을 아는 일본인이 얼마나 될까.>

▶ 한국에서 책은 많이 팔렸나요?

"한국어 판 책이 나온 뒤에 한국 중심부의 한 서점(광화문 교보문고)에 갔습니다. 그런데 그 곳에 <해협>의 재고가 없다고 했습니다. 모두 팔려서요(웃음). 그 후로는 소식을 모릅니다."


필자가 가지고 간 소설에 사인하는 하하키기 선생


선생은 필자가 가지고 간 한글판 <해협>에 붓으로 사인을 해 주었고, 커다란 도장까지 꽝! 찍어 주었다. 선(線)이 굵은 그의 성격이 그대로 묻어났다. 의사로서의 일도 버거울 텐데 작가 생활까지 하는 이유에 대해 질문을 하자 "의사로서 만은 밥을 먹을 수 없어서요"라고 대답해서 한바탕 웃음을 터트리게 하는 그의 유머 감각도 여유 있어 보였다.

병원 앞까지 나와서 작별 인사를 하는 선생의 얼굴은 따스한 햇볕을 받자 더욱 생기가 돌았다. 인생 자체가 즐거움으로 가득 찬 것 같았다.

폐석산(廢石山)을 찾아서-

필자는 다시 광산 폐석 더미를 찾아서 이이즈카시(飯塚市)로 갔다. 이이즈카시(飯塚市)는 전 총리이자 아소타로(麻生太郞) 현 부총리의 출신지이기도 하다.

이이즈카시에 들어서자 멀리 폐석산(廢石山)의 봉우리가 보이기 시작했다. 카메라 앵글을 잡기 위해 반대편 공원으로 올라가자 세 개의 봉우리가 두 개 밖에 보이지 않았다. 혹시 실수할까봐 지역 주민들에게 여러 차례 확인했다.


폐석 더미와 마을


"맞습니다. 저것이 바로 광산폐석(일본어: 보타야마) 더미입니다. 돌무더기였던 산이 언젠가부터 녹음이 우거지기 시작했습니다."

폐석더미는 난지도의 하늘공원처럼 푸르러 있었다. 저 푸름의 밑바닥에는 광부들의 고통과 땀과 눈물이 녹아 있을 것이다. 소설 <세 번 건넌 해협>은 폐석 더미를 자본가들의 배설물이라고 했다.

"갱부들의 시체는 땅 속에 묻혀 사람들 눈에 띄지 않지만 그들의 피와 땀으로 배를 불린 자본가들의 배설물이 쌓여 저런 모습으로 솟아오른 거지."


해협 작가를 만난 후의 오츠보 씨

"저도 놀랐습니다. 저토록 훌륭한 일본인이 있었다니.... 감동했습니다. 소설가, 의사를 떠나서 머릿속 이야기를 쓴 것이 아니라 역사적 사실과 현실적 이야기를 썼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정말 매력적인 사람입니다."

필자를 안내했던 오츠보(大坪) 씨의 말이다. 일본인 스스로 매력적인 일본인이라는 말에 모든 것이 함축돼 있었다.

과거를 부정하면 미래도 없으리...

"모든 원한은 강물에 흘려버린다는 말이 있다. 그러나 적어도 이것은 피해를 입은 쪽에서 할 말이지 가해자가 입에 올려서는 안된다"는 소설의 한 대목을 떠올리면서 후쿠오카(福岡)로 향했다.
첨부파일 UPBANK5RFY21U5A5E0CD.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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