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SP에서 정부 공인 문화예술인으로
매체명 : 주간경향   게재일 : 2005-10-25   조회수 : 8040

주간경향 | 2005. 10. 25.

 

ASP에서 정부 공인 문화예술인으로

 

 

2005-10-25 주간경향.jpg

나남출판 조상호 사장


34년 만의 대반전. 드라마에서 빼놓을 수 없는 요소인 반전이 지난 10월 15일 조상호 나남출판 사장(55)에게 실제로 일어났다. 이날 조 사장은 전주 소리문화의전당에서 열린 제37회 대한민국 문화예술인상 시상식에 참석했다. 문화부문 수상자로 선정돼 상을 받은 것이다.

조 사장은 국내 손꼽히는 출판인으로서 많은 수상 경력을 갖고 있을 뿐 아니라 ‘지훈상’은 직접 제정해 시상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 상만큼은 그에게 각별한 의미가 있다.

10월 15일은 그에게 결코 잊을 수 없는 날이다. 34년 전인 1971년 이날 서울 일원에 위수령이 발동됐다. 대학가를 휩쓴 교련반대 데모를 잠재우기 위한 박정희 정부의 강압조치였다. 당시 고려대 법과 2학년생이던 그는 지하신문 〈한맥〉을 만드는 등 학생운동에 깊이 연루돼 있었다. 그를 비롯한 180여 명의 대학생이 이때 제적과 함께 강제징집돼 최전방에서 함께 군대생활을 했다.

병적기록부에 ASP(Anti-government Student Power)라는 도장이 찍힌 이들은 각 부대의 3번 소총수에 배속돼 특별 관리됐다. 그러나 함께 학생운동을 하고 비슷한 환경에서 군복무한 인연으로 이들은 학연지연보다 더 끈끈한 동지애를 느낀다. 지금도 이들은 ‘71동지회’라는 이름으로 매년 10월 15일 모임을 갖고 친목을 다진다.

학생운동 전력 때문에 마땅히 할 일이 없어 1979년 5월 출판사를 시작할 때만 해도 조 사장은 ‘정부가 인정하는 문화예술인’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한해 100여 권, 지금까지 2,000권이 넘는 책을 내는 동안 ‘현장의 유혹’도 많았다. 현장이란 정치나 사회활동을 말한다. 하지만 그는 곁눈질하지 않았다.

나남출판은 캐치프레이즈가 말해주듯이 ‘쉽게 팔리지 않고 오래 팔리는’ 책을 내는 것으로 유명하다. ‘조지훈 전집’ ‘백범 전집’ 등 상업성이 거의 없다고 생각되는 책들을 과감히 출간한다. 그래서 대박을 안겨준 베스트셀러가 별로 없다. 그런데도 현재 파주출판단지에서 가장 멋진(?) 사옥을 가진 메이저 출판사로 자리를 굳혔다.

34년 전 ‘71동지’들이 달았던 ASP라는 딱지는 당시 아스피린의 약자로 이해되기도 했다. ‘골치 아픈 존재’라는 뜻이었다. 하필이면 조 사장이 이 딱지를 달던 10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그를 공인하는 상을 준 것이다. 의병이 훈장을 받은 기분이 된 조 사장은 상금 1,000만 원을 프랑크푸르트도서전 조직위원회에 쾌척했다.


글 | 신동호 편집위원 hudy@kyunghyang.com

이전글 출판 외길 30년, 지식의 저수지를 갈무리하는 ‘의병장’
다음글 아름다운 사람들과 함께 한 출판 4반세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