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현 회고: 대한민국 성찰의 기록] 金鎭炫 회고록을 읽고 한 경계인의 ‘대한민국 현대사 紀行’
매체명 : 월간조선   게재일 : 2022.09.21.   조회수 : 134

국가 지도층 머릿속에 국가가 없다

金泳三, “에이이승만 독재자레이, 독재자

비서실장에게 돈을 마련해오라!”고 채근한 金大中

북한, 만찬장 옆에 술 강권 공작팀꾸려놓고 방북 언론사 사장단의 만취, 추태 유도

북한 다녀온 후 체제와 이념 문제에 있어서만큼은 0.01%라도 북한 측과 타협할 수 없다지침 내려

대한민국을 의심, 폄하, 부정하면서는 한민족 한반도의 자유·민주·통일·정의·평화를 세울 수 없다

지도층은 회고록 써놓고 죽어야

 

 

나는 일제시대와 6·25 무렵까지 시골 할머니 집에 가면 숙모들이 베틀에 앉아 목화솜으로 옷감 짜는 소리를 듣고, 짚신을 신고, 저녁이 되면 여우에게 물려간다고 집 밖에 못 나가고, 6·25 전까지는 정말 호랑이 눈빛이었는지 밤에 곰내미산 줄기 앞산 등성이에 두 불빛이 어슬렁이면 호랑이 나왔다고 어른들이 경계하던 체험을 기억하는 세대이다. 벼 심고 벼 베고, 송진을 따 호롱불 켠 체험의 세대이다. 한말(韓末) 이전부터 이어온 전통, ‘산촌의 자연을 체험한 마지막 세대이다.

 

저자는 자신을 이종(異種)사회, 이종집단, 이종기관 간의 경계를 가장 다양하게 넘나든 유일한 언론인이다고 자평(自評)했다. 재미있는 회고록을 쓸 수 있는 최적(最適)의 경험자란 뜻이다.

 

조선일보주불(駐佛)특파원 신용석(愼鏞碩)씨가 유럽에 머물고 있던 나에게 이 회고록을 읽고 감동했다는 연락을 해와 이 책의 출판을 알게 되었다. 최근에만 이 책을 계기로 저자와 두 번 만났는데 그의 첫마디가 이승만, 박정희를 제외하면 국가 의식을 가진 지도자를 갖지 못한 나라다는 개탄이었다. 윤석열(尹錫悅) 대통령도 지난 광복절 기념사에서 한국의 국시(國是)인 자유민주주의 이야기는 많이 하면서 그날이 건국 74주년임을 확인하지 않고 넘어갔다(역대 대통령 중 문재인에 이어 두 번째).

 

 

金泳三, “李承晩 독재자레이, 독재자

 

특히 일부 우파란 분들의 이승만 영웅화가 지나쳤다. 우남에 대한 극좌파의 날조, 과잉 폄하는 고쳐야겠으나 그 과정에서 ‘4·19혁명을 지나치게 격하, 결국 안병만 교육부 장관이 교육부가 제작한 기적의 역사영상물을 회수하고 사과하는 자해행위마저 생겼다. 우남에 대한 왜곡 정리를 넘어 마치 백범이 1948년 북행시(北行時) 6·25를 미리 알고 국민을 속인 것처럼 주장하는 등 백범 폄하가 극심해졌다. 그러자 광복회와 대한민국 임시정부 기념사업회(김자동 회장)대한민국 건국은 1919년이다제하 89주년 학술회의를 열어 대항했다. 그럴수록 우파의 반격도 강해져 대한민국역사박물관짓자는 캠페인성 보도도 계속 나왔다.

 

KBS2008716일 아침, 건국 60주년 기념사업 집행위원장이던 저자에게 인터뷰를 요청했다. 앵커가 정부 부처 장관·민간들이 참여한 위원회는 19488월 정부 수립을 건국으로 보고하며 말을 건다. 저자가 국민과 영토와 주권을 확실하게 갖고 또 주권이 국제적으로 승인된 나라는 대한민국이 실제적인 건국이고, 지금은하는데, 기자가 말을 끊고 그러나 역사학계가 정면으로 반박하고 나섰습니다며 박성수·이만열 교수와의 인터뷰로 이어갔다. KBS조차도 시시비비의 언론이 아니라 ‘60주년 건국반대 진영 대변기관인 듯했다고 썼다.

 

그는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우남-백범의 통합에서 찾아야 한다고 했다. 이승만과 김구: 한국 민족주의의 두 유형이란 대작을 쓴 손세일(孫世一) 선생의 생각과 비슷하다.

 

시간이 갈수록 백범기념사업회가 정부 비판 인사로 기울고, 백범 행적을 반()대한민국 좌파 쪽으로 기울게 하는 것을 막아야 한다. 그러기 위하여 백범의 아드님인 김신 장군을 반공연맹(자유총연맹) 이사장으로 모시고, 우남의 양자인 이인수 명지대 교수를 새마을운동 이사장으로 기용하라고 간곡히 진언했다. YS의 즉각 반응이 놀라웠다. “에이이승만 독재자레이, 독재자.” 백범엔 언급도 없었다. 관심조차 보이지 않았다. 오늘 이 땅 이념 갈등의 뿌리엔 단순히 극좌 대 극우, 친북 대 반공이라는 도식을 넘어 이른바 주류 내의 철저하지 못한 자기정체성 상실에도 큰 원류가 있다.

 

나라와 민족과 국가의 차이를 모르는 이가 국가원수 자리에 앉으니 그 어떤 이념이나 동맹보다 민족이 더 중요하다고 외치며 한국 현대사의 가장 중요한 두 건물, 중앙청과 청와대 본관을 민족정기 회복 차원에서 철저히 부숴버린 것이다.

 

1980년 짧은 민주화의 봄에 뜻밖에 그의 자형(姊兄)이 김대중 비서실장이 된다. 비서실장을 통해서 그는 밖에서 아는 DJ와 너무나 판이한 DJ를 알게 되었다고 썼다. 돈이었다. 한번은 자형이 조용히 만나자 해서 집으로 갔다. “어찌 돈을 마련할 수 없겠느냐?”는 하소연이었다고 한다. “돈을 마련해오라!”는 독촉을 두 번이나 받았다는 것이다. 전에 서울시에 있던 누구는 얼마를 마련해오고 여의도 어느 목사는 몇억씩 몇 번 기부했다며 어찌해야 할지 자문하는 것이었다. 저자는 비서실장을 그만둘망정 돈에 관여하지 말라고 했다.

 

저자는 김대중을 만났을 때 특이한 점을 발견했다고 한다. 논설위원들과 식사를 끝내고 헤어질 때 아무리 먼저 나가시라 해도 모두가 서서 기다려야 했다고 한다. 초청자는 비서가 미리 저녁값을 결제해서 문 앞에서 바로 헤어지게 되는 법인데 DJ만은 다 보고 있는 앞에서 지갑을 꺼내 현금(그때는 카드가 없었다)을 두 손으로 세어 계산하더라고 했다. 그는 자형한테 들은 돈 이야기와 겹쳐 기억에 남는다고 썼다.

 

 

논쟁적 한국인 鄭周永

 

현대그룹은 삼성, LG·GS, SK, 한화그룹과 더불어 한국에만 존재하는 독특한 기업그룹-선진국에도 일본에도 없고 인도, 타일랜드, 필리핀 등에서만 일부 아직 존재하는, 그러면서도 이들과도 다른 독특한 가족기업 복합그룹이라고 정의한다. ‘그룹이라기보다 영어의 스피어(Sphere, 天球, 또는 세계)라고 했다. 경제·금융산업을 넘어 사회 모든 부문, 정치·외교·교육·예술·법조·의료·복지·스포츠·언론에 큰 영향을 미치는 독립왕국의 한 전형이란 것이다.

 

정주영에 대한 호불호와는 상관없이 이 점만은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한국 20세기 근대화 혁명의 큰 줄기의 하나이고 산업화 담당 초() 거물, 한국 산업혁명의 상징 기업인이라는 점, 특히 맨주먹 소박한 한인(韓人)’의 세계적 성공 신화, 단군 이래 원형(原型) 한인세계적 기업 성공신화의 창조자라는 점에서 같은 세대의 성공 기업인들과 도전의 질()에서 확연히 차이가 난다는 것이다. 삼성, LG·GS, 효성, 쌍용 등 영남 부자(富者) 상인 출신들의 성공신화와도, 동양화학(이희림), 대한선박해운(이정림) 등 개성 출신 재벌들과도 차별성이 분명하다. 가장 원초적인 한인으로서 최초의 세계 기업인이 된 점, 이게 정주영의 역사적 위상이란 것이다.

 

그는 기업인이면서도 정권에 호락호락하지 않았고 때로는 정권에 도전을 서슴지 않았으며 정치에 뛰어들었다. 저자는, 그를 가장 철저한 한인, 보편인, 세계인, 전면인(Totalman) 정주영이라고 요약했다. “한국적 기준으로는 가장 동물적인 보편성, 그러나 그 시대 인물 대부분이 그러하듯 권력-국가의식은 강하나 본질적 의미의 사회공동체, 보편적 사회 시민의식은 부족할 수밖에 없는 한계를 극명하게 보여준 인격이라고 보았다.

 

나는 1992년 가을 대통령 후보로 나선 77세의 정주영을 인터뷰했는데 그렇게 신나 보일 수가 없었다. 기업인으로 맨날 정치인, 특히 대통령 눈치를 보다가 선거운동 기간에 욕도 마음대로 할 수 있으니 기분이 좋다는 이야기였다. 대선 직후 김영삼 당선자를 만나보니 낙선한 김대중 후보보다 보수표를 잠식, 자신이 낙선할 뻔했다고 정주영을 벼르고 있었다. 정 회장은 김영삼 5년 동안 비자금 관련 수사로 검찰에 불려 다니고, 현대그룹은 정권 눈 밖에 나 고생했다. 건강도 악화되었다. 경제 권력이 정치 권력을 못 당한다는 원리를 재확인했다.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니 기를 펴게 된 정주영은 소떼를 몰고 방북, 김대중-김정일 평양회담의 길을 닦았지만, 아들 정몽헌은 그 회담과 관련된 대북(對北)송금 사건 수사를 받다가 자살했다.

 

헤드테이블에 앉은 최태복 최고인민회의 의장 등도 최 사장의 말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오로지 김정일의 입술에만 눈과 귀가 쏠렸다. 내 옆자리에 있는 강능수에게 말을 걸어도 나한텐 눈도 안 주고 건성으로 , 할 뿐, 그도 입술만 보고 있었다. 최 사장은 역사적인 기록이라 생각해서 새벽까지 답사 원고를 다듬었는데하며, 아쉬움을 토로했다. 안하무인 자존망대의 극치였다.

 

방북 언론사 대표단은 812일 낮 12시부터 330분까지 평양시 중구 목란관에서 김정일과 식사를 하고 대화를 나눴다. 박지원 문화관광부 장관과 방북 언론사 대표단 56명 전원이 참석했다. 접견실에서 김정일과 약 20분간 잡담을 했다는데 대화록을 검색하여 읽어보니 저자가 말한 자존망대의 극치를 확인할 수 있었다.

 

 

김정일, “언론, 정확성에서 우리가 훨씬 정확

 

남쪽 신문은 쭉 보다가 8년 전부터 눈이 나빠져 지금은 잘 안 봅니다. 섭섭한 게 많지만 이젠 나무라지도 않겠습니다. 6·15선언 이후 많이 달라졌습니다. 과거에는 본의 아니게 그랬을 것입니다. 보도 경쟁에서 북쪽 언론이 질 수 있으나 정확성에 관해서는 남쪽 언론 못지않습니다. 우리가 훨씬 정확합니다.”

 

우리는 평화적 이용을 위해서 로켓을 개발 중에 있는데 미국은 자꾸 자기들과 전쟁한다고 우리를 의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과학기술 발전을 위해 로켓을 연구하고 있습니다. 로켓 한 발에 2, 3억 달러가 들어가는데 미국이 우리 위성을 대신 쏴주면, 푸틴 대통령에게 우리가 개발을 안 하겠다고 얘기했습니다.

 

위성 발사는 과학 목적으로 하는데 1년에 두세 번 하면 한 9억 달러 들어갑니다. 로켓을 개발해서 대륙 간 탄도탄을 만들어 두세 발로 미국을 공격하면 우리가 미국을 이깁니까? 그런데도 미국은 이것으로 트집을 잡고 있습니다.”

 

우리 군대가 전쟁 때 낙동강까지 갔었는데 집집마다 동아리에 막걸리가 있어서 두세 사발씩 먹고 비리비리하는 바람에 전쟁에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정주영 영감이 막걸리를 30가지나 보내와서 조금씩 먹어봤는데 그 가운데 아주 맛 좋은 게 있어서 이게 제일 맛있더라고 알려주니까 정 회장이 포천 막걸리라고 대답하면서 어떻게 알아냈느냐며 깜짝 놀랍디다.”

 

박정희 평가는 후세가 해야지. 동참자가 말해서는 안 됩니다. 그때 그 환경에서는 유신이고 뭐고 그럴 수밖에 없었습니다. 소위 민주화도 무정부적 민주화는 곤란합니다.”

 

북남 합쳐봤자 인구가 1억도 안 되는데 그럴수록 명예를 중히 해야지요. 대국에 비굴하거나 아첨하면 절대 안 됩니다. 남쪽의 경제 기술과 북쪽의 정신을 합작하면 강대국이 됩니다.”

 

내 힘의 원천으로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가 모두가 일심단결하는 일이고 두 번째가 군력입니다. 외국과 잘 되어도 군력이 있어야 하고 친해도 군력을 가져가야 합니다.”

 

김 회장은 귀경(歸京) KBS 박권상 사장으로부터 강권추태가 계획된 공작이었음을 직접 들었다고 한다. 박 사장은 방북단 최연장자인데다 이미 6월 평양회담 때도 참가했었다. 그날 저녁, 몸이 불편하여 불참하려다 마지막 만찬이라 참석했다. 만찬이 길어지자 중간에 숙소로 돌아가겠다고 하니 북측이 당황했다고 한다. 그들은 급하게 만찬장 옆 빈방 책상 위에 박 사장을 눕혔고 만찬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그 옆방이 바로 술 강권 선동공작팀의 방이었다. 조용히 누워 있으니 옆방에서 무슨 소리가 들렸다고 한다. 주의 깊게 들으니 공작지휘부에서 각 테이블에 술 강권 지시를 내리는 소리였다. 이런 식이었다.

 

“A 테이블 김 사장 걔 몇 잔 먹었어? 10? 안 돼 인마! 20잔은 먹여야지. 10잔이 뭐야!”

 

많은 남쪽 방북자들의 말 못 할 이야기들이 많이 있었을 것이다. 명색이 김정일 초청에다가 그가 최고로 믿는다는 박지원을 포함한 56명의 귀한 손님에게도 이러니, 얼마나 많은 추태와 약점들이 잡혔을까? 그리고 북은 이를 얼마나 이용했을까?

 

 

어떻게 인간을 이렇게 만들어놨나

 

수년 전 퇴직한 국정원의 대북(對北)공작관은 나에게 이런 말을 했다.

 

북한에 갔다 온 뒤 갑자기 태도가 바뀌는 이들은 조심해야 합니다. 북한에 혼자 가는 것은 위험합니다. 저들의 공작에 속수무책입니다. 미인계(美人計)를 쓰는 이유 중 하나는 약점을 잡으면 매수할 필요가 없어 돈이 안 든다는 점 때문이지요. 김정일이나 김정은이 방북 인사를 특정, 포섭하라고 명령하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해내게 되어 있습니다.”

 

소련의 KGB와 동독 정보기관이 서방 정치인 등을 상대로 미인계를 쓴다든지 동성연애 등 약점을 잡아 간첩 요원으로 포섭한 예는 이미 많이 드러나 있다. 북한의 공작 행태는 소련을 원형으로 삼으니 비슷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김진현 당시 문화일보회장은 마지막으로 순안공항을 떠나올 때 동원된 군중을 보면서 인간적으로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어 눈물이 났다고 적었다. 땡볕에서 2시간40분 동안 서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특히 여섯 살 꽃다발 소녀가 조국통일을 외치며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보면서 어떻게 인간을 이렇게 만들어놨나, 북녘 내 동포가 너무 불쌍했다고 했다. 그는 회사로 돌아와 이번 방북에서 뼈저리게 느낀 점은 체제와 이념 문제에 있어서만큼은 0.01%라도 북한 측과 타협할 수 없다는 점이며 우리 신문은 두려움과 편견을 버리고 진실만을 보도해야 한다는 북한 보도 지침(2000822)을 내렸다고 했다.

 

김진현 회장의 북한 보도 지침은 그보다 2년 먼저 북한을 방문하고 돌아온 홍석현 중앙일보회장이 내린 보도 지침과는 판이하다. 홍 회장은 1998923일 고려대학교 언론대학원 최고위 과정 강연에서 북한에 대한 시각 변화는, 1994년 이른바 조문(弔問) 파동 직후 김대중씨를 만난 것이 계기였다고 했다.

 

 

홍석현 중앙일보의 논조 변화

 

당시 야당 지도자였던 현재의 대통령을 일산의 모처에서 만나 조문 파동에 관해 서너 시간에 걸쳐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서로 의견이 같은 부분도 있고, 다른 점도 있었지만, 이 만남은 제가 이후 남북문제를 보는 새로운 시각을 갖게 되는 계기였던 것만은 분명했습니다. 그 며칠 뒤 저는 북한을 어떻게 봐야 하고 언론은 이에 대해 어떠한 역할을 해야 하는가를 두고 사내 토론에 부쳤습니다. 중앙일보는 중도우익을 표방하고 있습니다만 남북문제에 관한 한 한겨레쪽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의 변화를 하기로 한 셈입니다. 이 같은 논조 변화의 과정을 거친 뒤에는, 북한과의 직접적인 접촉을 시도하기로 했습니다.”

 

우연히 일본 쪽 경로를 통해 유력 인사와 연결되면서 실마리가 풀렸고, 19977월 마침내 중앙일보북한문화유산 답사팀이 언론사상 최초로 북한 땅을 밟고 이어 올해 9월까지 네 차례의 방북 조사를 성공하게 됐습니다.”

 

그리고 북한에 대한 보도 방법도 이제는 보다 신중하고 조심스럽게 해야 할 때입니다. 북한 사람들도 이제는 기사를 잘못 쓰면 바로 사장실에 항의 전화를 해대는 우리의 독자처럼 여겨야 한다는 뜻입니다. 권영빈 위원이 이번 4차 방북을 마치고 돌아와서는, 북한의 인공위성 발사와 관련 광명성이 가야 할 길이라는 제하의 칼럼으로 군사적 강대국화를 떠나 경제 입국을 통한 부국화를 촉구했습니다. 북한 측에서는 북경을 통해 우리 측에 아니 알 만한 사람이 어떻게 광명성이 어쩌고 저쩌고 하느냐(북한에서 광명성은 사실 김정일 총비서의 별칭에 해당됨), 이제 당분간 중앙일보와는 공동사업을 보류하고, 앞으로의 계획도 재검토하겠다며 반발하기도 했습니다.”

 

참고로 201671일 자 중앙일보에는 당시 국제문제 대기자 김영희 이름으로 사드를 포기하자는 논평이 실렸다.

 

정답은 사드 배치 포기다. ·미 관계는 약간의 후퇴를 용납할 만큼의 여유가 있다. ·중 관계에는 그런 마진이 없다. 전쟁 방지가 지상명령인데 사드가 있다고 북한의 도발 의지는 꺾이지 않는다. 차라리 사드를 포기하고 중국의 힘을 빌려 북한의 전쟁 도발을 사전에 방지하는 것이 최선의 정책이다.

 

중앙일보가 외교·안보 정책에서 이처럼 왼쪽으로 돌아선 배경이 홍석현 회장의 김대중 면담과 방북이었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 신문과 JTBC가 박근혜 타도에 어떤 역할을 했는지도 아울러 검토할 만하다.

 

 

개념어를 많이 만든 분

 

일류(一流)국가는 명사를 만들고 이류(二流)국가는 동사를 만든다고 한다. 민주주의, 자본주의, 3권분립, 인권 등 명사를 만든 나라는 1류이고 그들이 만든 민주주의를 따라 하는 나라는 2류를 면하기 어렵다는 뜻이다. 김진현 선생은, 명사, 즉 개념어를 많이 만들었다. 회고록에 내가 만든 개념과 용어가 두 페이지에 걸쳐서 소개되어 있을 정도이다. TK, 문어발 재벌, 선진화(善進化), 해양화, ()조세 등이다. 1980년대 초 김 선생이 쓴 논문에서 “38도선 분단으로 한국은 섬이 되었다. 무역으로 먹고사는 해양화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게 된 것은 축복이었다는 글을 읽고 세상을 보는 눈이 맑아지는 느낌을 받은 적이 있다. “좋은 글은 세상을 넓게 밝게 보게 하는 통유리와 같다는 조지 오웰의 말처럼 되려면 개념어가 잘 정리, 활용되어야 하는데 한글전용으론 이게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김 선생이 염원하는 선진화는 한국어의 반신불수(半身不隨)로 불가능한 목표가 된 게 아닐까? 이 책에서도 김진현이란 발음부호만 있고 金鎭炫이란 뜻을 담은 본명은 맨 끝 이력난에 숨어 있었다.

 

 

라이샤워, “아시아에선 한국만 민주주의 가능

 

1972년 유신(維新)이 선포됐다. 김 선생이 오전 강의가 끝나고 니만 사무실 라운지에서 뉴욕타임스를 펼치니 1면 톱에 탱크가 국회 정문을 막아선 사진과 함께 유신계엄 선포 기사가 실려 있었다. ‘눈물이 났다. 이제 신문사도 문 닫겠구나. 나라는? 나는 어찌해야 하나?’ 니만 동료들도 있는데 눈물을 보이기 미안하여 정문을 열고 뜰로 내려가는데 다릿심이 빠져 계단에서 주저앉아 버렸다고 한다.

 

열흘쯤 뒤 하버드대학 라이샤워 교수가 주동, 학자 전직 외교관 등 10여 명이 박정희(朴正熙) 독재를 맹렬히 비판하고 압력용으로 주한미군(駐韓美軍) 철수를 요구하는 성명서가 나왔다. 저자는 라이샤워 교수 면회를 신청, 옌칭도서관에 있는 그의 사무실에서 만났다. 유신반대 성명에 감사를 표하고, 그러나 유신의 명분이 북한으로부터의 위협인데 미군 철수 주장은 닉슨 독트린처럼 박정희 독재의 명분을 강화할 수 있다고 말했다. 설명 중에 1904~1905년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의 친일(親日) 정책을 언급하는 순간 라이샤워는 책상을 탕 치면서 말했다.

 

미스터 김, 내가 한국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아는가. 옌칭도서관에 한국관을 만든 것도, 한국학 강의와 한국학 교수를 독립시킨 것도 나일세. 나는 아시아 국가 중 민주주의를 할 수 있는 나라는 한국밖에 없다고 확신하고 있네. 한국인들의 개성적·직설적 성격으로 해서 한국만이 민주주의가 가능한 나라이네. 중국, 베트남? 일본? 내가 일본 전문가이고 주일대사 했고 마누라도 일본 사람이지만 일본은 민주주의 어려워.”

 

두 가지로 큰 충격이었다. 일본에 대하여 경제 기술은 물론 정치 민주주의도 우리보다 훨씬 앞선 선진국으로 생각했던 나, 당시 평균적인 한국 사람 모두 그리 알고 있는 일본에 대한 미국 최고 일본 전문가의 말씀은 놀랍지만, 소화가 어려웠다. 한국만이 아시아에서 민주주의가 가능한 특출한 나라인데 오직 박정희가 이를 막고 있다는 판단은, 국내에서건 해외에서건 처음 듣는 말이었다.

 

김 선생은, 그 이후로 일본은 어떤 나라인가, 아시아에서 한국의 특징, 세계적 보편성과 아시아적 일반성과 한국의 특수성·예외성 같은 명제에 매달렸다고 한다. 그 결과물의 하나가 2005년에 출판된, 일본 친구들에게 정말로 하고 싶은 이야기이고 아직도 매달리고 있다.

 

라이샤워 교수는 통일신라를 높게 평가한 적이 있는데 이게 대한민국에 대한 낙관적 전망으로 연결된 것인지 모르겠다. 일본 천태종을 연 승려 엔닌(圓仁)의 여행기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를 영문(英文)으로 번역 출판하고 해설책 엔닌(圓仁)의 당대(唐代) 중국 여행이란 책을 냈던 그는 신라에 감탄했다.

 

당시의 한국(신라)은 지리적으로도, 언어적으로도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는 문화적으로도 이미 오늘과 같은 나라였다. 같은 민족, 언어, 국경을 가지고 한국보다 더 오래 지속되고 있는 나라는 중국뿐이다. 한국에 필적할 만한 소수의 국가군() 속에 일본이 들어 있다.

 

신라 통일을 가능케 했던 것은 나당(羅唐) 동맹이었다. 신라인의 해외 활동은 세계 제국 당()의 제1 동맹국이었다는 데서 가능했을 것이다. 1945년 이후 한국인의 활동무대가 신라인을 닮아 세계로 넓어질 수 있었던 데는 한미(韓美) 동맹 덕이 컸다. 통일신라와 대한민국은 상무(尙武)정신, 자주정신, 해양화 등 공통점이 많다.

 

 

대한민국에 대한 반역이 진행 중

 

김진현 선생은 건국 70주년인 2018년 문재인 정부를 대한민국에 대한 반역정권이라 규정하고, ‘김정은과 주사파(主思派) 합작의 위험을 경고하였다. 86일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열린 대한민국의 시작과 완성, 그리고 과제’(한국정치외교사학회 및 선진통일건국연합 공동 주최) 축사를 통해서였다.

 

그는 자유, 민주, 평등, 다원, 개방이라는 인류 진보의 가치와 그 실현에서 아시아 최고인 대한민국이 우리 안에서 극성스러운 자기 부정과 자멸로 가는 처참한 몰골 앞에 자괴감 그리고 문득문득 허무감마저 든다고 했다.

 

통사적(通史的), 동시대사적(同時代史的) 비교에서 그 어느 나라 민족주의 근대화 운동보다 우월한 대한민국의 실적을 의심, 폄하, 부정, 저주하는, 대한민국에 대한 반역이 바로 건국 70주년을 맞는 2018년에 더욱 기승을 부리는 현실 앞에 1945해방’, 1948건국의 감격이 아니라 2018자멸의 피눈물을 본다.”

 

잠깐이나마 한반도 남쪽 5000만 대한민국이 12억 중국보다 경제력(GDP)에서 컸던 기록(1980년대 말 1990년대 초)이 있는 그런 대한민국의 중심성 완성의 길을 김정은이, 트럼프가, 시진핑이, 푸틴이, 아베가 막는 것은 당연하다 할 수도 있겠지만, 우리 안에서 민주정부의 권력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 역사의 반동은 어디서 왔나.”

 

그는 김정은과 주사파 합작에 의한 파국의 위험을 넘기 위해서 대한민국 주류(主流)는 끊임없이 대한민국 민족주의의 원형과 지향점을 확인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대한민국의 민족주의는 헌법이 명시한 대로 통일지향이며 주변 4강을 극복하지 않고는 통일이 어렵기 때문에 자강(自强)’ 지향이어야 한다. 그는 “2018년 오늘에 분명한 진실은 대한민국을 의심, 폄하, 부정하고는 한민족 한반도의 자유·민주·통일·정의·평화를 세울 수 없다는 것이라면서 한국의 정체성, 정통성, 법통성의 강화를 통하여 한반도 중심성 창조의 길을 가야 한다고 결론을 내렸다. 이것이 회고록의 요약이기도 하다.

 

 

노인이 죽는다는 건 도서관이 불탄 것과 같다!

 

당신들의 행복에 비해 너무 불운, 불행한 삶을 지낸 이 나라 독립, 건국 희생자들에 대한 감사의 표시를 하고 갔어야 했다. 나 죽기 전 나 같은 쓴소리 기록들도 많이 쌓여 이 나라 독립과 건국에 희생된 선열들의 고통이 헛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란다.

 

노인이 죽는 일은 도서관 하나가 불탄 것과 같다고 한다. 세계에서 가장 드라마틱하고 해피엔딩의 이야깃거리를 가진 한국의 기성세대는 이제 교과서 왜곡 타령 그만하고 연륜(年輪)에 새긴 저마다의 회고록, 피가 흐르는 진짜 교과서들을 다 토해 놓고 사라져야 한국의 정통성·정체성·정당성 문제를 최종적으로 해결하고 헌법 제1, 3, 4, 10조가 명령하는바 북한노동당을 몰아내고 자유통일 하여 신라의 삼국통일 이후 두 번째의 일류국가를 완성할 수 있는 자료들을 갖게 될 것이다.

 

남과 북이 민족사적 정통성과 삶의 양식(樣式)을 놓고 타협이 절대로 불가능한 총체적 투쟁을 벌이고 있는한반도에선 이념전쟁에서 이기는 것만으론 부족하다. 역사전쟁에서 이겨야 진짜 승리하는 것이고 이는 기본적으로 자료싸움이다. 60대 이상 국민들을 대상으로 한 회고록 쓰기 운동을 제창한다.

 

김진현(金鎭炫) 선생의 회고록 대한민국 성찰의 기록(나남출판 펴냄, 653페이지)은 올해 86세의 저자(著者)가 체험한 한국 현대사 기행문처럼 읽힌다. 언론인, 장관, 대학 총장, 시민운동가 등 다양한 입장에서 대한민국을 경험한 분이 기억이 아니라 계획적으로 모은 기록을 근거로 쓴 책이라 인용할 사례가 많다. 김 선생은, 평소의 기록 습관에다가 자료 정리를 뒷받침해줄 사무실과 비서가 있었다는 점이 다행이라고 했다.

 

저자는 자신을 다생(多生) 세대라고 정의했다. ‘가장 전쟁 경험이 많은 세대, 가장 많은 문자와 언어로 생활한 세대, 가장 이사 많이 다닌 세대(‘고향’ ‘향수를 아는 마지막 세대), 가장 다양한 국가체제를 겪은 세대, 가장 많은 혁명(사상, 정치, 경제, 생활, 기술)을 겪은 세대로서 대한민국 역사의 증인임을 자각하며 이 기록을 쓴다고 했다.

 

저자는 책에서 나는 이 나라 대통령, 총리, 국무위원들, 국사학자들이 대한민국 정통성, 정체성, 정당성을 지켜야 한다는 의지가 너무 없다는 것을 발견했다고 했다. 국가 지도층의 머릿속에 나라(country)’국민(nation)’은 있는데 국가(state)’가 없다니 충격적이다. 저자는 , 전 총리 분들의 언행이 그러했다면서 우파 지도자들부터 비판한다.

 

저자는 1993년 김영삼(金泳三) 대통령과 국수를 먹으면서 이런 건의를 한다.

 

 

金大中과 돈

 

김진현 선생은 회고록을 쓸 때 기자정신을 유감없이 발휘한다. 공인(公人)일 경우 친했던 사이라도 어두운 면을 드러낸다. 김대중(金大中) 전 대통령에 대한 평가는 대체로 부정적이다.

 

김진현 선생은 경제부 기자로 출발, 동아일보논설실장, 한국경제연구원 대표이사, 과학기술처 장관, 한국경제신문회장, 문화일보회장, 건국 60주년 기념사업 집행위원장, 대한민국역사박물관 건립위원장 등을 거치면서 특히 재벌 내부 사정에 밝은 분으로 알려져 있다. 회고록에도 재벌 회장들 이야기가 더러 나오는데 그는 현대그룹 창업주 정주영(鄭周永)을 가장 논쟁적 인물로 꼽았다.

 

 

金正日의 자존망대 안하무인

 

20006월 김대중-김정일 평양회담 직후인 812일에 있었던 언론사 대표들의 방북(訪北) 비화는 충격적이다. 저자는 문화일보회장으로 평양에 갔는데 기괴한 장면을 목격했다고 썼다. 김정일의 정식 초청으로 북한을 방문하였으니 공식 오찬에서 환영사 같은 게 있을 줄 알았다고 한다. 김용순 노동당 비서 겸 통일선전부장이 환영사를 했고 이어서 최학래 한겨레사장이 방북언론사장단을 대표하여 답사를 읽었다. 그런데 김정일은 시종일관, 환영사를 하는 김용순이나 답사하는 최 사장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듣지도 않았다. 옆자리에 있는 박권상 KBS 사장 또는 다른 사람과 계속 떠들었다는 것이다. 최 사장이 열심히 답사를 읽다가 힐끔힐끔 김정일을 보더니 끝냈다.

 

 

술 먹이기 공작

 

김진현 당시 문화일보회장은 이 책에서 당시 평양에서 있었던 일을 취재기자처럼 알려준다. 서울로 돌아가기 전날 저녁 선전선동부장 정하철의 만찬이 있었는데, 여기서 희한한 일이 벌어졌다는 것이다. 김 회장 테이블의 접대역은 철도신문사장이란 젊은이 혼자였다. 김 회장은 술이 약하다. 철도신문사장이 첫술을 따를 때 어느 자리든 한잔밖에 못하니 양해해달라고 했다. “, 알겠습니다하곤 건배를 마치자 바로 술잔을 채웠다. 두 잔째를 마시고 나니 또 따랐다. “이거 안 되는데라고 해도 마지막 밤인데 좀 취하시면 어떠냐며 강권했다. 그러기를 네 번, “그래, 그러면 이게 마지막이오. 더는 권하지 마시오하고 술잔을 비웠다. 그러자 다섯 잔째 또 따랐다. 김 회장은 버럭 소리를 지르면서, “이런 놈이 어디 있어. 내가 미리부터 한잔만 한다고 알렸고, 성의로 석 잔 더 받고 더 권하지 않기로 했잖아. 고얀 놈!” 하니 그제야 움찔하고 멎었다. () 방송사 사장은 술을 빨리 안 갖고 온다고 북한 종업원을 때려서 코피가 낭자하게 흘렀다. 다른 방송사 사장도 만취해 계단에서 뒹구는 등 해서는 안 될 추태가 벌어졌다. 술자리는 밤 1140분에야 끝났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노래는 한 열 번 부르고, 몇 분은 북한 노래도 부르고 마이크를 여러 번 잡았다고 했다.

 

김진현 선생은 1970년대 하버드대학 부설 니만 재단 초청으로 연수를 간 적이 있다. 나는 1990년대 니만 펠로였다. 그는 한국 대학 4년보다 그곳에서 1년이 더 많이 배웠다고 말한 적이 있다. 김 선생은 하버드에서 만난 에드윈 라이샤워 교수의 말 한마디에 한국 정치를 보는 눈이 달라졌다고 썼다.

 

그는 대한민국에 대한 역사적 반동(反動)의 범인으로 문재인 정권을 특정하였다.

 

그는 머리말에서 대한민국 과거 지도층의 게으름, 특히 기록의 소홀을 가차 없이 비판한다. 회고록을 통하여 국민과 역사 앞에서 진실을 고백해야 할 의무를 진 특권층 인사들이 그 의무를 포기하였다는 것이다. 신현확(申鉉碻) 전 국무총리에게 회고록 집필을 강권하다시피 하였지만 실패했던 점을 지적하면서 이렇게 덧붙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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