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바이어던] 중국은 자유민주주의의 대안이 될 수 있을까?
매체명 : 프레시안   게재일 : 2018-11-11   조회수 : 747

지난 100년간 총독부 통치와 독재 정권을 경험한 한국인들은 '국가'라는 통치기구가 잘못 작동하면 국민이 큰 고통을 겪어야 한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 국가의 과잉으로 힘들었던 우리와 달리 17세기 유럽은 국가의 결핍을 자신의 문제로 절감했다. 그들에게 올바른 국가는 좋은 사회를 만들기 위한 필수적인 해결책이었다. '국가 만들기'를 화두로, 자신의 사상을 구축한 인물이 바로 토머스 홉스다. 홉스의 사상은 '절대권력 옹호론'으로 알려져 있다. 공교롭게도 홉스의 책 <리바이어던: 교회국가 및 시민국가의 재료와 형태 및 권력>(진석용 옮김, 나남신서 펴냄)을 극찬한 이는 나치 독일의 이데올로그 정치철학자 칼 슈미트였다. 책을 들여다보면 오해의 소지가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소문처럼 권력자만을 옹호하는 책은 아니다. 홉스의 사상도 시대의 산물이었다. 홉스가 절대권력의 출현을 염원한 데는 권력의 공백이 불러오는 참상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홉스의 시대는 영국을 포함한 유럽대륙 전체가 전쟁으로 얼룩진 때였다. 홉스가 서른이 되던 해, 유럽은 '30년 전쟁'으로 빠져들었다. 30년 전쟁(1618~1648년)은 로마 가톨릭교회를 지지하는 국가들과 프로테스탄트를 지지하는 국가들 사이에서 벌어졌다. 유럽 전역에 걸쳐 약 800만 명의 희생자를 낳았을 정도로, 잔혹한 전쟁이었다. 영국에서는 내전이 발생했다. 내전은 1942년에 시작되어 1951년까지 이어졌다. 국왕을 지지하는 왕당파와 국왕의 일방통행을 반대한 의회파 사이에서 발생한 내전이었다. 내전 결과, 의회파가 승리해 찰스 1세는 처형당했다. 의회파는 올리버 크롬웰을 호국경으로 삼아 영국 연방을 세웠다.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크롬웰이 죽은 후 다시 제임스 2세가 집권하고, 또다시 왕당파와 의회파의 대립이 격화되었고, 갈등은 결국 명예혁명까지 20여 년이나 이어진다. 영국 내전은 지금에야 이런 역사가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으로 칭송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 시대 평범한 시민의 눈으로 보자면 혼란 그 자체였을 것이다. 홉스의 사상이 일견 절대권력 옹호로 기우는 듯 보이는 것은 이런 시대적 배경이 있기 때문이다. 17세기 유럽은 중국의 춘추전국시대와 흡사했다.

 

홉스는 이런 혼란이 권력과 국가(코먼웰스)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없기 때문에 발생했다고 생각했다. 이런 문제의식을 가지고 탐구한 결과물이 <리바이어던>이라는 책이다. 리바이어던은 구약성서의 '레비아탄'으로 거대한 괴물을 의미한다. 교회국가, 시민국가의 '국가'는 영어로는 '코먼웰스(commonwealth)'다. 청교도혁명 이후, 정치공동체로서의 국가는 관례적으로 코먼웰스(commonwealth)라고 불렀다.

 

홉스의 대중적 이미지는 전제군주정의 옹호자였지만, 완전히 다른 평가를 내리는 사람도 있다. 인문학자 박홍규는 홉스를 '민주주의 정치원리의 창시자'로 상찬한다. "홉스는 20년간의 내란이라는 극단적인 상황을 앞에 두고 어느 편을 든 것이 아니라, 국가를 만들 필요가 인권과 자유를 확보하기 위한 것임을 밝혀 세계 최초로 민주주의 정치원리를 구축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2006년 1월호 <인물과 사상> 서평 '민주주의자 홉스의 리바이어던' 중) 전제군주정에 대한 옹호자인지, 민주주의 원리의 실질적 창안자인지는 간단히 말하기가 애매하다. 어느 쪽으로 보아도 그럴듯한 구석이 있기 때문이다. 도대체 홉스는 어떤 주장을 했기에 양극단의 평가를 받는 것일까?

 

홉스가 일평생 궁구한 문제의식은 '평화'였다. 평화는 어떻게 수립될 수 있을까? 홉스는 먼저 '자연상태'라는 사고실험에 나선다. 자연상태라는 개념은 이후 '로크-루소-롤즈'로 이어지며 정치사상의 핵심개념으로 정착된다. 홉스는 "자연상태에서 인간들은 어떻게 행위를 할까?"라고 묻는다. 홉스는 논리적 추론을 통해 자연상태에서 인간은 서로 갈등할 것으로 판단한다. 인간은 왜 필연적으로 갈등하게 되는가? 홉스는 인간이 가진 정념을 갈등의 원인으로 제시한다. "나는 모든 인간에게 발견되는 일반적 성향으로서 죽을 때까지 계속되는, 힘(power)에 대한 끊임없는 욕망을 제일 먼저 들고자한다." 왜 욕망은 무제한적으로 증폭되는가? "잘 살기 위한 더 많은 힘과 수단을 획득하지 않으면, 현재 소유하고 있는 힘이나 수단조차 확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무한정한 욕망도 문제지만,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이 있다. 대다수 인간들의 능력이 평등하다는 점이다. "자연은 인간이 육체적·정신적 능력의 측면에서 평등하도록 창조했다. 간혹 육체적 능력이 남보다 더 강한 사람도 있고, 정신적 능력이 남보다 뛰어난 경우도 있지만, 양쪽을 모두 합하여 평가한다면, 인간들 사이에서 능력 차이는 거의 없다. 있다고 하더라도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이익을 주장할 수 있을 만큼 크지는 않다."

 

능력의 평등은 각자의 기대치를 높인다. 홉스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능력의 평등에서 희망의 평등이 생긴다. 즉 누구든지 동일한 수준의 기대와 희망을 품고서 목적을 설정하고,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노력한다." 노력하는 것이 왜 문제일까? 문제는 자원의 희소성에 있다. 홉스는 주장을 이어간다. "같은 것을 두고 두 사람이 서로 가지려 한다면, 그 둘은 서로 적이 되고, 따라서 상대방을 파괴하거나 굴복시키려 하게 된다. 파괴와 정복을 불가피하게 만드는 경쟁의 주된 목적은 자기보존이다." 능력의 평등은 희망의 평등을 가져오지만, 자원의 희소성으로 사람들은 갈등하게 된다. 

 

능력이 비슷한 인간들이 자신들이 가진 무제한적 자유를 가지고, 희소한 재화를 두고 다툴 때 자연상태는 지옥으로 변한다. 서로가 서로에 대해 늑대가 되고 만인은 만인에 대해 투쟁하게 된다. 이러한 가혹한 조건은 개별적 인간들이 원래 추구했던 자기보존 욕구조차 충족시켜주지 못한다. 이 상태에서 인간은 죽음의 공포만을 경험할 따름이다. 자기욕망만을 따른 결과가 자기보존을 오히려 위협한다는 것을 사람들은 깨닫게 된다. 공포와 자기보존 욕구는 이런 상태를 벗어나기 위해 각자가 가진 자유와 욕망을 제한하고 사회계약을 체결하도록 만든다. 

 

인간은 이 상태로부터 빠져나올 가능성은 없는 것일까? 홉스는 가능성을 조심스레 언급한다. "인간이 그러한 가혹한 상태로부터 빠져나올 수 있는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 가능성의 일부는 인간의 정념에서, 일부는 인간의 이성에서 생겨난다." 홉스는 갈등이 아니라 평화를 촉진시키는 정념들이 있다고 주장한다. 그런 정념들로 홉스는 '죽음에 대한 공포', '생활용품(재화-필자 주)에 대한 욕망', '생활용품을 획득할 수 있다는 희망' 등을 말한다. 또한 평화의 규약을 생각해낼 수 있는 인간의 이성적 능력도 평화의 추동력이다. 평화를 유지하기 위한 상호 간의 규칙이 평화의 규약, 즉 '자연법'이다. 홉스의 자연법에 대한 설명을 살펴보자.

 

홉스는 자연상태에서 인간이 가지는 무제한적인 자유를 '자연권'이라고 말한다. 자연권이 제한 없이 행사되는 상태에서 평화는 요원하다. 무제한적 자유인 자연권에 일정한 제약을 가하는 것, 그래서 평화에 이르는 것을 홉스는 자연법이라고 칭했다.

 

자연법에 기초해 평화를 건설해야 한다. <리바이어던> 2부는 이런 글로 시작한다. "천성적으로 자유를 사랑하고 타인을 지배하기를 좋아하는 인간이 코먼웰스 속에서의 구속을 스스로 부과하는 궁극적 원인과 의도는 자기보존과 그로 인한 만족된 삶에 대한 통찰에 있다. 다시 말하면 비참한 전쟁상태로부터 벗어나고 싶기 때문이다." 그런데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자연권을 양도하는데 도대체 누구에게 양도해야 하는가? 개별적 인간에게 나의 권리를 양도해보았자 아무런 의미도 없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나의 안전도 타인의 안전도 보장받으면서 평화를 수립할 수 있는가? 

 

이 지점에서 홉스는 공동이익을 위해 모든 사람이 따라야 하는 '공통의 권력'이란 개념을 들고나온다. 만인의 이익을 확보하기 위해 각자는 자신의 자연권을 공통권력에 양도해야 한다. 홉스는 이렇게 주장한다. "이 (공통) 권력을 확립하는 유일한 길은 모든 사람의 의지를 다수결에 의해 하나의 의지로 결집하는 것, 즉 그들이 지닌 모든 권력과 힘을 '한 사람' 혹은 하나의 합의체에 양도하는 것이다." 공통권력이 나타나 다수의 사람들이 하나의 인격으로 통합될 때 그것을 코먼웰스라고 부른다. 이렇게 인공인간으로서의 국가, '리바이어던'이 탄생한다. 리바이어던의 표지 그림은 이것을 상징하고 있다. 얼핏 보면 칼을 든 큰 거인이지만, 이 거인의 몸 자체는 작은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다. 개인은 거대한 인공인간 국가와 일체화되어 있다.

 

국가 리바이어던이 일단 성립하면 자동적으로 평화는 도래하는 것일까? 당연히 그렇지 않다. 홉스는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국가가 무제한적 권력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국가를 주권자로 격상시킨 뒤 주권자의 권리는 직접적인 양도 이외로는 결코 양도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심지어 이렇게 말한다. "주권자가 강압적 권력을 행사하는 것은 자기 자신(국가-필자 주)을 방어하는 일에 기꺼이 힘을 다하지 않으려는 백성들의 반항적인 태도 때문이다." 홉스의 이론에서는 로크가 말하는 '혁명의 권리'는 존재할 수가 없다. 무능력한 독재자나 통치자도 백성이 직접적인 힘을 행사해 무너뜨리는 것은 옳지 않다. 왜냐하면 백성들의 개별적 의지가 모여진 것이 통치자이기 때문이다. 통치자는 백성 자체이다. 홉스는 자신이 자신을 공격할 수는 없다고 말한다. 자유민주주의를 당연시하는 현대인에게 홉스의 견해는 생뚱맞다 못해 불쾌감마저 들게 한다. 그러나 홉스는 이렇게 방어한다. "무제한적 권력이라면 여러 가지 바람직하지 못한 결과들이 생길지도 모른다고 걱정할 수도 있겠지만, 권력의 부재로 인해 생기는 결과들, 즉 만인이 자기의 이웃과 전쟁상태에 있는 것에 비하면 확실히 더 낫다."

 

사회계약론의 결과물인 인공인간 리바이어던의 탄생 과정을 간단히 설명하면 이렇다. 먼저 1)자연상태에서 전쟁상태가 존재한다, 2)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을 벗어나기 위해 ‘평화를 추구하라’는 자연법이 제시된다, 3)사회계약을 맺고 서로의 자연권을 공통권력인 리바이어던 즉 국가에 양도한다, 4)일단 만인의 의사를 결집한 주권자가 출현한 이상 평화유지를 위해 개인은 국가에 절대적으로 복종해야 한다. 

 

문제는 마지막 단계에 있다. 홉스를 국가주의자, 절대권력 옹호자 등으로 오해(?)하게 만드는 내용들이 <리바이어던> 곳곳에 삽입되어 있다. 홉스의 과격한 말이다. "백성의 자유는 주권자가 그들의 행위를 규제하면서 불문에 부친 일들에 대하여만 존재한다. 예를 들면, 매매의 자유, 혹은 상호 간의 계약의 자유, 주거·식사·생업의 선택, 자녀를 자신의 뜻에 따라 교육하는 것, 기타 이와 유사한 일들에 대해서만 자유가 있다." 자연상태에서 평화를 만들기 위해 국가가 만들어지고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국가의 절대적 무한권력이 보장되어야 한다는 것이 홉스의 핵심논지다. 사회계약론을 통해 자유민주주의의 이론적 기초를 놓은 사상가로 이해되는 홉스이지만 그의 생각을 하나씩 펼쳐보면 자유민주주의와 많이 어긋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홉스의 주장을 하나씩 검토해보자. 홉스의 자연상태 추론은 정확한 것일까? 홉스의 말대로 자연상태에서 인간은 미친 듯이 전쟁상태로 빠져들까? 정치철학자 레오 스트라우스(Leo Strauss)는 홉스의 자연상태를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필요한 구성물"로 이해한다. 역사적 사실판단에 관한 논구는 루소의 <인간불평등기원론> 서평에서 다루었으므로 생략하고, 일단 게임이론을 홉스적 자연상태에 대입해보자. 철학연구자 박종준은 논문 '자연상태는 죄수의 딜레마 상황인가'에서 컴퓨터를 이용한 전략게임을 소개하고 있다. '스미스와 프라이스(Smith and Price)'는 다양한 전략들을 사용해 실제 자연상태와 흡사하게 갈등상황을 실험했다. 인간의 성향을 항상 피하기만 하는 쥐파, 항상 공격하는 매파, 협박을 하지만 상대의 대응은 피하는 협박파, 싸움은 먼저 걸지 않지만 상대의 공격에 맞대응하는 보복파, 상대의 힘을 파악한 후 자제하거나 공격하는 탐색적 보복파 5개의 전략으로 시뮬레이션을 돌린 결과는 의외였다. 논문의 결론 부분이다.

 "보복파는 안정적(생존이 안정적-필자주)이었고 탐색적 보복파는 거의 안정적이었다. 그러나 매파는 안정적이지 않았다. 즉 매파적 개체들은 자연에서 도태하게 되어 있다. 메이나드 스미스와 프라이스의 연구는 자연상태에서의 상호작용 양상이 생명을 걸고 정면충돌하는 전면전이 아니라 심각한 상해를 피하고 전략적으로 경쟁하는 제한전임을 보여준다. 연구를 근거로 판단해보면 전쟁이 만연한 자연상태는 균형(equilibrium)이 아니다. 즉 그러한 상태는 지속될 수 없다. 매파와 같이 공격적 전략만을 선택하는 개체들은 빠르게 도태할 수밖에 없다. 이것은 결국 항구적인 전쟁상태인 홉스적 자연상태는 경험적이고 논리적인 근거가 약하다는 것을 시사한다."

 

홉스가 자연상태를 '만인의 전쟁상태'로 묘사한 것은 '사회계약'을 논리적으로 도출하려는 의욕 때문이었다. 평화에 대한 강렬한 염원 때문에 자연상태의 비참함을 다소 과장했다고 볼 수 있다. 홉스가 상정한 자연은 과연 자연상태였을까? 철학연구자 송석현은 자신의 논문 '사회계약론 패러다임의 현대적 의의와 한계'(2012)에서 영주가 사라진 중세 농촌공동체를 생각해보라고 말한다. "이와 같은 공동체는 비록 외부의 적들에 의해서 파괴될 가능성은 있지만, 이 공동체 내부에서 개인들 사이에서 전쟁상태가 발생할 가능성은 낮다. 따라서 홉스가 상정한 개인은 중세 농촌공동체를 벗어난 근대적 산물로서의 개인이다." 홉스가 생각한 평등하지만 서로 갈등하는 '개인'이란 존재는 어떻게 생겨난 것일까? 홉스의 개인은 자연 그대로의 개인이 아니었다. 홉스적 개인은 대항해 이후 원거리 교역과 식민지 경영이 창출하는 부에 노출된 개인들이었다. 이들은 부의 축적에 기반한 '안락'을 극단적으로 추구하기 시작한 새로운 인간유형이었다. 홉스의 개인은 결코 자연상태의 개인이 아니라 초기자본주의가 형성시킨 인간유형이었던 것이다. 자본주의는 욕망을 키우고 욕망은 갈등으로 이어진다.

 

홉스는 사회계약이 일단 체결된 이후 국가에 대한 절대적 복종을 요구한다. 자유에 대한 홉스의 글을 읽고 있으면 개인에 기초한 '근대적 사회이론의 창시자'라는 상투적 소개문구가 무색해진다. 홉스는 자유에 대해 이렇게 적고 있다. "자유는 매우 고귀한 것으로 언급되어왔다. 하지만 그 자유는 사사로운 개인의 자유가 아니라 코먼웰스의 자유다." 민주주의의 시원으로 칭송되는 아테네에 대한 혹평도 서슴지 않는다. "아테네인들과 로마인들은 자유를 누렸다. 즉 자유로운 코멘웰스들이었다. 개개인이 대표자에게 저항할 자유를 가지고 있었다는 뜻이 아니라, 대표자들 자신이 다른 나라 인민들에 대해 저항하거나 침략할 자유를 가지고 있었다는 뜻이다." 

 

인민의 안전과 안락을 확보하는 대신 각 개인은 자신들의 자유를 국가에 양도하라는 홉스의 주장에 들어맞는 조직이 있다. 중국공산당이다. 공산당은 분열되었던 중국을 재통합했으며 14억 인민들을 동원하여 역사상 유례가 없는 성취를 이루어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과 관련한 대부분의 기사는 부정적 뉘앙스를 풍긴다. 중국 관련 기사에 달린 댓글들은 더욱 심각하다. 한국만이 아니라 일본과 서구국가에서도 이런 현상은 비슷하다. 중국에 대한 거짓 기사도 넘친다. '중국 혐오' 기사들이 의도적으로 날조·유통되는 실태에 대해서 <글로벌리서치(global research)>와 같은 대안독립언론이 파헤치지만, 눈여겨보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 절대다수의 지식인들이 서구 주류언론의 자장 안에 포섭되어 있다. 그래서 서구 언론이 주도적으로 발산하는 반(反)중국 메시지를 여과 없이 사실인 양 믿고 있다. 문제는 우리나라 지식인의 자세다. 중국 지식인 담론을 천착해 온 조경란 연세대 교수는 가라타니 고진의 <제국의 구조>를 혹평한다. 고진은 중국 역사에서 나타난 상호호혜에 근거한 제국적 질서를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그는 제국적 질서가 현대의 제국주의적 세계체제를 대체할 가능성에 대해서도 긍정적으로 보고 있다. 고진은 현대 중국의 핵심과제는 자유민주주의가 아니라 제국의 재구축이라고 단언한다. 이에 대해 조경란 교수는 자신들의 격차문제, 소수민족 문제, 부정부패 문제, 생태문제, 종교 문제 등 다원성과 공존의 문제도 해결하지 못한 중국이기에 다른 나라에 제국의 원리를 제공하겠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말한다. 조 교수는 중국체제를 냉소하고 있다. 중국에 비교해 미국은 더 나은가? 미국의 불평등한 격차는? 미국판 소수민족인 흑인문제는? 기업특혜지원으로 나타나는 부정부패의 수준은? 생태 문제의 핵심 의제인 파리기후 협약을 탈퇴한 것도 미국이었다. 종교의 자유만이 예외이지만, 터키 에르도안 정부에 대한 쿠데타 지원행위로 외교 문제로까지 비화된 미국인이 목사였던 점을 상기하면 외부로부터 유입되는 종교가 그다지 종교적이지 못함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중국의 경제에 대해서는 과도하게 두려워하고 사회 문화에 대해서는 지나치게 얕잡아본다. 14억 인민을 결집시켜 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중국 동포들을 차별하는 곳은 정작 중국이 아니라 한국이다. 조선족 동포들이 반한감정을 가지고 자식들을 일본으로 보내려는 이유다. 소수자에 대한 차별과 억압의 강도는 한 사회의 도덕적 수준과 연결된다. 조직 문화도 다르다. 조직은 사회의 축소판이다. 조직을 보면 사회를 짐작할 수 있다. 중국 군대에서 구타와 같은 가혹행위가 거의 없다는 것을 필자도 작년에서야 알았다. '군대에서 구타가 대수야'라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놓치는 것이 있다. 군대는 한 사회에서 가장 폭력적인 집단으로서 사회적 폭력성의 가늠자가 된다. 한국 기업의 억압적인 문화도 군대 문화로부터 차용되었다. 중국기업에서 일하는 한국인들 중에는 조직문화의 경우, 중국이 더 민주적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자유민주주의적 편견을 버리고 바라보면, 중국은 새롭게 보이기 시작한다. 우리는 민주정을 예찬한 아테네를 따르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 지식인의 절대다수가 아테네의 후예이다. 그러나 홉스는 다른 이야기를 전한다. "인간은 자유라는 그럴듯한 이름에 기만당하기 쉽고, 식별능력의 결여로 인하여 저 공공(公共)의 권리인 자유를 사적 상속권이나 생득권인 것처럼 생각한다." "이들 그리스·라틴의 저술가들을 읽음으로써 사람들은 어려서부터 자유라는 그릇된 이름 아래 걸핏하면 소요를 일으키고, 주권자의 행위를 함부로 규제하고, 그다음에는 많은 피를 흘리면서 그 규제자들을 또다시 규제하는 습관을 갖게 되었다." 홉스는 자유에 대한 잘못된 기대와 학설이 불필요한 사회적 분쟁을 초래한다고 역설하고 있다. 자유민주주의를 추종하지 않으면서 전체 인민의 생활 향상을 도모하는 중국 공산당은 이런 의미에서 온전히 현대적 리바이어던이다. 

 

대의제에 근거한 자유민주주의는 20세기에 실패를 거듭하고, 21세기에 들어서서도 간신히 작동하는 체제다. 학자들의 '아테네 예찬'으로 인류가 민주정 아래에서 오래 살았다고 착각하지만, 엄밀히 말해 자유민주주의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자본주의의 세계적 확산과 더불어 보편화된 체제다. 자유민주주의 같은 대의제 민주주의는 주변부로부터 이전되는 잉여가 충분할 때만 순항한다. 갈등은 경제적 잉여라는 이완제가 사회에 주입되는 동안만 잠잠하다. 잉여가 부족해지면 갈등과 분열이 시작된다. 대의제 민주주의의 이런 약점은 민주주의의 첫 출발인 아테네 시기부터 존재했다. 페리 앤더슨에 따르면, 페리클레스 시기 아테네의 노예 비율은 전체인구의 60%였다고 한다. 또한 그리스 문명이 가장 꽃핀 기원전 5세기와 4세기는 노예제가 가장 번성했던 시기였다고 한다. 아테네는 델로스 동맹을 통해 주변 국가를 착취했다. 아테네 민주주의는 착취가 만들어낸 여유로움이었던 것이다. 서구 선진국 자유민주주의의 존재 방식과 별반 다르지 않다. 

 

필자는 개인적으로는 중화인민공화국의 제국화는 쉽지 않을 것으로 판단한다. 가라타니 고진이나 왕후이가 과거 역사 속 중국으로부터 평화적 제국을 도출하려는 것은 무리수라고 본다. 아프리카를 포함한 제3세계에 대한 지속적 지원과 연대를 고려하면, 중국에서 평화적 제국을 기대하려는 것도 이해된다. 그러나 동아시아에서 중국의 평화제국이 가능했던 것은 고진, 왕후이 등의 생각처럼 제국적 질서 덕분이라기보다는 동아시아에서의 중국의 비대칭적 규모에 있었다고 말하는 편이 더욱 정확할 것이다. 만약 유럽에 독일 프랑스 스페인 영국을 합쳐 놓은 규모의 국가가 자리하고 있었다면 마찬가지로 평화의 제국으로 기능했을 가능성이 높다. 주변국에 비교해 압도적 크기와 힘을 가졌기에 주변국은 도전을 멈칫하고 중국은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 

 

공산당 일당독재, 당·국(黨國)체제, 인민민주주의로 대변되는 중국식 민주주의에는 다른 함정이 내재되어 있다. 중국식 민주주의는 한번 수립되고 나면 국민들의 투표행위에 의해서 절대로 바뀌지 않는다. 이봉철 한남대 교수는 논문 '사회계약이론의 난제와 그 해결모색: 실종된 '사회질서' 탐색·복구를 통해서'(2010)에서 홉스 사회계약론의 취약점을 지적한다. 이봉철 교수는 홉스 사회계약론은 필연적으로 사회적 계약행위의 실재성에 대한 시비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고 한다. 가상의 사회를 설정한 후 사회계약이 체결되었다고 강변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사회계약이 실제로 구성원들의 자율적 동의에 기초한 것인지를 확인하자는 것이 사회계약론의 난제 중의 하나인 '확인 문제'다. 그러면 국민투표를 통해서 확인하면 될까? 그럴 경우 또 다른 난제 '정당성 문제'가 발생한다. 다수결투표에서 소수의견의 목소리는 필연적으로 억압될 수밖에 없다. 대표되지 않는 사람들의 의견을 무시하고 사회계약을 강행하는 것이 정당한가를 묻는 것이 정당성 문제다.

 

 확인 문제와 정당성 문제가 걸림돌로 작용하기 때문에 보통의 국가는 식민지배로부터 독립하고서도 대의제에 기초한 자유민주주의를 채택한다. 자유민주주의가 더 낫다기보다는 대안이 없어서라고 말하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하지만 자유민주주의는 자본주의와 결합되면서 갈등을 심화시키는 경향이 있다. 자유민주주의는 이중적이다. 한편으로는 다당제를 수용함으로써 갈등을 증폭시킨다. 다른 한편으로는 그 갈등이 몇 개의 주요 정당의 틀 안에서만 해소되도록 유도한다. 중국식 민주주의는 일당독재에 기초해 있어서 정부효율이란 측면에서 탁월하다. 그러나 일당 지배 민주주의의 경우 최초 정부의 수립이 관건이 된다. 결국 이런 정부 수립은 특수한 경우에만 가능하다. 즉, 민족해방 운동의 지도부로서 정당성 문제가 완전히 해결될 때뿐이다. 이런 의미에서 중국식 민주주의는 다른 나라에 참조 사항은 될지언정 벤치마킹의 대상이 되기는 어려울 것이다. 

 

중국의 정치체제가 세계에 던지는 화두의 유의미성은 평화제국에 있다기보다는 '자유민주주의 없는 번영'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자유민주주의만이 장기적으로 국민의 안락을 높일 수 있는 유일한 제도인가? 중국이 건재해 있는 한 '그렇다'고 쉽게 말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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