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장소] 피에르 노라의 <기억의 장소>
매체명 : 주간경향   게재일 : 2018-06-25   조회수 : 658

- 세월호 추모공원 결사반대한 안산 후보들


아, 다행히도 이번 6·13 지방 선거에서 세월호 추모 공원에 대해, 그 상처 입은 기억들에 대해, 참으로 고약하기 이를 데 없는 말들을 함부로 내뱉은 안산 지역의 보수야당 후보들은 대부분 낙선했다. 그나마 다행이다.
 
“우리 아이들이 이 나라를 바꿨다면서요. 장한 일한 아이들한테 겨우 200평도 못 내줘요?”
 
유경근 4·16 세월호 참사 유가족협의회 집행위원장의 토로다. 6·13 지방선거를 앞두고 경기 안산지역의 보수야당 출마자들이 ‘416 생명안전공원‘을 비하하는 발언을 하는가 하면 공약집에 버젓이 내세우기도 했기 때문이다. 추모공원을 ‘납골당’이라고 부르는가 하면 ‘집안에 강아지가 죽어도 마당에는 묻지 않는다’고 공약집에 써넣은 후보도 있었다.
 
어쩌다 말 실수를 한 게 아니라 아예 선거 공보물에 써넣는다는 것은 그 일그러진 생각을 강력하게 추진해보겠다는 의지의 표현 아닌가. 이혜경 바른미래당 안산시의원 후보가 그랬다. 강광주 자유한국당 안산시의원 후보는 “세월호 납골당 화랑유원지 결사반대!”라고 적었다. 보수정당의 시장 후보는 이보다는 조금은 ‘점잖은’ 표현이지만, 어쨌거나 세월호 추모공원 백지화를 공약했다. 화랑유원지 17만평 중 3.7%인 7000평 정도로 추모공원이 조성되고 그 중 200평 정도 남짓하게 봉안시설이 들어서는 작은 규모인데도 이들은 마치 엄청난 시설이 화랑유원지 일대를 장악할 것처럼 묘사했다.
 
‘베를린 홀로코스트 메모리얼’을 보라
기억 작업이란 이토록 힘겨운 일이다. 2017년 3월 23일 희망제작소가 경기도의 안산시, 독일의 프리드리히 에버트 재단과 함께 개최한 포럼 ‘기억의 조건’에서 팀 레너 전 베를린시 문화부 장관은 이렇게 말했다.
 
“베를린을 방문해본 분들은 아시겠지만, 박물관이 자리한 추모공원에는 수많은 회색 잿빛의 비석들이 줄지어 세워져 있습니다. 추모공원을 먼발치에서 바라보면 비석들 너머로 유리돔이 보입니다. 바로 연방하원 건물입니다. 왼쪽엔 브란덴부르크 문이, 앞쪽에는 나치 지도부가 사용한 건물이 있습니다. 오른쪽에는 아파트와 일반주택도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일상생활 한가운데 추모공간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나도 그곳을 가보았다. ‘베를린 홀로코스트 메모리얼’. 미국 건축가 피터 아이젠만이 설계하여 2005년에 완공한 곳. 얼핏 공동묘지처럼 보인다. 지금은 이렇게 수많은 관광객이 잠시 추모의 마음으로 찾아오고 베를린 시민들의 일상 요소로 자리 잡았지만, 그것이 조성될 때 전혀 논란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해냈다.
 
9·11 테러 이후 뉴욕의 그 참사 현장을 추모공간으로 만드는 작업도 쉽지 않았다. 그레고리 스미스사이먼이 쓴 <9·12-9·11 이후 뉴욕 엘리트들의 도시재개발 전쟁>을 보면 거대한 참사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인식하고 또한 표현하는 것에 대해 모든 사람들이 동일한 감정이나 의견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9·11 테러를 가장 가까이에서 겪은 배터리파크시티 주민의 일상을 분석하면서 스미스사이먼은 세계 최고 수준의 자본의 성채’에 거주하고 있는 엘리트 지역민들이 그러한 자부심이 파괴되었음에도 그들의 거주지를 인종적·계층적으로 구분하고 스스로를 수많은 시선으로부터 ‘고립’시키는 전략으로 자기 지역을 재건하려 했다고 말한다.
 
이들의 쇼핑몰과 근사한 식당과 고급 아파트는 바깥 세상과 ‘분리’되고 싶다는 욕망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심지어 재난이 발생한 뒤에도 이 재난이 자신들의 안전하고 부유한 거주지를 훼손한 것에 대해 반응하며 또한 그 이후 추모공간의 조성과정에서도, 역설적이게도 이 공간을 ‘자기 공간화’하여 일반 사람들과 그들의 공간을 분리하고자 했다. “배터리파크시티 주민은 배타성을 유지하기 위해 혐오시설을 전략적으로 유치하려 노력했다”고 스미스사이먼은 말한다. 그들은 일단 추모공간 건립에는 찬성하지만 규모와 가시성을 최소화할 것, 주민들의 평소 일상생활(특히 교통)에 지장을 주지 않을 것, 시각적 불편함을 없앨 것 등을 지속적으로 요구하고 또한 상당히 관철시켰다.
 
이런 사례에 비하면, 사실 우리의 경우는 무지막지한 일방통행에 가까웠다. 역사적 사건이나 그 참사 그리고 그에 따른 희생을 기억하기 위한 노력은 최근 20여년 안팎에서야 가능해진 일이다. 전쟁 중의 민간인 학살이나 독재정권 시기의 투쟁과정에서 발생한 비극에 대해 국가는 적극적이지 않았다. 방금 ‘20여년’이라고 했지만 그 중에서 이명박·박근혜 집권 시기는 빼야 한다. 그 정권은 그러한 작업을 중단시키고 축소시키고 해체시켰다.
 
국가가 기억을 독점하는 것, 그 기억의 장소를 국가가 정하고 그 재현물을 국가주의적인 기념비로 하는 것은 미적인 문제가 아니라 정치적이고 역사적인 문제다. 한국 사회에서 ‘기억’ 혹은 ‘기억 투쟁’을 국가가 거의 전적으로 도맡아 왔다. 우리의 대도시 곳곳에 서 있는 수많은 기념비와 추모비와 충혼탑과 위령비가 과연 제대로 기억하고 위로하고 탄식하고 생각하는 조형물인가, 국가는 또 우리는 기억해야만 하는 것을 제대로 기억하고 있는가.
 
프랑스의 수많은 상징과 기념물
단일 기억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양하고 상이한 복수의 기억이 존재한다. 누가 어떻게 기억을 지우는가 혹은 기억하는가 하는 문제 설정이 중요하다. 이 ‘망각/기억’은 사회적 차원에서 볼 때, 하나의 중요한 싸움이 된다. 누가, 어떤 것을, 어떻게, 왜 기억(망각)하는가의 문제는 민족, 국가, 계급, 권력, 젠더 등을 둘러싼 정치적 갈등과 맞물려 있다. 사회적 기억, 즉 집단 기억은 개인적 기억의 총합이나 단지 역사적 증거들의 집합이 아니며 사회적으로 배분 및 공유된 상징적 이미지에 의해 매개됨으로써 일정한 권력과 담론 작용, 그리고 다양한 주체들의 실천 등과 같은 개입에 의해 사회적으로 재구성된다.
 
이런 점에서, 피에르 노라의 기획 아래 10년에 걸쳐 120여명의 역사가가 참여해 완성한 대작 <기억의 장소>는 이 프로젝트의 완결 이후 더욱 활발해진 논쟁과 비판을 낳았다는 점까지 포함하여 여전히 펼쳐볼 만한 책이다.

프랑스 공화국의 수많은 상징들, 기념물과 영웅들, 삼색기, 베르사유, 자전거 일주 경기, 루브르, 잔다르크 등이 어떤 ‘기억 생산과 투쟁’을 거쳐 오늘에 이르렀는가를 읽다 보면, 지금 우리가 한국적이라고 부르는 것, 혹은 현대사의 사건과 문화 현상들, 그리고 학살이나 참사 및 그 비극 이후의 사건화·기억화 과정들이 공백으로 남아있음을 알게 된다. 그 공백은 텅 빈 것이 아니라, 수많은 상처와 그을린 말들의 파편들이 어수선하게 흩어져 있는 역사적 기억의 공백이다. 피에르 노라는 이 대작의 ‘한국어판 머리말’에서 이렇게 말한다.
 
“어떤 나라는 공산주의 체제에서 빠져나왔고, 어떤 나라는 식민주의 지배를 벗어났습니다. 거의 모든 나라들이 제2차 세계대전의 여파를 겪었으며 현대 산업경제의 거친 파도에 휩쓸렸습니다. 변화의 순간을 경험한 모든 나라들이 저마다의 고유한 역사와 전통에 따라 과거를 새롭게 보고자 합니다. 이제 기억의 도래는 범세계적 현상이 되었습니다.
 
물론 <기억의 장소>는 프랑스의 문화와 프랑스의 정체성을 보듬는 작업입니다. 하지만 프랑스와는 다른 역사와 문화전통을 지닌 나라들에서도 프랑스판 <기억의 장소>를 모델로 삼아 자기 고유의 ‘기억의 장소’를 탐색할 수 있습니다. 대한민국은 한국인의 ‘기억의 장소’를 필요로 합니다.”
 
아, 다행히도 이번 6·13 지방선거에서 세월호 추모공원에 대해, 그 상처 입은 기억들에 대해, 참으로 고약하기 이를 데 없는 말들을 함부로 내뱉은 안산지역의 보수야당 후보들은 대부분 낙선했다. 그나마 다행이다.
 
첨부파일 기억의 장소_앞표지.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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