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곡된 스튜어드십 코드와 국민연금의 진로] “제사보다 젯밥” 국민연금의 스튜어드십 코드
매체명 : 중앙일보   게재일 : 2018-07-26   조회수 : 542

정부는 이달 말 열리는 기금운용위원회에서 국민연금에 스튜어드십 코드(Stewardship Code)를 도입하겠다는 방침을 거의 확정하고 지난 주초에 공청회를 열었다. 원래 올 하반기 중 도입 여부를 결정하겠다던 것을 7월 말로 최대한 앞당기고 결정을 불과 열흘가량 앞두고 공청회라는 요식행위를 하는 것도 의심스러운 일이지만, 스튜어드십 코드가 도입되면 연금가입자들에게 과연 무엇이 좋아지는지 알아들을 만한 설명을 내놓지 못하는 것이 가장 치명적 문제다.

 

연금가입자들이 지금 가장 불안하게 생각하는 것은 노후자금을 제대로 쓸 수 있도록 기금이 잘 운용될지 여부다. 능력 있는 운용역들이 계속 이탈하고 1년 이상 기금운용본부장의 공석 상태가 지속하는 데다, 본부장 인선에 청와대가 개입하는 등의 잡음이 나오면서 기금운용에 대해 걱정스러운 일들만 벌어지고 있다. 스튜어드십 코드는 이 걱정에 대해 아무런 답을 주지 못한다. 오히려 정부나 이해관계자들이 ‘제사보다 젯밥’을 보고 기금운용에 개입할 길을 열어주면서 심각한 걱정을 더해주는 것일 뿐이다.

 

정부는 스튜어드십 코드를 투자 대상 기업에 영향력을 행사해서 중장기 투자수익률을 높이고, 따라서 연금가입자들에게 도움이 되는 글로벌한 ‘자율규제’라고 포장한다. 그러나 여러 단계에 걸쳐 논리의 비약과 사실의 왜곡이 숨어 있다.

 

첫째, 국민연금은 가입자들의 집사(스튜어드)다. 가입자들이 집사에게 원하는 것은 맡긴 돈을 잘 굴려주는 것이다. 현재 그 돈에서 국내 주식이 차지하는 비중은 18%가량에 불과하다. 주식에서도 대부분은 사고파는 것, 즉 거래(trading)를 통해 차익을 얻는 것이다. 주식을 계속 들고 있으면서 기업에 영향력을 행사해서 주가를 올릴 수 있는 여지는 주식에서 극히 일부분이고, 전체 운용자산과 비해서는 쥐꼬리만 한 규모다. 그런데도 스튜어드십 코드 전도사들은 이것이 전체 수익에 굉장히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듯이 침소봉대(針小棒大)한다. 국민연금을 가입자의 집사에서 기업을 관리하는 집사로 슬쩍 환치(換置)하는 것이다.

 

둘째, 그 쥐꼬리만 한 부분조차도 연금이 기업에 영향력을 행사해서 중장기 투자수익률을 과연 높일 수 있는지 아무런 실증이 없다. 기관투자자 행동주의가 1980년대 미국에서 시작된 지 30여년이 흘렀지만 자사주매입·배당 등 주주 환원이 늘어나면서 단기적으로 기업 주가가 높아진 사례는 있지만 중장기적으로 주가가 높아졌다는 증거는 없다. 오히려 기업 성장 잠재력을 갉아먹고, 경제 전체적으로 고용 불안과 분배 악화라는 부정적 결과가 더 뚜렷하게 나타난다. 미국에서는 ‘약탈적 가치착출’이 강하게 벌어졌다는 증거만 있을 뿐이다.

 

셋째, 영국과 미국에서 스튜어드십 코드 도입 과정을 살펴보면 정부의 직접 규제가 들어오는 것을 선제적으로 막기 위한 대안적 선택으로 민간기관들이 자율규제라고 내세운 것이었다. 그 내용이 정말 돈 맡긴 고객을 위한 것이라고 말하기도 어렵다. 집사로서 임무를 성실히 수행하고 있다고 시늉하는 ‘립서비스(lip service) 준칙’이라고 볼 측면이 훨씬 많다.

 

 넷째, 한국에서는 이것을 글로벌한 자율규제라면서 정부가 재벌 개혁수단으로 적극 동원하고 있다. 스튜어드십 코드는 문재인 대통령 후보 시절에 재벌 개혁 공약으로 들어가 있었고, 정부의 ‘2018년 경제운용방향’에 대기업 개혁을 통한 공정경제 실현 수단으로 못박혀 있다. 국민연금은 이미 이 방향에 맞춰 대기업에 대한 주주권을 적극 행사하겠다는 입장을 밝히고 있다.

 

스튜어드십 코드를 추진하는 사람들은 재벌 개혁이라는 목표를 위해 국민연금이 힘을 합쳐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것이 당사자들에게 아무리 고귀한 가치라 하더라도 연금가입자 입장에서 볼 때는 제사보다 젯밥에 관심 있는 행동이다. 연금가입자들은 투자수익률 높여달라는 제사를 지내고 있을 뿐, 국민연금이 공정위 업무에 동원되는데 동의한 바 없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국민연금이 정책수단으로 동원되면서 연금 운용에 혼선이 오고 수익률을 깎아 먹는다. 현재 630조원인 국민연금은 2040년쯤까지 최고 2500조원 규모로 급증한 뒤 인구구조 변화에 따라 급전직하로 줄어들 전망이다. 잘못될 경우 그 부담은 젊은 세대가 다 뒤집어쓴다. 정부가 정말 젊은이들의 미래를 생각한다면 국민연금이 제사를 잘 지내도록 여건을 만들어주는 데에 주력해야지, 젯밥을 “이것 내놔라, 저것 내놔라” 해서는 안 된다.

 

신장섭 싱가포르국립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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