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칼럼] '문화국가 지름길' 저작권법 개정
매체명 : 경향신문   게재일 : 2018-04-19   조회수 : 548

다가오는 23일은 세계책의날이다. 1995년 유네스코(유엔교육과학문화기구)가 위대한 작가 세르반테스와 셰익스피어가 1616년 같은 날 세상을 떠난 우연에 주목하여 정했다. 두 작가의 기일은 당시 스페인과 영국이 상이한 달력을 썼기 때문에 실제로는 다르다고 한다. 이 기념일의 정확한 명칭은 ‘세계 책과 저작권의 날’(World Day of Book and Copyright)이다. 그만큼 저작권은 저자의 창조적 산물인 책에 관한 핵심적 권리이다. 2016년 작가들의 국제 조직인 펜(PEN International)도 저작권 보호 선언을 발표했다. 그 전문(前文)은 “저자의 경제적 독립과 자율성은 표현의 자유에 핵심적이며, 그것은 다양한 목소리를 장려하고 다양한 목소리는 민주주의를 촉진한다”고 밝힌다. 오늘 우리의 현실에 비춰 옮기면 저작권 보호는 촛불시민혁명의 성공을 위해 긴요하다는 뜻이다.

 

물론 저작권의 적용범위는 책에 한정되지 않는다. 음악, 미술, 과학기술 등 창조적 인간활동의 모든 분야에 해당되며, 정보기술혁명의 시대에 책 역시 전자책 등 과거에 없던 다양한 매체와 형식을 아우르게 되며, 미처 상상하지 못한 새 쟁점들이 생겨나면서 신속한 정책적 대응을 요구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 저작권법이 시대를 앞서가기는커녕 1986년 전두환의 제5공화국 시절에 들어간 독소조항 때문에 혼란과 갈등을 부추긴다면 쉽게 믿을 수 있을까? 지난 3월13일 문화체육관광부 서울사무소 앞에서 수백명의 출판인은 ‘문화국가 건설을 위한 출판적폐청산 제1차 출판인대회’를 열었다. 이들의 으뜸가는 요구는 저작권법의 독소조항 62조 2항 개정이었다.

 

매우 복잡한 문제를 짧은 지면에 담기 어렵지만 핵심만 간추려 보자. 대학가에서 수업목적으로 “저작물의 일부분을 복제·배포·공연·전시 또는 공중송신”(저작권법 25조 2항)하는 것을 보상하기 위한 ‘수업목적보상금’ 제도 시행이 계속 미뤄지다 4년 전부터 대학들이 학생 1인당 연 1100~1300원을 납부하고 있다. 그런데 62조 2항에 따라 보상금 수혜 대상은 저자에 국한되고 출판사는 배제된다. 여기서 비롯되는 불합리한 결과를 두 가지만 따져보자.

 

첫째, 수업목적으로 행해지는 저작물의 복제나 전송은 저자뿐만 아니라 출판사에도 피해를 입힌다. 이대로 가면 저자를 발굴하고 도와가며 땀 흘려 책을 만든 출판사는 전혀 보상받지 못한다. 실제 경제적 피해는 저자보다 출판사가 더 심하며, 복제나 전송 기술의 고도화에 따라 출판산업의 기반 자체가 붕괴될 수 있다. 결국 이 독소조항은 책을 사랑하는 시민과 독서운동에 힘쓰는 이들, 각급 도서관, 서점과 인쇄업의 광범위한 피해를 초래하며 사회 전체의 지적 활력을 망가뜨리게 되어 있다.

 

둘째, 문체부가 수업목적보상금 수령단체로 지정한 한국복제전송저작권협회(이하 복전협)는 저자들에게 보상금을 제대로 분배하지 못하고 있다. 복전협은 신문 공고 등 나름의 방식으로 저자의 보상금 신청을 받고 있지만, 그 운영이 투명하고 탄탄하다고 보기 어렵다. 현재 쌓여 있는 수십억원의 미분배 보상금이 큰 액수는 아니다. 그러나 점점 규모가 커질 보상금을 저자에게 분배할 공정하고 효율적인 방법을 제시하지 못하는 현실을 대체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현행법을 고집하는 측은 문제를 저작권자와 출판권자 사이의 밥그릇 싸움으로 몰아간다. 그러나 저자에게도 보상금을 제대로 배분하지 못한다는 사실은 이 갈등이 저작권자와 출판권자의 이해 다툼이 아니라 양쪽이 동시에 피해를 입는 문제임을 입증한다. 하지만 문체부와 복전협은 낡은 법조문에 매달리며 아직 5공화국 시절에 머물고 있다.

 

다행히 문체부가 지난 3월의 출판인대회 후 조금씩 사안의 중대함을 인식하는 듯하다. 민관의 격의 없는 대화를 통해 해결의 실마리가 잡힐 것으로 기대한다. 독소조항 개정만이 아니라 출판 선진국이 도입한 공공대출권, 사적복제보상금 제도 등도 공론화하여 저작권법 전체를 시대에 맞게 손질해야 한다. 아울러 지식과 가치를 창조하는 이들에게 합당한 보상이 돌아가도록 저작권에 관한 사회적 인식을 높이고 불합리한 관행을 일신해야 한다. 한국저작권보호원 등 관련 기구의 투명성과 민주성 강화도 빼놓을 수 없다. 우리는 지난 정권이 벌인 국정농단의 주무대가 문체부와 산하기관이었음을 아직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자유와 창의가 넘치는 문화국가’는 문재인 정부의 100대 국정과제에 나온다. 그러나 아쉽게도 출판산업을 문화 선진국들처럼 국가 기간산업으로 바라보는 장기적이고 구체적인 비전은 빠져 있다. 지금부터 민관이 함께 이 약점의 보완을 시작해야 한다. 마침 올해는 딱 25년 만에 민관이 함께하는 ‘책의 해’이다.

<김명환 서울대 교수·영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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