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1950년: 전쟁과 평화] 국민 버리고, 거짓말 하고...이승만에서 시작된 정치혐오
매체명 : 오마이뉴스   게재일 : 2018-04-17   조회수 : 618

1950년 6월 27일 새벽... 대통령, 서울을 탈출하다


1950년 6월 25일 이른 새벽, 6.25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그날 오전 비원에서 낚시를 즐기다가 신성모 국방장관으로부터 전방 전투상황 보고를 받았다. 신성모의 첫 보고는 "크게 걱정할 것 없다"였다고 한다. 6월 26일 새벽 이승만은 도쿄의 맥아더 사령부에 전화를 걸어 전쟁 발발 사실을 알리고 직접 통화를 요청했다. 부관이 맥아더 원수를 깨울 수 없다고 하자 "당신네들이 빨리 도와주지 않으면 여기에 있는 미국 시민들이 한 사람씩 죽어갈 터이니 장군을 잘 재우시오"라는 독설을 퍼부어 맥아더를 깨웠다.
 
6월 26일 경무대(현 청와대) 상공에는 벌써 북한 공군기가 나타나 이승만은 일제시대에 파놓았던 경무대 구내 방공호로 몸을 숨기지 않을 수 없었다. 그날 오후 3~4시께 이승만은 기밀서류를 챙긴 뒤 갑자기 서울 탈출을 위한 특별열차를 대기시키도록 명령했다. 그날 심야에 국무회의가 열렸으나 이승만은 참석하지 않았다. 6월 27일 새벽, 북진을 장담하던 신성모 국방장관이 피신을 권유하자 이승만은 새벽 3시 30분에 남행을 결정했다. 이승만의 피란 행렬에는 부인 프란체스카, 경무대 경찰서장 김장홍, 비서 황규면 그리고 경호 경관 1명 등 6명이었다. 이승만 일행을 태운 남행 열차는 새벽 4시 무렵 서울역을 출발했다.
     
그날 오전 11시 40분, 열차가 대구에 도착하자 이승만은 열차를 정지시키고 서울로부터 정보를 취합했다. 그는 그제야 너무 서둘러 서울을 떠났다고 판단했던 듯하다. 이승만은 열차를 다시 돌려 낮 12시 30분에 대구에서 북상해 오후 4시 30분 무렵에 대전에 도착했다. 대전에는 서울을 탈출한 3부 요인과 고위 관료들이 이미 상당수 도착해 있었다.
 
대전 도착 후 이승만은 현지에서 녹음 방송을 했다. 그 방송을 통해 자신은 마치 서울에 체류 중인 것처럼 위장해, 서울시민을 비롯한 전 국민들에게 안심하라고 연설했다. "정부는 대통령 이하 전원이 평상시와 같이 중앙청에서 집무하고, 국회도 수도 서울을 사수하기로 결정하였으며, 일선에서도 충용 무쌍한 우리 국군이 한결같이 싸워서 오늘 아침 의정부를 탈환하고, 물러가는 적을 추격 중입니다. 국민 여러분은 군과 정부를 신뢰하고, 조금도 동요함이 없기를 바라는 바입니다. 나 리승만은…."
 
목포로 간 이승만 그리고 19시간 항해해 부산으로
 
이 녹음 방송은 6월 27일 밤 10시에 시작돼 서울 중앙방송을 통해 수 차례 되풀이 됐다. 이 방송을 들은 서울시민들 중에는 이 대통령이 서울 경무대에 머물고 있는 줄 알고 피란길을 되돌려 집으로 돌아간 이도 있었다. 이 녹음 방송은 인민군이 서울에 진주한 뒤에도 앵무새처럼 계속 흘러나왔다. 전쟁 발발 66시간 만에 나온 대한민국 최고지도자의 첫 육성은 국민을 기만하는 내용이었다. 결국 수많은 서울시민을 죽음과 고통으로 몰아넣은 요인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이승만은 1950년 7월 1일 새벽 3시, 소수의 경호요원 및 비서만 대동한 채 승용차를 타고 비밀리에 부산으로 가고자 대전을 빠져나갔다. 그러나 그의 행로는 대전 → 대구 → 부산으로 이어지는 통상적인 통로가 아니었다. 이승만 일행은 전북 이리까지는 승용차로 이동했다. 거기서부터는 폭우로 도로상황이 안 좋아져 열차로 이동하고자 했다.
 
이리역에서 8시간을 기다린 끝에 3등 객차를 두 칸 단 기관차를 겨우 구했다. 그 열차는 폭우를 뚫고 그날 오후 2시 목포에 도착했다. 그런 다음 그날 오후 4시, 이승만 일행은 비로소 소해정(掃海艇)을 타고 목포항을 출발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19시간 동안 남해안을 항해한 끝에 7월 2일 오전 11시에 부산에 닿았다. 
이승만은 부산에 도착해 1주일도 머물지 않은 채, 7월 9일 다시 대구로 올라갔다. 7월 10일 이승만과 무초 미 대사의 회합에서 당분간 대구에 머문다고 합의했다.
수많은 대한민국 국민들은 정부를 불신하거나 정치지도자의 말을 신뢰하지 않는다. 그 시발점은 한국전쟁 발발 후 국민을 버린 채 자기만 도주하기에 급급했던 이승만의 구차한 피란 행차에서 비롯됐다.
 
"정(政)은 정(正)이다"
 
서울 수복 후 일반 시민들은 자기들을 버리고 떠난 정부로부터 적 치하 3개월 동안의 부역, 친공, 북한 협력 등 혐의로 가혹한 처벌받거나 처형을 당했다. 그런 이들이 많았다. 이 수난을 겪은 이후 시민들은 더더욱 정부나 정치인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았다. 심지어 정치지도자의 말을 역으로 이해하는 이도 많았다. 정치지도자가 대선에 출마하지 않는다면 출마를 하는 것으로, 개헌하지 않는다면 개헌을 하는 걸로 풀이했다. 사실 이런 풍토는 정치인 스스로가 조성한 바 크다. 시민들이 정부나 정치지도자의 말을 믿지 않는 것은 비극이다. 정부나 정치지도자는 이 점을 각골명심해야 할 것이다. 일찍이 공자는 "정(政)은 정(正)이다"라고, 정치의 근본은 정직에 있다고 설파한 바 있다.
 

 

첨부파일 한국 1950 전쟁과 평화_앞표지.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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