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해방] '생명의 해방을'을 읽고서
매체명 : 경향신문   게재일 : 2018-03-26   조회수 : 651

나는 지난 3주 연달아서 같은 병원의 장례식장에 계속 가야 했다. 사회적으론 ‘미투(MeToo)’ 운동이 한창인데, 인격을 신뢰했던 가까운 이들이 가해자로 폭로되는 상황에서는 주관적인 충격이 너무 컸다. 죽음과 몰락의 비보가 거듭되니까 머리가 띵했다. 한번도 충격으로 쓰러져 본 적은 없었는데,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 월요일 이른 아침 시간에는 화장터에도 갔다. 살아서의 갈등과 이별, 죽음으로 차단벽을 치는 관계의 단절을 어떻게 받아들여 내면화하고 삶으로 그 의미를 되돌려야 하는가 하는 문제는 사는 데 제일 근본적인 것이면서도 항상 쉽지 않은 숙제로 주어지는 것 같다.


철학자 앨프리드 노스 화이트헤드(1861~1947)는 생명체에 세 가지 강한 집착이 있다고 했다. 살고자 하는 집착, 잘 살고자 하는 집착, 보다 나은 삶을 살고자 하는 집착이 그것이다. 생명이 하는 일은 살아있기를 힘쓰고, 살되 만족스러운 방식으로 살고자 하며, 그러한 만족의 증대를 꾀한다는 것이다. 생명은 살고자 하는 강한 충동과 밀접히 연관돼 있다고 한다. 그런데 이 충동을 저버린 죽음은 더 나은 삶을 살기가 어렵다는 자존적 판단이거나, 좌절의 충동이 더 강력하게 작용할 때일 것이다. 개인의 삶이나, 사람들이 모여 강물처럼 흐름을 이루는 사회적 삶의 현상들은 살고자 하며 더 나은 삶을 추구하는 생명의 충동에서 뿌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숙제를 잘 풀기 위해서는 생명이 무엇인가를 잘 이해하는 데에서 첫걸음을 시작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된다.
 
마침 한신대 종교와과학센터의 포스트휴먼포럼에서 월례 세미나에 참여해 <생명의 해방(The Liberation of Life)>(존 캅 외 1 공저)을 같이 읽자는 연락이 왔다. <생명의 해방>은 신학자와 과학자의 공동노력에 의해 탄생한 저서인데 화이트헤드의 철학에 바탕을 두고 있다. 화이트헤드는 현대에 와서 거대체계를 제시한 유일한 철학자로 알려져 있다.
 
그는 “유럽철학은 플라톤의 주석으로 이어져왔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현대 이전의 철학이 실재(Reality)를 실체(substance)로 파악하는 그리스철학의 기조를 유지해왔다는 점에서 다를 바 없다는 선언이었다. 이에 반해 현대물리학을 받아들인 그는 실재는 과정(Progress)이라고 해석했다. 실재는 사건들로 구성되고 사건의 속성은 주체성과 경험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생명의 해방>에서는 주체와 경험을 바탕으로 해서 생명의 생태학적 모델을 제시한다. 이 방법론의 커다란 특징은 인간과 사회를 더 넓은 범주의 존재로부터 출발해서 설명하려고 한다는 점이다.

인간뿐 아니라 모든 생명체는 자신의 세계를 경험하는 주체이다. 이 경험이라는 것은 다른 존재를 포함한 환경과의 적응과정에서 반응하는 것이기에, <생명의 해방>에서 추구하는 생명의 모델은 생태학적이다. 저자들은 ‘해방’이라는 말을 기존의 이론들로부터 속박돼 있는 생명의 개념을 해방시키는 것은 물론 ‘인간이든 비인간이든 살아있는 피조물을 조작하고 관리하던 것에서부터 생명을 온전히 존중하는 것으로의 변화’를 말하기 위해서 사용했다.

사실 이와 같이 인간이 아닌 생명의 고유성-그 주체성과 경험-도 존중하는 사고는 동물보호 등의 흐름들을 통해 이제 우리에게도 꽤 익숙한 문화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의 세계관과 체계가 대체로 인간만이 주체이며 다른 존재는 객체라는 잘못된 근대의 가치관을 바꾸지 않거나, 그 가치관에 입각한 제도와 문화를 존속시키는 데에 있다. 그것은 인간 내부에서도 주체와 객체의 이분법적인 사고로 계속 갈라치기를 해서 인간 내 차별을 온존시킨다. <생명의 해방>은 “만물은 그 자신을 위해 대우받아야 마땅한 방식으로 취급될 권리가 있다”고 언급한다. 그리해서 인간을 포함한 존재는 경험하는 주체로서 서로 주체로서 만나는 관계의 공동체를 이루며, 서로 경험되는 존재로서 객체이기도 한, 주체이면서 객체인 공동체를 이룬다. 이것이 우주, 좁게는 지구 안 생명계의 실상이다. 인간이 아닌 생명체들도 고유의 주체성을 인정받되, 그러면 이 현존하는 상호살생의 먹이사슬구조를 어찌 해결할 수 있을까.
 
이 책은 주체의 경험으로 생명을 이해하되, 새로운 해석틀로서 ‘경험의 풍부성’을 차이의 기준으로 제시한다. 이 경험의 풍부성이라는 것은 “다듬어지지 않은 개념이다…. 그러나 가장 조야한 형태에서조차 그것은 우리에게 상당히 실제적인 지침을 제공한다”고 설명된다. 극단적으로 인간의 복잡화한 삶의 경험과 물고기의 경험이 다르다는 것이고, 경험의 풍부성에 합당한 준거틀을 만들어보자는 제안이다.

이 책의 중요한 지점은 인간과 다른 존재들의 연속성에 주목해 존중의 가치로 포괄하는 데 있다. 이것은 현대 우주론과 과학의 성과-발생과 진화에서의 연속성-를 반영하는 현실적 결과이기도 하다. 그러면서 한편 ‘경험의 풍부성’으로 차이를 식별하려고 하는 점에서 많은 고려와 토론의 여지를 남긴다. 어찌 보면 우리가 사회라고 믿는 실체도 해석과 합의의 결과물로서 계속 변화해가는 것이기에, 실재 안에서 인간사회를 적절하게 유지하기 위해서는 생명에 대한 새로운 접근과 해석이 필요하다는 데에 공감하게 된다. 한편 이 책에서 가장 논쟁적인 지점은 인간을 다른 존재와 마찬가지로 주체이면서 객체로 파악했다는 데에 있는 것 같다. 이것은 인간존엄이라는 일차적인 절대가치 외에 오로지 부수적인 차원에서의 도구적 가치를 인정하는 것이다.

인간과 다른 존재의 질적 차이는 언어에 있다고 생각된다. 만일 인간이 아닌 존재들이 침묵을 깨뜨릴 수 있는 언어를 갖고 있다면 그들의 ‘미투’는 상상을 초월하는 힘으로 인간사회를 삼켜버릴 것이다. 생태학적 담론들을 접하다 보면, 논리에서 타당하다는 데에 충분히 공감하면서도 인간세상에 사는 존재인 ‘나’의 삶이 전 지구적 차원에서 바라보면 착취와 가혹한 생명억압에 동참하고 있는 것이라는 사실에 직면해서 비애감을 느끼게 된다.
 

생명의 해방.jpg

 

첨부파일 생명의 해방.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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