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두만강] 탈북 예술가들, 그들은 아직도 死線을 넘나든다
매체명 : 주간조선   게재일 : 2018-02-05   조회수 : 703

2005년 탈북해 한국에 들어온 김정애(51)씨는 지금껏 여러 직장에서 가명을 써왔다. 혹시나 있을지 모를 신변 위협 때문이었다. 그가 이끄는 탈북문인단체 ‘국제펜클럽 망명북한작가센터’(이하 ‘망명펜센터’)에 소속된 회원 작가들도 대개 필명을 사용했다. 회원들의 나이, 고향 등 신상정보도 감췄다. 망명펜센터 측의 허락 없이는 외부에서 회원들과 개별적으로 접촉하거나 주소지·연락처를 받기도 어려웠다. 기자 역시 망명펜센터의 이사장으로 재직 중인 김씨를 통해서야 탈북 작가들을 만날 수 있었다.
   

“사실상 저희도 직간접적으로 위협을 느끼죠. 저를 비롯해 탈북 작가들이 필명을 써온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에요. 북한에는 연좌제가 있어서 가족들을 보호해야 하니까요. 망명펜센터가 설립 초기 국제펜클럽에 가입한다고 하니까 북한의 ‘우리민족끼리’에서 ‘조국을 탈출한 쓰레기들 용서치 않겠다’고 했어요. 최근에도 대놓고 센터 회원들을 거명하진 않아도 ‘탈북자들이 국제무대에 나가서 이러쿵저러쿵한다’고 북에서 주시하고 있어요.”

 

함경북도 청진에서 태어난 김씨는 작가의 꿈을 이루기 위해 탈북했다. 북한에서 5년간 작가양성 과정을 수료했지만 정식 작가로 활동하는 건 꿈도 못 꿨다. 자신만의 개성이 담긴 작품을 발표해도 수령 찬양이나 체제 미화가 아니면 북에선 통과하기가 힘들었기 때문이다. 탈북 후 2014년 한국소설가협회에 ‘밥’이라는 단편소설이 당선되면서 1호 등단 탈북 작가가 됐다. 김씨의 소설 ‘밥’은 지독한 굶주림을 견디다 못해 딸과 함께 탈북한 주인공이 북에 남은 남편에게 탈북을 권유하는 내용을 그린 작품이다. 김씨는 “우리 탈북 문인들이 북한의 실상을 다루는 게 통일의 과녁을 명중할 수 있는 길”이라고 했다.

 

칼 꽂힌 쥐와 피 묻은 도끼

탈북 작가로 활동한다는 건 목숨을 거는 일이다. 당장의 현실에서 가시적인 위험은 없다고 해도, 이미 그들에게는 탈북 과정 자체가 자유를 위해 사선(死線)을 넘은 탈주였다. 게다가 남한에 와서는 북한 체제의 실상과 인권 유린의 참상을 고발하는 작품을 쓰는 상황이다. 북한의 위협에다 작품을 정치적으로 해석하는 반대파들의 질시까지 받아내야 한다. 어찌 불안감과 두려움이 없을까.

‘얼굴 없는 탈북 화가’ 선무(線無)는 조선일보 1월 13일자 인터뷰에서 “남한에 들어와 5년 동안은 매일 북한에 가 있는 꿈을 꿨다”며 “밤마다 김일성·김정일에게 쫓긴다. 눈 뜨면 한숨이 나온다”고 말하기도 했다.

 

특히 왕성한 대외활동으로 이름을 떨칠수록 북한의 ‘요시찰’ 대상으로 찍혀 공격을 받는다. 김씨의 증언이다. “대내외적으로 유명해진 작가들은 발신자 미상의 협박 전화를 받기도 했다. 대북 방송국을 운영하는 본 센터의 모 시인은 과거 피 묻은 도끼, 죽은 쥐에다 칼을 꽂아서 보낸 ‘협박용 우편물’을 받았다.”

 

실제 모 화가는 기자와의 만남을 알 수 없는 이유로 정중히 고사했고, 어렵게 구한 탈북 작가의 연락처가 착신금지된 경우도 있었다. 기자가 접촉을 시도한 한 탈북 시인의 경우 현재 신변 문제로 외국에 체류 중이라고 했다.

 

그럼에도 탈북 작가들이 필명을 써가며 펜과 붓을 놓지 않는 이유는 자신들이 직접 경험한 북한의 모순된 현실을 폭로하기 위함이다. 본 센터의 초대 이사장을 지낸 장해성(73)씨는 소설 ‘두만강’(나남출판·2013)에서 북한 수용소의 인권 유린 실태를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구덩이에서 흙을 파내는 일, 등짐으로 날라오는 일, 그리고 그렇게 운반해온 흙에 썬 볏짚을 섞고 이개고 벽돌을 만드는 일, 어느 것 하나 기계로 하는 것이 없었다. 힘들었다. 부실한 식사로 버티기엔 너무 고되다. 오전에 한 번, 오후 한 번 10분씩 휴식시간이 있는데, 사람들은 그 시간이면 무엇이든 입에 넣을 것을 찾아 헤맸다. 다 마른 것이라 해도 냉이 같은 것은 최고급이었다. 메뚜기, 개구리, 무엇이든 입에 넣을 수 있는 것이면 다 먹었다.’

 

장씨는 1996년 탈북하기 전까지 북한 조선중앙TV에서 기자와 작가로 20년간 일했다. 당시 북한에서 인기 드라마였던 ‘천복이와 만길이’ 시리즈, 김일성을 찬양한 시나리오 ‘한 투사의 추억’ 등 선전용 극본을 썼다.

 

“최근 북한에서 작가라 하는 사람들이 ‘반디’처럼 반체제 작품을 한두 권씩 깔고(감추고) 있다고 그래요. 언젠가 북한이 달라지기만 하면 발표를 하겠다면서 말이오. 내가 남한에서 쓴 책들도 북한 주민들에게 가서 널리 읽혔으면 좋겠소.”

 

선무와 마찬가지로 ‘얼굴 없는 작가’이자 재북(在北) 반체제작가인 반디는 소설 ‘고발’을 통해 북한의 인권 유린 문제를 지적한 바 있다. 2014년 첫 출간된 ‘고발’은 지난해 다산북스에서 다시 펴내 세계적 주목을 받았다. ‘고난의 행군’ 시절이던 1980~1990년대 가난과 죽음의 공포 속에서 허덕이는 북한 주민들의 생활고를 7편의 단편으로 묘파한 작품집이다. 지난 1월 18일에는 반디의 신작 시집 ‘붉은 세월’이 출간되기도 했다.

 

“北 실체 고발작, USB 담아 보내”

일각에서는 반디의 실존에 의문을 품기도 하지만, 기자가 만난 탈북 작가들은 한목소리로 반디의 소설은 ‘북한 작가가 쓴 글’이 맞다고 증언했다. 직접 북한 생활을 경험해 보지 않고서는 그만한 서사와 묘사가 나오기 어렵다는 뜻이었다. 다만 워낙 미스터리한 인물이기에 연령이나 현역 여부 등에 대해서는 탈북 작가들마다 의견이 달랐다.

 

재북 작가 반디의 용기 있는 창작이 주목받는 이유는 예술을 대하는 북한의 태도 때문이다. 장씨에 이어 2대 망명펜센터 이사장을 역임한 탈북 작가 이지명(65)씨 말에 따르면 북한에는 김일성·김정일 교시가 담긴 조선노동당 문예이론이 있다고 한다. 북한의 작가라면 취재보다 문예이론을 암기하다시피 공부해야 한다. 당의 교시를 따르는 조선작가동맹 중앙위원회와의 연계 없이는 작품을 발표·출간하지도 못한다. 정식 작가가 아닌 일반 주민의 창작물도, 심지어 초등학생 일기장도 검열 대상이 됐다. 당연히 지도부 풍자나 체제 비판 작품은 엄두도 못 냈다. 이씨는 “만에 하나 그런 걸 만들어서 공연이라도 한 날이면 구족(九族)을 멸족 당한다”고 했다.

 

이처럼 자유예술을 통제하는 북한 사회를 떠나 탈북 작가들은 ‘남한의 반디’ 역할을 하고 있다. 그 중심에 탈북 작가 장해성·이지명·김정애씨가 이끌어온 망명펜센터가 있다. 2012년 9월 경주에서 열린 제78차 국제펜클럽대회에서 정식 가입된 망명펜센터는 대표적인 탈북문인단체다. 현 단체의 고문을 맡고 있는 이길원 전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이사장이 당시 조직 결성을 주도했다. 지금도 국제한인문학회, 통일문학포럼 등 유관단체들과 교류하며 연간 문학지와 수필집을 출간·번역해 세계에 탈북 문학의 가치를 전하고 있다.

 

망명펜센터는 북한의 실체를 고발한 문학작품을 북한으로 유입시키는 활동도 했다. 김정애 이사장 말에 따르면 가끔씩 북한 고위 간부들이 남한으로 비밀리에 한국 영화와 예능프로그램을 요구한 적도 있다고 했다. KBS 예능프로 ‘1박2일’, 영화 ‘베테랑’ ‘치외법권’ 등을 원했다는 것이었다. 김 이사장의 표현대로 그들도 ‘어느 정도 먹고살 만하니까’ 외부, 특히 남한 문물이 궁금한 모양이었다. 그때마다 망명펜센터 측은 USB에 요청자료와 함께 탈북 작가들의 문학작품을 함께 담아서 들여보냈다고 했다.

 

망명펜센터 소속 탈북 작가들은 시·소설·수필 같은 본격문학에 더해 대북 방송용 라디오 드라마를 제작해 북한 체제의 실상을 폭로하기도 했다. 김 이사장의 말이다.

 

“2015년부터 2년 동안 미국 국무부의 지원을 받아서 대북 방송용 라디오 드라마를 약 100편 정도 만들었습니다. 그중 ‘북쪽에서 온 편지’라는 작품은 현 북한 간부들의 비리를 캐는 내용이었어요. 부정부패 사건을 극화(劇化)해서 대북 라디오 방송으로 내보냈습니다. 반응이 좋았어요. 그 방송을 듣고 탈북한 사람이 와서 ‘잘 들었다’고 소감을 전해주기도 했습니다.”

 

‘웹툰’으로 알린 북한 실상과 남한 정착기

탈북 문인들뿐만 아니라 미술 작가들도 각자 예술적 소신을 지키며 남한에서 활동 중이다. 그중 최성국(39)씨는 유명한 편에 속한다. 국내 유일의 탈북 웹툰작가이기 때문이다.

 

최씨는 북한 만화영화촬영소에서 외국 애니메이션을 제작했다. ‘고난의 행군’ 시기에도 매달 꾸준히 지급되는 급여에 설탕, 식용유, 소고기까지 배급받았다. 실적에 따라 1년마다 냉장고·세탁기·텔레비전 중 한 대를 얻기도 했다. 특별대우를 받았던 셈이었지만 머지않아 충격에 휩싸였다. 현격한 차이의 월급 수준 때문이었다. 최씨가 1달러를 받을 동안 그와 똑같이 일한 동료 외국인 직원들의 월급은 수천달러에 육박했다. 평양 주민이었던 최씨와 달리 외국인들은 본국에서 직접 월급을 받았기 때문이다.

 

회의감이 들어 그 길로 촬영소를 나온 최씨는 한동안 포토샵 기술을 이용한 사진 작업과 중고 컴퓨터 재조립 판매로 돈을 벌었다. 그러다 우연히 하드디스크에 담긴 한국 영화를 보게 됐고 이를 복사해서 판매했다. 북한 당국의 감시망에 걸려 3번이나 감옥에 갔다. 최씨는 수감생활을 하고 지방에 내려가 강제노역을 하면서 북한 사회의 실상을 알게 됐다.

 

“북한은 영원히 잘살 수가 없구나’라는 깨달음을 얻었죠. 북한은 주민들을 절대로 잘살게 안 합니다. 토끼 가죽 바쳐라, 돼지 길러 바쳐라, 송이버섯 바쳐라, 심지어 똥이랑 파리 잡은 것도 바쳐요. 주민의 90%를 못살게 배고프게 해서 정치에 관심 없고 무조건 충성하도록 만듭니다. 목숨만 살려주고 먹을 거만 주면 끝인 거예요. 나머지 10%는 평양, 선전용 세트장인 거죠.”

 

북한의 진실을 깨달은 최씨는 2010년 자유와 성공의 기회를 찾아 남한으로 왔다. 기자와 방송인을 거쳐 웹툰작가로 변신한 그는 ‘로동심문’ ‘고발’ 등의 작품으로 온라인상에서 인기를 끌었다. 특히 탈북자의 남한 정착기와 북한 주민들의 삶을 그린 ‘로동심문’은 지난해 포털사이트 연재 당시 평균 2만~3만건의 조회수를 올리며 탈북 독자들의 공감을 이끌어냈다.

 

그는 앞으로도 꾸준히 웹툰 창작을 통해 ‘남북의 문화공감’을 이끌어가고 싶다고 했다. 그 일환으로 최씨의 지인들은 그의 웹툰을 동영상으로 찍어 북한으로 보낸다고 한다. 최씨의 말이다.

 

“북한 주민들이 제 만화를 보면 북에서 횡행하는 인민재판도 피해자의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어요. 자신들의 삶과 북한 정권의 실상에 대해 성찰할 수 있게 되는 거죠. 대북 제재로 북한 정권의 거품이 다 빠져버렸어요. 배급을 못 주니까 공산주의에 심취된 사람들이 다 죽은 거예요. 그때부터 주민들이 ‘이대로 안 죽는다’ 하고 외국으로 터져나오게 됐어요. 한·미·일·중 물건이 밀수로 다 들어간 겁니다. 그 흐름 못 막습니다. 문화예술의 힘은 총포탄보다도 더 커요. 특히 한국 콘텐츠를 유입시키는 게 효과가 있어요. 같은 민족의 말과 영상이라 이해가 되고 공감이 되니까요.”

 

“기능공 아닌 화가로 ‘탈북 자화상’ 그린다”

“북한에서의 화가는 그냥 기능공이에요. 남이 땀 뻘뻘 흘릴 때 비 안 맞는 정도의 사람들이죠. 화가의 직업적 위치가 그 수준이었으니 북한에서는 그림 그려서 대학 간다는 생각을 못 했어요. 중국으로 장사를 다니면서 ‘나만의 삶을 살아보자’는 결심을 하고 탈북하게 됐습니다.”

 

평안남도 남포에서 출생한 탈북 화가 오성철(40)씨는 1994년부터 2002년까지 북한 조선인민경비대 1226군부대 선전선동부 직관원(直觀員)으로 복무했다. 북한의 직관원이란 눈으로 직접 볼 수 있는 벽보·그림·도표를 만드는 사람을 뜻한다. 오씨가 복무할 때만 해도 북한에서 프린트 기술은 거의 발전하지 못한 상태였다. 김일성 초상화부터 부대 연혁 도표에 과녁판까지 사람이 손수 쓰고 그려야 했다. 10년 가까이 복무할 동안 총 한 번 쏴 보지 못할 정도로 일손이 바빴다고 했다. 게다가 북한 당국에서 배급하는 공용 물감은 딱딱하고 색이 좋지 못했다. 직관원 개인이 인근 염료공장에 가서 몰래 쌀을 갖다 주고 사제 물감을 사서 그려야 할 정도로 지원이 열악했다.

 

군 복무를 마친 오씨는 3년간 북한 제염단과대학을 다녔다. 학비와 생계 문제로 중국을 오가며 장사도 했다. 그러던 차에 서른한 살이 되던 때부터 삶에 회의를 느꼈다. 미래를 어떻게 가꿔야 할지 고민을 시작하다가 결국 탈북을 결심했다. 2012년 남한으로 와서 진정한 화가로서의 제2의 인생을 시작했다.

 

오씨의 작품들은 직접적인 북한 풍자나 김씨 일가 패러디와는 거리가 멀다. 대신 자신이 남북한에서 생활하며 깨달은 인생의 화두와 철학을 담았다. 그것은 ‘먹고산다는 것’의 엄중함, 즉 생존의 문제였다. 북한에서는 공포정치로, 남한에서는 금전 문제로 ‘먹고살기 힘든’ 세상을 숟가락과 빨대를 통해 형상화했다. 오씨는 그림 속 빨대 뗏목을 타고 숟가락으로 노를 저으며 남쪽으로 내려가는 한 사공의 모습에 자신을 투영했다.

 

“모든 이념들을 다 파헤쳐 보면 마지막에는 결국 먹고사는 문제, 생존의 문제가 걸려 있어요. 그래서 숟가락은 먹는 도구지만 그 위에 무엇을 올려놓느냐에 따라서 세상을 다르게 볼 수 있어요. 자신만의 인생 가치관이 중요한 거죠.”

 

과거 한 케이블TV 예능프로그램에 출연해 김정은과 리설주를 풍자한 랩으로 유명세를 탄 강춘혁(33)씨도 탈북 화가 출신이다. 최근 강씨는 오씨와 합동으로 서울 은평구에 갤러리 ‘앤츠’ 개관을 준비 중이다. 함경북도 온성에서 출생한 강씨는 2001년 남한에 오면서부터 10년간 학업과 아르바이트를 병행했다. 음식 배달에 공사장 인부까지 안 해본 일이 없었다.

 

어렵게 번 돈으로 다시 붓을 잡았다. 중·고등학교 과정 검정고시를 통과하고 2012년 홍익대 회화과에 입학했다. 미대 학비는 출판사에서 동화책과 월간지 삽화를 그려서 마련했다. 2014년 ‘꽃제비 날다’라는 제목의 개인전을 열어 정식 화가로 첫발을 내디뎠다. 북한 주민의 고단한 삶을 그린 ‘회상’ 시리즈, 북한 정권의 민낯을 묘파한 ‘허상’, 탈북자의 정체성 혼란을 형상화한 ‘혼동, 혼돈’ 등이 대표작이다.

 

“혼동, 혼돈’이라는 작품의 원제목은 ‘정체성의 혼돈’이었어요. 일종의 자화상이죠. 저희 같은 탈북자들이 한국 땅에 와서 겪을 수밖에 없었던 혼돈의 감정과 복잡한 시선들을 투영했습니다. 이제부터는 제가 겪은 삶의 이야기들을 많이 그려낼 겁니다. 제 이야기가 곧 탈북한 분들 모두의 이야기고, 북한 주민들의 이야기도 되니까요.”

 

 

두만강.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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