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루몽] 홍학을 만든 팔할은?
매체명 : 경향신문   게재일 : 2018-01-21   조회수 : 687

대하소설을 제법 읽을 때가 있었다. 문순태, 이병주, 조정래의 소설들. 뿌듯함을 주고 먼 시간여행을 다녀온 느낌을 준 이들 소설에 얽힌 추억은 달콤하다. 삼십대 이후 바쁜 생활이 시작되면서 대하소설은 점점 일상과 멀어졌다. 읽고 싶은 목록은 많았지만 목록은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 그 목록의 가장 위에 있는 것이 <홍루몽>이다. 잡았다가 내려놓기가 몇 번인지 모른다.

 

청나라 강희-옹정-건륭 삼대에 걸쳐 한 귀족 가문의 성쇠를 다룬 <홍루몽>은 전 세계에 이를 연구하는 학자가 수천 명에 이를 정도로 대단한 소설이다. ‘홍학(紅學·redology)’이라는 별도의 학문 분야가 형성될 정도다. 마오쩌둥은 이 작품은 최소한 다섯 번은 읽어야 하며 <홍루몽>을 읽지 않으면 중국 봉건문화를 이해할 수 없다고 단정했고, 중국인들은 <홍루몽>을 만리장성과도 바꾸지 않는다고 한다. 작품성이나 보편성의 잣대로 보자면 <서유기> <삼국연의> <수호전> <금병매> 등 중국 사대기서보다 훨씬 윗길에 오른 작품이 바로 <홍루몽>이다.

 

최근 홍학에 얽힌 이야기를 좀 접하면서 다시 <홍루몽> 읽기에 도전하고 싶다는 고질병이 도지고 있다. ‘홍학’에 얽힌 이야기도 <홍루몽>만큼 흥미진진하다. 중국의 20세기는 ‘홍학의 시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신적인 면과 물질적인 면 모두에서 서양에 밀리고 짓밟힌 중국인의 자존심이 이 작품에 기대어 소생하기 시작했다. 세계에 하나의 ‘학’을 이룰 정도로 대단한 작가는 셰익스피어와 조설근뿐이라는 이야기가 나오기도 했다.

 

18세기 중반에 창작되었다고는 믿기 힘들 만큼 작품 속의 개성적 인물들, 시적 정취가 넘치는 청춘기 여성들의 세계, 고유명사의 중의적 구사로 획득한 역사 평론적 가치, 중국 문학에 등장한 온갖 문체로 묘사되는 귀족문화의 실상, 남성 중심 가부장 사회에서 유독 돋보이는 강한 여성 중심적 세계관 등은 홍루몽 월드의 서까래와 대들보 역할을 해주는 것들이다.

 

그런데 ‘홍학’의 열풍을 만든 건 이런 작품 내부적인 것에만 그치지 않는다. 대부분의 고전소설이 그렇듯 <홍루몽>도 판본이 매우 다양하다. 원작자가 80회본을 썼고, 그게 인기를 끌자 120회본으로 추후에 늘렸다는 게 대강의 얼개이고, 그 사이에 무수한 판본이 있다. 인쇄가 아니라 필사를 해서 작품이 유통되었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이에 관련된 온갖 추측과 문제제기가 ‘홍학’의 상당 부분을 이룬다. 그다음은 작가 문제다. 과연 <홍루몽>은 조설근이 쓴 것일까? 아직까지 이에 대해 누구도 확답하지 못하는 실정이다. 아버지 사마담의 구상을 아들 사마천이 이어받아 구현한 것이 <사기>인 것처럼, 중국 전통시대엔 작품 창작도 일종의 가업으로 이어진 경우가 드물지 않다. 그래서 <홍루몽> 또한 진짜 작가는 조설근의 아버지라느니, 작은아버지라느니 등의 이야기가 많다.

 

그러나 <홍루몽>이 모든 언론 매체의 표지를 장식하고, 대중의 가슴에 불을 지른 가장 결정적인 한 방은 이 작품이 보여준 반(反)만주족 의식이다. <홍루몽> 속의 반만 의식에 주목한 학자들을 ‘색은(索隱)파’라 부르는데 이는 작품에 ‘숨겨진(隱)’ 의미를 ‘색출(索)’해낸다는 의미다. 대개 등장인물 이름이나 장소, 건물의 명칭 등에서 작가가 청나라 만주족을 풍자하려는 목적으로 숨겨놓은 말장난을 찾아내는 방식이다. 그러나 어느 순간 이것이 지나쳐서 소설을 읽는 게 퍼즐을 푸는 일이 되어버렸고, 되는 대로 의미를 부여하는 견강부회가 난무했다. <홍루몽>에 대한 색은적 독법은 청나라가 망하기 전후로 가장 흥성했고 1940년대까지 유지됐지만 1950년대 이후로는 ‘역사고증파’와 ‘소설비평파’의 비판을 받고 대륙에서 사라졌다. 하지만 해외에서는 오히려 1960년대에 부활하기도 했다.

 

최근 ‘홍학’은 예전의 활력을 확연하게 잃고 말았다. <홍루몽>이 뛰어난 작품인 것은 맞지만 방대한 분량으로 인해 스토리의 흡인력 면에서 경쟁력이 약하니 ‘홍학’을 해본들 들어줄 독자가 자꾸 줄기 때문이다. ‘홍학’의 부흥을 이끌었던 판본 문제, 작가의 진위 문제, 숨겨진 의미를 색출해내는 탐정놀이가 이제 더 이상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민간에 묻혀 있는 새로운 판본이나, 조씨 가문의 사료 같은 것이 새롭게 나와야 다시 한번 불끈 흥분할 수 있는 계기가 될 텐데 말이다.

 

홍학의 미래는 불투명하지만, 그래도 개인적으로 올해는 <홍루몽> 완독에 성공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스러져가는 ‘홍학’, 스테디셀러가 되지 못하는 <홍루몽>에 대한 연민의 정을 기존의 열망에 추가하면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홍루몽세트.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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