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우] 한비자를 재해석한 역사 소설 <적우> 독후감
매체명 : 공감신문   게재일 : 2017-09-18   조회수 : 959

[공감신문]

진시황은 오늘날의 장기판에까지 남아서 전해지는 초한전쟁(楚漢戰爭)의 두 주역, 초 패왕 항우와 한 고조 유방의 롤 모델(role model)이었다. 중국의 역사는 진시황 이전과 이후로 나눌 수 있다고 할 정도로 진시황은 큰 획을 그었다. 오늘날 중국의 모습을 사실상 처음으로 완성했으며 중국인들의 의식이나 주변 국가의 왕조에 미친 영향은 거의 압도적이었다.

출생과 관련된 치욕적인 소문을 백인(百忍)하는 발군의 진왕 정(政)은 원대한 포부, 담대한 기백, 단호한 결단력과 뛰어난 직관력으로 강력한 중앙집권국가의 비전을 실현한 정치적 창업(創業)리더십의 표상이다. 덕치에 기반을 둔 왕도정치, 무력에 바탕을 둔 패도(覇道), 정도(正道)와 권도(權道)의 여부를 떠나 그는 출신을 초월해 각국의 숱한 인재를 포용하고 적재적소에 폭넓게 등용하는가 하면 전대미문의 대형 토목공사를 일으키고 문자· 도량형· 화폐의 통일 등을 통해 국부를 창출하고 민생을 안정시키는 국가운영의 굳건한 토대를 마련했다. 군웅할거(群雄割據)하는 전국칠웅(戰國七雄)의 난세 속에서 치열한 공방전을 벌인 진왕 정은 한· 조· 위· 초· 연· 제, 주변 6국을 차례로 멸망시키며 기원전 221년 천하통일을 선언하며 시황제에 오른다.
 
한비자, 이사, 조고 등 가혹한 법 집행을 통치철학의 금과옥조로 삼는 법가 계열의 실용주의적 지식인을 중용한 진시황은 이른바 분서갱유에 따른 폭군의 오명을 쓰기도 했다. 그러나 후일 강대한 통일제국 진나라의 멸망을 논한 전한시대의 천재문인 가의(賈誼)의 명문(名文) <과진론>에서는 분서갱유를 언급하지 않고 있다는 점 등에서 보듯이 후대에도 계속적으로 연구대상이 되어 열띤 논쟁을 남기는 거인이다.
아방궁의 호사(豪奢), 어이없는 불로초 소동, 후계자 양성과 위기관리 미흡, 수성(守成)의 실패 등 여러 논란에도 불구하고 진시황은 사실상 문무를 겸한 영명한 군주였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장이모우 감독의 영화 <영웅>에서도 보듯이, 각국의 숱한 협사· 자객들이 그의 목숨을 노리나 모두가 실패하거나 또는 스스로 포기한다. 그것은 하늘의 뜻과 백성의 대의를 위한다는 명분을 내세운다. 또 중원의 살진 사슴을 잡으려는 비범한 인물을 해(害)해서는 안 된다는 자각도 자연스럽게 일어났을 것이다.
진시황과 책사이자 지식인 한비(韓非)를 본격적으로 다룬 소설 《적우(敵友)》는 그 내일을 알 수 없는 살아있는 생물로 움직이는 정치와 사활을 건 비정한 권력의 현장에서 부침한 인간들의 영욕과 명암, 운명의 험난한 과정들을 고요하면서도 준엄하게 따진다.
 
작품은 춘추전국시대의 막바지, 천하통일이라는 대망을 꿈꾼 진왕 영정과 한비자, 대부호 여불위, 이사 등이 펼치는 경륜과 책략의 이면, 음모와 술수의 성공과 실패를 섬세하게 묘사한다. 어느 시대나 왕과 문무백관(文武百官)들은 언제나 함포고복의 태평성대를 바랐으며 아침 일찍부터 열심히 일한다는 조정(朝廷)에서는 충신과 양신들이 넘쳐났고 기회를 노리는 간신들은 항상 발호했다. 남면(南面)하는 왕들은 더 높은 곳에서 군림하고자 했고 난세를 헤쳐 나가는 신하들은 그 밑에서 눈치를 보고 견마지로를 외치며 자신들의 부귀영화와 이익을 강렬하게 추구했다. 사심에 가득 찬 이기적 출세주의자 이사는 말한다. “비천한 것보다 더한 부끄러움은 없고 곤궁한 것보다 더 슬픈 것은 없다” 어쨌든 언제나 성은은 망극했고 모든 것은 왕과 백성들의 홍복이었다고 믿던 시절이었다.
 
공자의 《춘추》에서 비롯된 전기 240년(B.C.722~481)이 춘추시대, 유향이 《전국책》에서 다룬 후기 260년(B.C.481~221)의 전국시대를 합해 춘추전국시대라고 부른다. BC 8세기~BC 3세기에 이르는 대변혁의 시기다. 이 기간은 장구한 중국사에서 지적(知的)으로나 정치적으로나 가장 빛나는 황금기의 하나다. 이 때부터 중국에서 문치무공(文治武功)의 꿈과 위용이 화려한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춘추전국시대에 제자백가(유가, 묵가, 도가, 법가, 병가, 음양가 등의 사상가)들은 치열한 논쟁을 벌였다. 중국의 지혜와 사상은 참으로 찬란한 개화를 했으며 종이책으로 영원히 남아 무궁무진한 매력의 원천이 되었다. 이것이 우리가 아는 백가쟁명(百家爭鳴), 백화제방(百花齊放)이다. 이것은 지금도 많은 학자나 논객들이 자유롭고 치열하게 논쟁하는 것을 이르는 말로 널리 쓰인다.
     
왕이 되지 못한 왕족, 결국 누군가에게 북면(北面)해야 하는 책을 읽고 쓰는 한비 공자가 갈 길은 하나였다. 당시 한비 공자의 재능이나 명성은 전국칠웅에 떨치고 있었다. 정진한 한비 공자가 치국평천하의 책략을 열정적으로 토하는 <고분>과 <오두>를 읽은 진왕 정은 “이 글을 쓴 자를 만날 수 있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말할 정도로 한비의 경륜과 식견을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
 
오매불망, 학수고대하던 진왕 정은 인근의 약소국 한나라에 한비 공자를 진나라로 보낼 것을 강요한다. 겉으로는 외교적인 의전과 상당한 예우가 보장된 인재 초빙이나 발탁으로 볼 수도 있으나, 당하는 입장에서는 사실상의 인재 유출이고 적국에 억류되는 인질의 처지가 아닐 수 없다. 오늘의 벗이 내일의 적이 되는 혼란과 분열의 춘추전국시대에 유행했던 합종연횡이라는 치열한 외교전의 일환이다.
 
 
왕과 참모의 나이 차이는 21세. 그러나 망년지교를 나눈 것으로 충분히 추정할 수 있다. 진언을 흔쾌히 허락하는 젊은 왕과 스승, 또는 벗으로 실제 어울린 기간은 불과 1년 정도다. 그 짧은 사이에 서로는 의기투합, 간담상조 하는 진정한 소통을 통해 경천동지하는 천지개벽을 위한 대대적인 기획과 로드맵을 완성하고 추진했다.
 
한비자는 순경(순자)이라는 위대한 스승 아래서 동문수학한 벗, 라이벌을 크게 의식한 이사(李斯)라는 당대의 냉혹한 재사로부터 질투, 선망, 애증이 교차하는 비열한 모함의 표적이 된다. 음해와 모략, 이간질, 악의와 참소는 중구삭금이라는 말처럼 금(金)도, 때로는 인간도 녹여버린다.
 
 
문약했던 고사(高士) 한비는 비통하게 울부짖는다. “아니다. 모두 나의 죄다...행동하지 못하고 죽간만 희롱한 죄, 알면서도 실행하지 못한 죄...내가 죽어 마땅한 죄는 땅과 하늘을 덮고도 남으리라.”
전제적 왕조시대, 권력과 정치의 세계는 내가 죽느냐, 내가 먼저 죽이느냐의 결단을 요구한다. 적자생존, 약육강식, 승자독식의 험난한 시대에 죽을 것인가, 살 것인가. 패배할 것인가, 승리할 것인가. 난세를 맞아 인간들은 살기 위해 끊임없이 각축했으나 끝내 강자는 살아남고 약자는 사라졌다.
 
 
길이 없거나, 도저히 어찌 할 수 없을 때는 처참하게 패배하는 것도, 때로는 죽는 것도 사는 것만큼이나 귀하고 아름답다. 특히 정치에서는 죽을 때를 찾아 제대로 죽는 것이 필요악이기도 하고 올바른 모습이기도 하다. 숙명적으로 조우한 어떤 절벽에서는 백척간두 진일보나 현애살수(懸崖撒手)도 가야 할 하나의 극적인 길이었을 것이다. 먼저 죽어간 한비자는 언제나 옳고, 벗이자 스승인 선각자의 죽음을 제물로 살아남은 왕과 신하들은 반드시 그릇된 것인가. 알 수 없는 일이다. 예나 지금이나 국가 간의 전쟁이나 크고 작은 싸움의 승패와 세상의 모든 영욕은 사람의 짓, 사람 탓에 따라 명멸한다. 이상주의자는 현실주의자에게 적이 되는가, 또는 친구가 되는가. 과연 우리는 누구를 탓할 수 있을 것인가.
 
비정한 정치와 권력의 정글에서 군주나 제왕의 신임과 총애를 다투는 관계에서는 영원한 동지도 영원한 적도 없는 것이다. 내세운 대의(大義)란 때로는 소아(小我)와 동전의 양면을 이루기도 하는 위선일 수가 있다. 욕망은 명분이라는 분칠을 통해 때로는 자신과 남을 동시에 속이기도 한다. 왕권의 신성함, 상하의 계급질서, 신상필벌을 누구보다도 엄격하고 냉정하게 구분했던 법가의 대가(大家)가 한비였다. 진시황과 이사는 한비를 이용했다. 그들은 충(忠)과 서(恕)라는 유가의 덕목 중 충성은 잘 알았으나 용서는 잘 몰랐다. 그래서 후대의 역사가, 정치학자로부터 그들은 사자의 용맹과 여우의 간지(奸智)로도 표현되는 냉혹한 마키아벨리스트라는 평가를 받는다. 권력은 부모형제 등 핏줄도 가리지 않는 법인데 벗이라고 또는 스승이라고 용서가 가능하겠는가. 권력의 향배와 이익, 처지에 따라 정의와 불의, 선악과 시시비비는 항상 엇갈리지만, 역사의 오래된 전통은 좋은 인간을 그나마 하나의 거울로서 살려내 왔다.
 
 
만리장성의 호방한 의지와 부민강국(富民强國)의 꿈, 부국강병의 이상을 추구하는 또 하나의 영웅시대를 그린 《적우》를 만남으로써 우리는 진시황제, 한비자, 여불위, 이사, 부소, 조고, 염파, 백기, 몽염, 왕전, 이목 등 난세를 돌파해나간 인간들의 진면목을 보는 행운을 누린다. <세난>과 <간축객서> 등의 명언들도 《적우》에서는 더욱 생생하게 부활하고 있다. 막강한 권력과 연약한 인간, 정치의 이상과 리더십의 현실, 군자와 소인들이 어울려 펼치는 재능과 출세의 계략, 가벼운 우정과 두려운 배신의 드라마가 파란만장한 파노라마처럼 펼쳐지고 행간을 흐르는 명상과 통찰은 독자에게 깊은 여운의 교훈을 남긴다. 님포마니아(nymphomania)였던 태후 조희와 물건이 길고(長) 믿을(信)만해 장신후(長信侯)의 벼슬을 누린 노애 간의 질펀한 정염(情炎)의 섹스 스캔들은 웃지 못 할 하나의 막간극이다.
 
 
 
중앙일보 논설위원이자 빼어난 등단작가가 재해석해 다시 쓴 고전적인 저작, 《적우》를 읽는 감동은 마치 높은 산의 정상에 서서 눈 아래 펼쳐진 세상을 보는 것처럼 걸림이 없고 호한하다. 《적우》는 수많은 《한비자》 버전의 결정판이다. 고전의 반열에 올라있는 《한비자》는 결코 마음 편하게 읽을 수 있는 쉬운 책이 아니다. 《한비자》는 피를 보아야 하는 일침견혈(一針見血), 촌철살인의 경지에 있다. 책은 군주의 도리, 신하의 길, 정치엘리트와 피치자, 임금과 백성을 흑백논리 이상의 이분법적으로 철저히 분리해 다룬다. 특히 치명적인 역린(逆鱗)에 대한 언급은 대표적인 사례의 하나로 지적할 수 있다. 다수를 이루는 흙수저들에게 어쩌면 왕후장상영유종호(王侯將相寧有種乎)의 발분을 포기하라는 매서운 선언이기도 하다. 제왕학의 교본이라는 평가를 받는 정치학 교과서 《한비자》는 삼엄한 논설과 수사학의 현란한 언사들을 통해 세상과 인간을 바꿀 수 있다고 믿고 남긴 저술이다.
《적우》에 광범위하게 깔려있는 《여씨춘추》는 중부(仲父) 여불위가 진왕 정에게 권한 천하통일의 비책과 왕도의 지름길을 밝히는 기회주의적인 안내서다. 진왕 정은 이를 직접 읽지는 않고 한비의 주석(註釋) 등을 통해 그 요체를 습득한다. 여불위가 거느렸던 문객, 식객, 빈객 등 3,000여명의 지식인을 동원해 편찬한 《여씨춘추》는 제자백가의 다양한 주장들을 집약한 일종의 백과사전에 속한다. 일자천금一字千金, 이 책에서 한 글자라도 더하거나 뺄 수가 있다면 천금도 아깝지 않다는 자부를 토하게 한 역작이다.
한비에 대한 오마주(hommage)로 빛나는 《적우》에는 황로학의 정수 《도덕경》, 《장자》의 심오한 철학을 비롯, 《논어》, 《전국책》, 사마천의 《사기》, 《여씨춘추》, 《한비자》, 《삼국지》 등 고전들의 문자향과 서권기가 진하게 드러나 경탄을 금할 수 없다.
양선희 작가는 또 적우(敵友)라는 예사롭지 않은 새로운 말을 만들어내 세상에 선보였다. 진시황, 여불위, 한비자, 이사와 관련된 선행한 작품들의 제목들을 크게 뛰어넘는 아주 창의적인 발상이자 신선한 충격이다. 붕(朋)과 우(友)를 따로 구분하기도 한다지만 벗, 친구, 학형(學兄), 붕우(朋友), 사우(師友)는 서로 비슷한 의미를 가진 것으로 파악할 수 있다. 소설의 타이틀을 위해 처음 만들어진 적우(敵友)는 소설 전체의 맥락으로 판단해보면 아마 피할 수 없는 악연의 정적(政敵)과 스승과 같이 배울 게 많은 벗이라는 사우(師友)를 합친 중복적인 개념으로 이해할 수가 있다. 이런 의미심장한 작명이 발하는 아우라는 작가가 가진 상상력의 폭과 작가에게 온축된 문·사·철이라는 인문학적 공부의 깊이를 드러낸다.
 
작가는 지난 2013년 5월, ‘내가 쓴 삼국지’라는 뜻을 가진 대하역사소설 《여류余流 삼국지》를 펴내 비상한 주목을 끈 바가 있다. 한국인들은 중국의 경제적 보복에 관계없이 계속 《삼국지》를 읽는다. 지금 이 시각에도 누군가가 《삼국지》를 읽는 기쁨을 만끽하고 있을 것이다. 《삼국지》를 새롭게 편작할 수 있다는 것은 숱한 사서(史書)들과 평전(評傳)들의 고산준봉을 이미 여러 번 답파했다는 것과 같다. 동아시아 최대 해전사의 영웅 충무공 이순신 제독은 <삼국지연의>를 자주 읽는 사람과는 국사를 논할 수 있다고 했다. 중국 고전의 소설문학화, 또는 현대화 작업에 남다른 애착과 역량을 유감없이 드러낸 작가의 기념비적 개가(凱歌)에 독자들과 함께 경의를 표한다. 중국의 고전에 정통한 작가가 한국에도 존재하는 것은 무척이나 다행이다. 특히 반지성적· 비역사적인 <동북공정> 등으로 역사를 왜곡· 오도하는 개탄할만한 현실에서도 중국의 고전들을 반복해서 읽고자 하는 수많은 독자들 외에도, 인류에게 불멸의 유산이 된 중국의 명저(名著)를 재창조해 다시 쓸 수 있는 작가가 한국에 있다는 것이 자랑스럽지 않을 수 없다.
           
G2로 부상한 현대중국의 소프트 파워(soft power)가 《논어》, 《사기》, 《삼국지》, 《한비자》를 비롯한 중국의 방대한 고전들에 힘입은 바가 크다는 것을 부인하기 어렵다. 그러나 오늘의 중국의 대외정책이나 현실은 매우 실망스럽다. 중국은 위대한 고전을 남긴 전통적 문화대국이었지만 현대의 경제대국을 사는 중국인들은 치졸한 사드 보복에서 보듯이 눈앞에 놓인 실리와 재물을 우선적으로 생각하면서 대륙적인 안목과 상선약수의 지혜를 상실하고 있지나 않은지 매우 의심스럽다. 소리(小利)에 집착하는 중국인들은 거시적으로 대국(大局)을 고려하는 평화굴기, 도광양회라는 그들의 선조들이 익숙했던 후안흑심이나 무위(無爲)의 면모를 거의 보이지 못한다. 아쉽게도 중국의 치세에는 소인들이 득세를 하였고 걸출한 인물들이 나지 않는 것이 과연 일반적이었나 하는 의문도 당연히 일어난다.
 
 
오늘의 소용돌이치는 국제정세는 중국이 우리에게 과연 벗인가, 적인가를 심사숙고하게 만들고 있다. 주변 4강의 하나로 우리를 노골적으로 압박하는 모양새를 취하는 중국과 중국인에 대해 우리는 복잡하고 미묘한 피해의식을 거듭 가지게 된다. 거대 중국을 바라보는 우리의 심정은 착잡하다. 때로 풍전등화(風前燈火)에 비유되기도 하는 격동의 지정학적 한반도에 살며 우리의 불안한 내일과 중국의 오만한 행태를 우려하고, 중국리스크라는 장벽을 절감하는 정치인, 기업인을 비롯한 모든 한국인들에게 필독서의 하나로 《적우》를 권한다. 만약 중국어 번역판이 나온다면, 중국에서도 그야말로 낙양의 지가를 올리는 베스트셀러를 기대할 수 있는 수작(秀作)이라고 확신한다.
 
감옥에서 죽음을 기다리던 한비자의 뼈저린 한탄이다. “...강대국의 신하는 열 개의 어리석은 계책을 세워도 여덟아홉 개는 성공할 수 있지만, 약소국의 신하는 열 개의 현명한 계책을 세워도 그 중 하나도 성사되기 힘들다. 대체로 계책의 승패는 계책을 세운 자의 능력에 따른 것이 아니라 나라의 힘이 얼마나 뒷받침할 수 있느냐로 결정되기 때문이다...” 이 같은 혜안은 ‘코리아 패싱’이 빈번하게 운위되는 오늘을 사는 한국인에게 벼락과도 같은 경고이자 타산지석의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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