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저 새로 읽기]보편적 복지의 세계화 위해 ‘유럽통합’ 꿈꾸다
매체명 : 경향신문   게재일 : 2011-11-26   조회수 : 2609
ㆍ위르겐 하버마스…‘아, 유럽’

1980년대가 한국 사회과학의 전성시대였음을 부인할 이는 없을 것이다. 군부독재와 천민 자본주의로 인해 삶을 유린당해온 민중들을 보며 지식인과 학생들은 영혼을 어루만져주는 인문학의 미지근한 성찰보다는 폭력을 총체적으로 조망하고 예리하게 해부하는 사회과학의 언어를 요청했기에 그렇다.

이 때 사회과학이 국가관료와 기업가를 위한 코디네이터로 복무하는 현재의 사회과학이 아니라, 이 땅의 변혁을 위해 제국주의 역사와 세계체제를 ‘과학적’ 방법론으로 체계화하는 마르크스주의 계열의 언설체계였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따라서 80년대의 ‘과학’이란 객관적 분석이나 논리적 정합성보다는 당파적 투쟁과 규범적 정당성을 담보해야 하는 앎의 태도였다. 다시 말해 이 사회과학은 차분한 성찰과 관조가 아니라 격정적인 분노와 희열을 지성에게 할당하는 ‘뜨거운’ 앎이었던 셈이다.

그래서 위르겐 하버마스(82)란 이름은 80년대의 사회과학에는 시쳇말로 뜨뜻미지근한 언설체계의 대명사였다. 혁명이냐 수정이냐 패배냐 전향이냐를 놓고 깨어날 수 없는 열병에 걸렸던 이들에게 하버마스의 글은 쓸데없이 장황하고 정적인 것으로 보였을 터이니 말이다.

물론 87년 대투쟁 이후 하버마스의 이론은 새로운 사회의 청사진으로 각광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의사소통적 합리성을 통해 체계와 생활세계를 매개하자는 그의 민주주의론은 한국의 사회과학이 온전히 받아들이기에는 용량이 터무니없이 거대했고, 90년대 이후 대학가를 풍미한 이른바 포스트 모더니즘은 그를 철지난 합리주의자로 내몰아 설 자리를 빼앗아 버렸다. 하버마스 연구가 몇몇 개별 연구자들의 뜻 깊은 업적에도 불구하고 2000년대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지 못했던 까닭이다.

<아, 유럽>(윤형식 옮김/나남)은 이렇듯 아쉬운 대접을 받아온 하버마스를 다시 읽기 위해 찾아온 책인 듯하다. <공론장의 구조변동>, <커뮤니케이션 행위이론>, <사실성과 타당성> 등 그의 라이프워크라 할 수 있는 대저들에 비교할 때 이 책은 소품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명저라는 이름에 걸맞지 않음은 분명하다. 그러나 <아, 유럽>은 하버마스의 명저들에 다시금 접근하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할 책이다. 왜냐하면 이 책은 이 땅에서의 수용에서 충분히 감지되지 못한 하버마스의 ‘뜨거움’을 충분히 느낄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아, 유럽>에 담긴 연설문, 일반 저널 기고문, 추도문 등은 딱딱하고 냉철하고 난해한 ‘학자’가 아니라 유연하고 열정적이고 연대감으로 가득 찬 ‘동료 시민’ 하버마스의 말과 행위인 것이다.

데리다와 로티를 비롯한 동세대 지식인들에 대한 연대와 신뢰, 세계변혁을 위한 열정 속에서 단호히 옹호되는 유럽통합, 그리고 민주주의의 민주화를 위해 공론장의 확대와 심화를 반복 주장하는 고집스러움 등 이 책에 실린 하버마스의 글들은 그의 중층적 이론체계와 난해한 문장이 실은 매우 담백하고 선명한 문제의식의 산물임을 확인케 해준다. 그것은 정치경제적 자유주의와 사회-복지국가 사이를 조화롭게 매개하는 방법에 대한 탐구이며, 세계시민의 보편적 규범을 점진적으로 구현할 수 있는 현실적 대안을 더디지만 꾸준히 모색하는 일이다.

특히 유럽통합을 논하는 하버마스는 단호하고 명쾌하다. 그에게 유럽통합은 국가에 따라 편차를 보이는 복지를 국경을 넘어 실현하자는 국제적 사회민주주의의 첫 걸음이고, 다양한 문화적 가치의 존중을 헌법적 보편규범 속에 명문화하려는 자유민주주의의 심화이며, 미국의 일극지배로 인해 실추된 인권과 민주주의의 규범적 정당성을 회복시켜 전 지구적 위기상황에 대처하는 길이다. 그래서 그에게 유럽통합이란 유럽 중심주의의 발로가 아니라 국민국가 체제로 풀 수 없는 전 지구적 난제의 해결을 위한 실천 운동인 셈이다.

주로 2000년대의 강연과 기고문을 실은 이 책은 현재의 유럽 위기에 대해서도 시사점을 준다. 유럽통합이 각국의 관료, 기업, 금융계의 손이 아니라 하버마스가 말하는 유럽 공론장의 확대와 심화를 통해 자리 잡았다면 어땠을까?

이를 하버마스 특유의 이상주의라 간주하는 것은 손쉬운 일이다. 그러나 실제로 국민국가에 민주주의를 정착시켜온 것은 시민들의 토론과 소통이었고, 하버마스는 그것을 유럽 차원의 민주주의를 위한 유일한 길로 고집스레 제시한다.

고도의 분석력과 논리로 무장한 오늘날의 사회과학은 이런 이상주의를 한가한 공상으로 여기기 십상이다. 하지만 국민국가가 무능을 넘어 파렴치한 날치기로 무구한 사람들의 일상을 파괴하기에 이른 오늘날의 이 땅에서 사회과학은 이런 뜨거운 이상주의를 결여한 탓에 현실성을 담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부디 이 책을 통해 80년대에 무미건조하다는 이유로 대접받지 못한 하버마스로부터 사회과학의 뜨거움을 배우는 역사의 역설이 이 땅에 생겨나길 기대해본다.

<2011-11-26 경향신문/김항 | 연세대 국학연구원 HK교수 >
이전글 [와카미야의 東京小考]故 권오기 선생이 말한 아시아의 ‘평천하’
다음글 위기에 빠진 유럽! 하버마스의 처방은?
prev nex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