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과학·개인주의에 충실한 ‘미국 예외주의’ 비판
매체명 : 교수신문   게재일 : 2008-06-16   조회수 : 6371
서평] 『미국 사회과학의 기원 1·2』 도로시 로스 지음|백창재·정병기 옮김|나남|2008

2008년 06월 16일 (월) 12:36:48 교수신문 editor@kyosu.net


우리는 언제 族譜를 따지는가. 대체로 먹고살만해졌을 때, 아니면 가족사에 뭔가 문제가 발생했을 때다. 학문 활동에 몰두하는 전문가도 마찬가지다. 자기 전문분야의 기원을 돌아보는 일은 매우 드물다. 학계의 경우 십중팔구는 해당 분과가 난관에 봉착했을 때 기원을 돌아보게 된다.


도로시 로스(Dorothy Ross)의 『미국 사회과학의 기원』(The Origins of American Social Science, 1991)도 그러하다. 그는 20세기 미국문화가 점점 더 방향성을 상실하고, 사회윤리가 지속적으로 침식됨에 따라 미국 사회과학을 지배해온 자연과정에 입각한 사회모델들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고자 한다. 저자는 ‘미국 예외주의적 사고 자체를 역사화’하려는 노력의 일부분으로 ‘미국 사회과학을 역사화’하고자 이 책을 썼다고 지적한다.



미국 예외주의 이데올로기에 대해 저자는 그것을 미국의 독특성으로 옹호하는 것이 아니라, 미국판 국가주의(nationalism)로 비판하는 입장을 취한다. 미국의 국가주의는 미국을 유럽으로부터 분리시키기 위해 형성됐으며, 미국과 유럽을 상극으로 보려는 성향에 의해 고취됐다. 또한 미국 예외주의 담론의 두 번째 특징은 이상적인 것과 현실적인 것을 융합시키는 경향인 ‘이상주의의 형이상학’이다. 처음부터 미국 국가주의자들은 미국 역사에 개인의 자유와 정치적 평등, 사회적 조화, 그리고 어느 정도 사회적 평등까지 결부시켰다. 그렇지만 이런 사고는 때때로 제국주의적 충동을 일으키기도 했다고 본다.


저자는 미국 사회과학의 삼대 핵심 분야인 경제학, 사회학, 정치학을 중심으로 살펴보고 있다. 역사학, 심리학, 인류학과 그 밖의 사회과학 분과학문들은 체계적으로 포함시키지 않고 다만 선택적으로 가끔 언급할 뿐이다. 이 책은 미국 사회과학 분과학문들의 형성기인 대략 1870년에서 1929년 사이의 기간을 중점적으로 다룬다. 사실 계량모델이나 체계분석, 기능주의 그리고 행태과학 등이 크게 유행했던 1950년대에 미국 사회과학의 과학적 열망이 최고조에 달했다. 그렇지만 저자는 사회역사과정을 자연과정의 한 영역으로 보는 기본 관점과 자연과학적 방법을 추구하려는 결정은 이미 1920년대에 이뤄졌다고 본다. 이처럼 미국의 사회과학이 역사학보다 자연과학에 더 기울고 자유주의적 개인주의라는 고전적 이데올로기에 충실한 연유를 추적하면서, 저자는 이것이 ‘미국 예외주의(American exceptionalism)’라는 미국식 국가주의 이데올로기에 입각해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미국은 세계사상 특수한 지위를 차지한다는 예외주의 이데올로기가 청교도이념, 자유주의 그리고 공화주의에 깊이 스며들어 미국 사회과학에 경로의존성을 부과했다는 것이다. 저자가 미국 예외주의를 지목해 역사적 비판을 가하는 의도는 앞으로 그것의 영향력을 줄여나가고자 하는 것이다. 따라서 미국 사회과학이 선택한 특수한 과학주의적 입장은 그들의 특수한 역사의식에 의거하지 않고는 설명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저자는 미국 사회과학이 실용적인 양키들에 의해 발전된 것이 아니라, 도적철학에 뿌리를 두고 미국 사회의 엘리트층 가치를 신봉하는 학자층에 의해 이뤄졌다고 본다. 그런데 미국의 학자층은 실제로는 현실권력에 관계했으면서도 스스로는 권력과 거리가 있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저자는 1965년 콜롬비아대에서 역사학 박사학위를 취득한 후 프린스턴대, 버지니아대를 거쳐 현재 존스 홉킨스대 역사학 교수로서 미국 지성사, 현대 사회사상과 정치사상, 인문과학사를 강의하고 있다. 따라서 미국 사회과학의 핵심 흐름을 이루는 담론을 재구성하는 지성사의 방법을 동원한다. 그리하여 미국의 역사와 사회과학을 연결시키는 한편, 사회과학자들이 전제하는 가치들이 역사 속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방식을 탐구한다. 저자는 역사적 전환점마다 담론을 주도한 인물을 중심으로 사회과학담론을 소개하고 있다. 그의 논의는 근대 사회와 정체 그리고 경제를 둘러싸고 진행된 학계의 논의와 미국 예외주의를 둘러싼 국가 엘리트들의 논의에 국한된다. 책의 메시지는 무척 명료하다. 미국 사회과학의 역사는 한마디로 각 시기별로 가장 중요한 사회문제들과 지적, 정치적으로 대결해온 역사라는 것이다. 미국 예외주의와 자유주의가 결합해 미국 사회과학계에는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에 대한 합의가 형성됐다. 따라서 사회과학자들은 자유주의 사회를 어떻게 통치해나갈 것인가에 집중했다. 저자는 자신의 의도가 “미국 사회과학을 역사화하는 것”이며, “역사세계를 자연화하려는 미국 사회과학의 노력 자체가 바로 역사적 기획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정리한다. 사회과학자들이 과학주의적 선택을 한 데는 ‘충분한 이유들’이 있었겠지만, 그 이유들은 역사적 의도들에 의해 항상 제약된 이유들이었다는 것이다. 이는 ‘객관적 과학’이라는 미국 사회과학의 실증주의적 자기묘사를 부정하는 것이다. 미국에서 공부한 사회과학자들은 거의 대부분 미국 사회과학의 가치중립성, 객관성, 전문성을 옹호한다. 문제의식은 ‘가치부하적’, ‘주관적’이고 따라서 ‘과학적’이거나 ‘전문적’이기 어렵다고 기각한다.


그런데 미국 사회과학의 과학주의 자체가 ‘역사적’인 것이라면, 우리가 미국 사회과학을 바라보는 시각은 뿌리부터 바뀌어야 할 것이다. 미국 사회과학자들에게 학문의 과학성은 국가에 대한 헌신이나 국익 또는 기업이익에 대한 봉사와 전적으로 양립가능한 것이다. 아니, 과학적이어야 더욱 더 권력효과를 창출할 수 있다고 믿는다.


나는 역사사회학 전공자로서 한미관계를 주로 연구한다. 최근에 기밀해제된 미국 정부문서를 읽으면서 가끔씩 미국 사회과학자들이 정부의 프로젝트를 수행한 보고서들을 접하곤 한다. 로스토우 교수와 헌팅턴 교수의 보고서가 기억에 남는다. 둘 다 월남전 관련 보고서를 미국 정부에 제출한 바 있다. 로스토우 교수는, 우리에게는 ‘개발경제학자’로 알려져 있지만, 미국의 월남전 개입에 결정적 역할을 수행한 것으로 유명하다.



헌팅턴 교수는, 우리에게는 ‘민주주의의 제3의 물결’이나 ‘문명충돌’로 유명하지만, 월남전 당시 ‘베트콩’의 게릴라전술에 맞서 물고기를 없애기 위해서는 물을 말려버려야 한다는 전술 즉, 강제 도시화를 추진해야 한다는 제안을 한 장본인이었다. 미국 사회과학계가 미국정부나 기업계와 맺는 관계는 한국의 그것보다 훨씬 전면적이고 제도적이다. 우리가 미국 사회과학계는 가치중립적이며 엄격한 과학적 방법론에 입각해 연구와 강의를 진행해나갈 것이라고 믿는 동안 그들은 국익과 사익을 위해 열심히 복무했다.


공역자인 백창재 교수와 정병기 교수는 한국학술진흥재단 학술명저 번역총서의 일환으로 이 책을 옮겼다. 옮긴이는 1권 끝에 보론으로 「한국 사회과학 정체성 논의」를 싣고 있다. 또 2권 끝에는 이 책의 해제를 싣고 있다. 아마도 이 책을 번역해냄으로써 문제의식의 중요성을 발견하고 과학주의를 넘어서려는 작업에 동참하고자 했던 것 같다. 그렇지만 미국 사회과학의 기원을 파헤치는 작업소개는 한국 사회과학의 정체성을 확립하려는 노력과 맞닿아 있는 것 같으면서도 기실은 평행선을 달리고 있다고 생각한다. 한국 사회과학의 정체성은 지금, 여기에서 우리의 문제를 우리의 머리로 고민하는 데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지난 100여 년 간 한국의 근대화는 ‘타율적 근대화’라 부를 만큼 바깥으로부터의 도전에 대한 때늦은 응전, 그것도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한, 대응이었다. 지금부터라도 날개(wings)와 뿌리(roots)를 함께 보듬고 나가는 한국 사회과학을 실천해야한다. 미국의 사회과학이 우리에게 덧입힌 ‘과학주의’의 속박에서 벗어나 주체적 문제의식과 독특한 문제틀을 제시할 때다. 그러기 위해 한국 사회과학에 뿌리내린 미국 사회과학에 대한 성


찰은 필수적이다. 한국 사회과학의 정체성이란 우리와 마주한 상대방과의 관계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정일준 / 고려대·사회학과

필자는 서울대에서 「미국의 대한정책변화와 한국발전국가의 형성, 1953-1968」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워싱턴대 방문교수를 지냈으며, 주요 논문에는 「한국사회과학 패러다임의 미국화」 등이 있다.
이전글 "당신의 혼(魂), 여기에 담아…"
다음글 "미래지향적 '개혁 보수'로 사회,국민통합 이뤄내야"
prev nex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