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창재 서울대 교수 “국내학계 美사회과학 신화 깨야”
매체명 : 경항신문   게재일 : 2008-06-02   조회수 : 7514
“미국 사회과학의 보편성과 역사성이 한국에도 유효한지에 대한 철저한 반성이 필요합니다. 미국 사회과학은 한국이 그대로 따라야 할 ‘보편’이 아닙니다.”

백창재 서울대 정치학과 교수(48)가 최근 ‘미국 사회과학의 기원 1·2’(나남)를 같은 대학의 정병기 연구교수와 함께 번역, 출간했다. 지난 29일 만난 백 교수는 미국 지성사 연구의 대가인 도로시 로스의 이 책을 번역한 이유를 ‘한국 사회과학의 정체성’을 찾는 데 도움이 되기 위해서라고 했다.

한국 학문은 오랜 기간 해외의 영향을 받아왔다. 중국, 일본, 프랑스, 독일 등의 영향이 컸지만 해방 후에는 미국 학문, 그중에서도 사회과학의 압도적인 영향 아래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한국적 사회과학’이라는 말을 하면 즉각 사회과학은 보편적 학문이어야 한다는 반론이 나옵니다. 보편적 지식을 추구하는 만큼 ‘한국적’ ‘미국적’ 이런 것이 없다는 겁니다. 과연 그럴까요?”

이번 책에서 보론과 해제를 통해 밝혔지만 백 교수는 미국 사회과학의 과학성 또는 보편성에 대한 한국 학계 내 신화가 더 깨질 필요가 있다고 했다. 그가 로스의 논의에서 가장 주목하는 부분은 미국 사회과학에 담긴 ‘과학주의’ 문제다.

로스의 논의는 미국이 구대륙과 다르다는 ‘미국 예외주의’에서 출발한다. 예외주의의 대상은 계급갈등에 시달렸던 유럽 자본주의 또는 유럽 정체(政體)였다. 미국이 예외이려면 계급갈등 없는 산업화를 이뤄야 했다. 이를 입증하는 것이 사회과학자들의 책무였다. 이 과정에서 미국 예외주의는 자유주의와 결합됐고, 사회과학계에서는 미국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에 대한 합의가 만들어졌다. 또 사회과학자들의 근본문제는 사회를 어떻게 관리·통제하느냐에 맞춰졌다. 단기적인 ‘과정’에 초점을 맞추는 ‘과정과 통제의 사회과학’이 지배하게 된 것이다. 사회과학은 추상적 체계와 계량적 측정기법으로 고착됐고, 이것이 ‘과학주의’라는 이름으로 보편성을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백 교수는 “미국 사회과학은 미국의 특수한 사회적 문제를 푸는 과정에서 나온 역사적 산물”이라며 “그것은 일상적·실용적 문제를 해결하는 데만 익숙해져, 거대 사회문제가 생겨도 볼 수 있는 도구가 없어지는 문제가 생긴다”고 했다.

그렇다면 자명해진다. 미국 사회에 비해 변화와 갈등이 여전히 중대한 문제로 남아있는 한국 사회에서 미국 사회과학의 보편성·과학성을 중시하는 것이 얼마나 맞지 않는 옷을 입은 모습인지. 미국에서 학위를 받은 박사들이 국내 주요 대학 교수직을 차지하고 있는 현실은 간단해 보이는 이런 문제조차 인식하기 어렵게 한다.

백 교수의 이번 번역은 학문마저 미국 종속성이 심해지는 상황에서 더 의미가 있다. 일부 사립대에 이어 서울대마저 교수임용과 승진 심사에서 톰슨사라는 미국 민간기업이 만든 ‘사회과학인용지수(SSCI)’ 논문 게재 실적을 요구하는 규정을 마련 중이다. 백 교수는 “창피하고 비극적”이라고 했다. “SSCI 실적을 쌓으려면 한글로 써야 적합한 논문조차 영어로 써야 하는데, 해외 학자들은 왜 그러는지 전혀 이해를 못합니다. 일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대세는 SSCI 실적을 요구하는 쪽으로 가고 있습니다. 아마 지구상에서 유일한 나라가 아닐까 합니다.”

백 교수도 미국 UC버클리에서 학위를 받았다. 하지만 국내에 들어와 10년쯤 지나니 사회과학이 우리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이 돼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 외에도 이런 생각이 들더란다. “미국은 학계가 두꺼워 더 이상 쓸 주제가 없을 정도입니다. 한 명의 학자가 큰 건물에 벽돌 하나씩 채우듯 꽉 맞물려 돌아가는 거죠. 우리는 미국처럼 벽돌 하나씩 채워 집을 짓기엔 학계가 빈약합니다. 그런 상황에서는 담벼락 하나 쌓거나 벽돌 여러 개 채우는 걸 고민해야 합니다. 그래서 제 전공(미국의 대외정책) 외에 이런 문제에도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글 손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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