抗日… 민주화… '참 스승'의 발자취 깊은 울림
매체명 : 한국일보   게재일 : 2008-05-09   조회수 : 7434
김준엽 前 고려대 총장, 역사와 신 나와 중국 속편 발간
韓-中 교류문제 등 기고문·지인들의 글도 함께 엮어

이왕구 기자 fab4@hk.co.kr

"1985년 2월 고려대학교의 졸업식은 아주 예외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재학생들과 졸업생들이 총장사퇴를 반대하는 시위 속에서 진행된 졸업식은, 표면적으로 어수선했지만 그 내면은 당대 한국사회의 축도(縮圖)인 양 비장하기 그지 없었다….”

각 대학의 총장들이 시위를 막는데 사력을 당하던 1980년대, 민주화를 통해 시위의 근본원인을 해결하는 길만이 방책이라고 생각했던 김준엽(88) 전 고려대 총장. 당시 고려대의 정치학도였던 박명림 연세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해직교수의 원교복직을 관철하고, 학생들의 자치조직인 총학생회의 부활을 묵인하는 등 군사정권의 학원정책에 반발해 그가 총장직에서 쫓겨나던 상황을 이렇게 회고하고 있다.

좌와 우 양쪽에서 모두 존경받는 원로로 꼽히는 김 전 총장의 기고문, 논설, 인터뷰, 기사, 지인들이 그에 대해 쓴 글 등을 묶은 <속ㆍ역사의 신>과 <속ㆍ나와 중국>(나남 발행)이 나왔다. 2001년 완간된 <장정ㆍ5>에 일부 내용이 실려있으나 이번 책에서는 2001년 이후의 글까지 모두 망라했다. 1990년과 1997년 나온 <역사의 신>과 <나와 중국>의 후속편 격.

앞의 책은 대체로 개인사와 시사성 있는 현안들이 묶여있고, 뒤의 책은 그가 필생의 과업처럼 추진했던 중국과 한국의 교류 문제에 관한 이야기를 주로 다루고 있다. “내 나이 이제 90을 바라보게 되어 기력이 모자라 앞으로 다시 무슨 책을 간행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는 서문에서 볼 수 있듯 김 전 총장 스스로 생을 되돌아보고 있어, 글들의 울림은 더 무게감 있다.

그는 책에서 신의주고보 시절 일본에 수학여행을 갔다오다가 귀로에서 일본말을 쓰는 조선인 학생들과 난투극을 벌인 일, 일본 유학시절 한 달에 한 두 번씩 하숙집을 찾아오던 일본경찰의 감시 경험 등을 떠올리며 반골기질과 민족의식이 싹튼 계기를 회상하기도 하고, 박정희 정권 때부터 끊이지 않았던 입각권유를 거절했던 이유를 털어놓기도 한다.

그가 “나이 든 사람들은 관직 한 자리를 해서 족보에 번듯한 관직명이라도 올려야 한다는 생각이 심한데 이는 관존민비의 폐습”이라고 질타하는 대목은 선거 때마다 이른바 ‘정치교수’ 문제로 떠들썩한 요즘 우리 학계가 경청해야할 대목이다.

책의 상당부분은 우리시대에 김준엽과 같은 ‘정신적 표상’을 가질 수 있음에 감사하는 한국과 중국 지인들의 글로 꾸며져 있다. 이찬구 전 의원은 생일날마다 일제치하에서의 아픔이 떠오르고 두 동강난 조국의 신음소리가 들려와 집에서 밥상을 받을 수 없다고 했던 그의 말을 떠올리며 “우리 대한민국은 신채호 선생님과 이분 만으로도 자랑스러운 ‘선비정신’의 나라인 것을 알 수 있다”는 글을 남겼다.

중국내 11개 대학에 한국학 연구소를 세워 한중 교류의 초석을 다진 그의 업적에 대해서 지쎈린 베이징대교수는 “어찌 미수(米壽)에만 머물꼬 다수(茶壽ㆍ108세)까지 기약하노라”는 축시를 선물했다.

그는 <속ㆍ역사의 신> 앞머리에 일본군과 싸우며 충칭의 임시정부까지 동지 장준하와 6,000리 장정(長征)을 하는 동안 “우리 후손들에게 이런 고생을 시키지 않기 위해 못난 조상이 되지 말자고 절규했다”며 “과연 나는 못난 조상이라는 후세의 평을 면할 수 있겠는지 하고 일생을 되돌아보게 된다”고 썼다. 그의 이런 겸손함이 못난 후손들의 부끄럼을 더하게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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