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통영으로 가시나요-박경리 선생님을 추도하며
매체명 : 중앙일보   게재일 : 2008-05-07   조회수 : 6613
선생님, 이제는 편안하셔도 되겠지요. 눈 감으신 뒤, 저편으로 붉게 노을진 산등성이 아래 선생님이 알고 계셨거나 혹은 모르셨던 사람들이 오밀조밀 살아가는 모습을 지울 수 없어도 이제는 평온한 시선으로 바라보실 수는 있겠지요. 위독하시다는 소식을 듣고 병원에 달려갔을 때, 선생님은 뭍 생명에 대한 연민의 끈을 쉽게 놓지 못하셨습니다. 안쓰러워, 안쓰러워, 어떻게 이렇게 가겠느냐고 속삭이듯 숨을 몰아쉬시는 마지막 모습이 아프게 인화되어 있습니다. 18년 전, 비구름이 걸린 노루고개를 넘어 원주로 남하해 처음 뵈었을 때 빗물이 뚝뚝 듣던 푸성귀랑 풋고추를 거둬 주시던 그 손을 이제 영원히 놓아야 합니다. 세정의 소음이 스며들던 그 병실에서 단풍처럼 작아진 손을 제가 한참 잡았던가요, 아직 남은 따스한 온기에서 선생님의 삶의 꼬리를 붙잡으려 애를 썼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 사람들이 선생님께 하고 싶은 말을 전해드리려 했지요. 이제 다 버리고 가셔도 돼요, 라고.

영면하신 그 병실에선 선생님이 젊은 시절을 보낸 노량진 기슭, 정릉골짜기, 마포나루가 지척입니다. 전화(戰禍)에 무너진 신혼의 꿈이 저기 묻혀 있고요, 아들을 잃고 포효하시던 골짜기, 여성성을 벗고 인본주의자로 거듭났던 마포가 저 넘어 있어요. 이제는 손자를 업은 채 창틀에 기대어 원고를 쓰지 않으셔도 돼요. 베갯잇 꿰매듯, 재봉틀로 박은 원고지가 벌써 강물이 되어 바다에 닿았으니까요. 어느 겨울날 호숫가에서 그러셨지요. 밤새 호숫가에선 천둥 치는 소리가 난다고. 물새들이 먹이를 건지려고 수면의 결빙을 깨는 몸짓이라고, 그것이 삶의 소리라고. 소설 『토지』로 우리 일상 속에 생환한 선생님의 분신들, 주갑이·서희·길상·봉순·양현·영광·명희·임이네·용이·월선, 투박하고 애끓는 삶의 운명을 수굿이 받아들였던 그들의 천리(天理)를 몸소 보여주신 것만으로 우리는 살아갈 용기를 얻었으니까요.

작고 척박한 한반도에서 우리는 『고요한 돈강』의 작가 솔로호프를 부러워하지 않아도 됩니다. 『토지』에 재현한 칠백여 명의 분신들은 선생님이 그토록 애지중지하셨던 이 땅의 생명체이고, 각자의 한을 연소시켜 생명의 도화지에 한 땀씩 수를 놓고 있는 무명의 주인공들이라는 것을 이제는 압니다.

문학이었지요, 선생님의 꿈과 현실이 모두 문학이었지요. 그것은 동시에 사상이었습니다. 식민지의 신음을 성난 맹수처럼 응시하고, 전쟁의 참상을 문신처럼 새기고, 전후의 성장을 목신(牧神)처럼 우려하시던 팔십 평생의 이력은. 1920년대 세대가 차마 발설하지 못한 흉리(凶裏)가 ‘폭력에의 저항’임을 어렴풋이 깨닫습니다. 침탈·불신·강행의 이십 세기가 결국 생태계의 순리에 역행하는 인간의 어리석음의 연속이라는 사실을 일깨우고자 하셨습니다. 시장(市場)이 전장(戰場)이 되고, 성정(性情)을 명리(名利)로 들끓게 하는 자본주의의 불가피한 쳇바퀴를 생명과 평화의 사상으로 순치시키려 하셨습니다. 그것은 한국의 1920년대 세대가 세계 인류에게 전해준 복음(福音)입니다. 선생님의 야윈 손에 남은 온기가 한국의 전후세대에게 들려준 푸른 메시지였습니다. 토지, 인간사의 춤사위가 흥겹게 벌어지는 품, 생명의 싹을 틔우는 그 시원(始原)의 원리를 귀히 여기라는 논두렁 같은 유언이었습니다.

떠나신 지 60년, 이제 통영으로 가시나요. 선생님의 고향, 통영의 밤바다는 선생님이 떠나신 그날과 같이 야광충처럼 빛납니다. 김약국의 딸들, 그 후예들이 오늘도 푸르고 물결 높은 바다로 나가고, 갓 잡아 올린 어물을 말려 생계를 이어갑니다. ‘어머니’였지요, 숨을 거두기 전에 쓰셨던 마지막 시(詩)가. 모든 살아있는 생명체에서 연민의 끈을 거두실 때 ‘어머니’를 불러 보는 것은 생과 작별하는 최후의 의식(儀式)이겠지요. 불효막심의 회한을 이제 푸셨지요. 부디, 편히 눈감으세요. 편히 눈감으셔도 돼요. 선생님은 아픈 영혼을 가진 모든 우리의 토지, 한반도의 어머니가 되셨으니까요.

미륵산 기슭에선 선생님이 태어나신 명정리가 보입니다. 김약국의 둘째 딸 용빈이가 다시 찾아와 바다에서 항구를 응시하듯, 쑥쑥새 자주 지저귈 그 기슭에서 속 울음으로 제 몸 흔드는 사람들을 보고 계세요. 선생님의 부재(不在)를 눈치챈 항도 사람들이 옷깃을 여미고 작별의 예를 보내면, 선생님이 남기신 생명의 메시지가 노을처럼 퍼져 산하를 적시고 있다고 생각하세요.

선생님, 편히 잠드세요.


송호근 교수 서울대 사회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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