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인들이 본 박경리 “평생을 문학 하나에 헌신한 삶”
매체명 : 한겨레   게재일 : 2008-05-06   조회수 : 6901
박경리씨 타계 소식에 후배·동료 문인들은 “박경리 문학을 빼고 어떻게 한국 현대문학사가 성립할 수 있겠느냐”며 “우리 문학을 감싸주던 큰 산과 같은 분이 가셨다”고 안타까움을 감추지 못했다.
문학평론가 김윤식 서울대 명예교수는 “박경리 문학의 본령은 역시 16권짜리 대작 <토지>”라면서 “1897년 대한제국의 성립에서 시작해 1945년 8·15해방으로 끝나는 이 대작은 평자마다 강조점이 각각 다르지만 참 주제는 ‘산천’이란 말로 요약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동진이 독립운동을 하러 압록강을 넘어가기 전에 최치수와 만나, ‘나는 군주를 위해서도 백성을 위해서도 아니고 오직 산천을 위해서 싸우는 것’이라고 한 말에 이 대작의 핵심 담겨 있다”며 “<토지>를 다 일고 나면 그 산천의 울림만 남는다”고 평했다.

소설가 박범신씨는 고인의 삶이야말로 작가의 전범이었다고 술회했다. 그는 “박 선생은 평생 문학 제일주의의 삶을 산 분”이라며 “오로지 문학 하나에 헌신함으로써 우리 후배들에게 큰 귀감이 됐다”고 말했다. 박씨는 또 “박경리 이전에는 단편소설이 우리 문단의 주류였지만, <토지>를 통해 우리 민족의 애환을 산맥처럼 그려내는 총체적 리얼리즘이 성립했다”고 평가했다.

고인의 죽음에 대해 여성 작가들이 느끼는 안타까움은 특히 각별했다. 젊은 시절부터 시절부터 박씨의 작품을 감명 깊게 읽고 큰 영향을 받았다는 소설가 오정희씨는 “박 선생은 일찍이 여성 작가라는 한계를 뛰어넘어 (여성 작가들의) 작품세계를 큰 폭으로 넓힌 분”이라고 말했다. 그는 “박 선생이 위독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창작강의> 같은 저작을 다시 꺼내 읽었다”며 “그 안에서 고인의 명철한 문학관과 문학기법을 새삼 발견했다”고 털어놓았다.

소설가 권지예씨도 “박 선생님이 사시던 토지 문화관에 가서 뵈었던 기억이 생생하다”며 “손수 키운 채소로 반찬을 만들어 주시며 이거 먹고 힘내서 좋을 글을 써라 이야기해주셨을 때, ‘여성 작가들의 위대한 선배님’을 가깝게 느꼈다”고 고인을 추억했다. 권씨는 “<토지>에 비하면 소품이라 할 <시장과 전장> <김약국의 딸들>도 감명 깊게 읽은 작품이었다”며 “그런 소설들도 더 심도 있게 조명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시인 이문재씨는 “박경리 선생은, 첫째, 생명과 환경 문제에 일찌감치 눈뜬 분이고, 둘째, 일본의 위험한 정체를 간파하신 분이며, 셋째, 민족 교유의 ‘한’의 문제를 생산적으로 해석하신 분”이라고 그 분의 삶과 문학을 정리했다. 박경리 소설을 거대한 문학적 산맥이라고 평한 문학평론가 정현기씨는 “<토지>는 한국 현대사의 전부를 담은 작품이자 제국주의에 대한 질문”이라며 “박 선생은 환경·생명·우주론 등에서도 선구적인 인식을 보였다”고 평가했다.

고명섭 최재봉 기자 michae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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