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인적 글쓰기… 격동기 한민족의 서사시 그려
매체명 : 조선일보   게재일 : 2008-05-06   조회수 : 6322
토지의 작가 박경리씨 별세

"아아 편안하다 늙어서 이리 편안한 것을/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토지》의 작가 박경리씨는 타계하기 직전 신작시 〈옛날의 그 집〉(현대문학 4월호)을 발표하면서 생의 말년에 얻은 무욕(無欲)과 달관의 철학을 참으로 홀가분하게 노래했다. 시 〈옛날의 그 집〉은 1994년 8월 15일 박씨가 대하소설 《토지》를 탈고한 강원도 원주의 단구동 집(현재 토지문학공원)을 가리킨다. "달빛이 스며드는 차가운 밤에는/ 이 세상의 끝으로 온 것 같이/ 무섭기도 했지만/ 책상 하나 원고지, 펜 하나가/ 나를 지탱해주었고/ 사마천을 생각하며 살았다"(시 〈옛날의 그 집〉 부분)

박씨는 1969년 월간 현대문학 9월호에 연재를 시작해 무려 25년 동안 여러 매체로 연재 지면을 옮기면서 200자 원고지 4만여 장에 걸쳐 한국문학사의 큰 산맥으로 남을 대하소설 《토지》를 집필했다. 1897년의 한가위, 까치들이 울타리 안 감나무에 와서 아침인사도 하기 전에…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이 소설은 경남 하동군 평사리에서 출발해 한반도와 만주 간도까지 펼쳐진 광활한 무대를 오가면서 8·15 광복을 맞기까지 격변기를 헤쳐나간 한민족의 생명력을 형상화했다. 여주인공 최서희가 광복을 맞는 순간과 함께 대단원의 막을 내리는 이 소설의 제5부 끝자는 공교롭게 1994년 8월 15일 새벽2시에 나왔다. 그 순간 서희는 자신을 휘감은 사슬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떨어지는 것을 느낀다…고 쓴 작가 역시 오랜 집필의 굴레에서 벗어난 순간이었다.

《토지》 집필 초기에 작가는 유방암 판정을 받아 3시간이 넘는 수술을 받고 나서도 가슴에 붕대를 감은 채 밤새워 원고지를 메웠다. 작가의 한 맺힌 삶이 그처럼 독하게 글을 쓰게 밀어붙였다. "내가 행복했더라면 문학을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데뷔 직후 밝혔던 박경리씨는 "아이 데리고 부모 모시고 혼자 벌어먹고 살아야 했습니다. 불행에서 탈출하려는 소망 때문에 글을 썼습니다"라고 말한 바 있다. 경남 통영에서 태어나 진주여고를 졸업한 박씨는 1946년 김행도씨와 중매결혼해 1남1녀를 얻었지만, 전쟁 중 남편과 아들을 잃었다. 남편은 6·25 나던 해 서대문형무소에서 이감되던 중 행방불명됐다. "공산주의자라고 말할 수 없는 사람이었지만, 용공으로 몰려 사라졌어요"라고 생전에 박씨는 짧게 언급한 뒤 말을 아꼈다. 홀로 키운 딸(김영주)은 70년대 초 김지하 시인과 결혼했고, 박씨는 사위가 민청학련 사건으로 구속돼 옥고를 치르는 동안 딸의 가족 뒷바라지를 하면서 집필을 멈추지 않았다.


1955년 김동리 추천으로 현대문학을 통해 등단한 박씨는 《김약국의 딸들》(1962년) 《시장과 전장》(1964) 등의 장편소설과 현대문학상 수상작인 단편 〈불신시대〉 등을 잇달아 발표했고, 마침내 박씨의 문학세계는 대하소설 《토지》라는 거대한 강물에 이른다. "토지는 강 같이 흐르는 모든 생명의 흐름이에요"라고 한 박씨는 "한 인간의 비극이 아니라 600~700명이 등장하는 이 집단적 생명 자체가 뭉뚱그려진 숙명을 그리려고 했습니다"고 밝혔다. "땅, 대지, 흙 등의 단어를 놔두고 토지라고 명명한 것은 토지라는 말 속에 땅문서라는 인간의 사유재산 개념이 들어있기 때문"이라고 했던 박씨는 "사유재산의 시작과 함께 인간은 자연의 순수한 존재와 결별하고 역사의 단계에 들어갔어요"라고 설명했다. 《토지》는 TV 드라마로 세 차례나 제작되었고, 때마다 높은 시청률을 올렸을 정도로 한국인의 보편적 정서에 부합하는 서사의 힘을 발휘한 소설이기도 하다.

박씨는 생명 가치를 살리는 환경 운동에도 적극 나섰다. 1993년 환경운동연합 공동대표를 맡았고, "우리는 자연의 이자로만 살아야지. 원금을 까먹으면 끝이야"라고 말해 왔다. 1996년 토지문화재단을 창립해 이사장이 됐고, 1999년 토지문화관을 개관한 뒤 청계천 복원을 위한 세미나를 개최하면서 "생명의 물길을 복원하자"는 논의에 물꼬를 텄다.

박경리씨는 조선일보와 가진 생의 마지막 언론 인터뷰(본지 4월1일자)에서도 "우리가 그동안 지하수를 다 빼먹어서 실개천이 전부 건천(乾川)이 됐어요. 물길을 살려야 생태계도 복원되고, 장차 물전쟁 곡물전쟁에 대비할 수 있어요"라고 재차 강조했다.

"저도 한때 민족주의자였지만, 넓게 보면 민족주의는 지구촌에서 지역이기주의일 수 있다"고 한 박씨는 "세계가 당면하고 있는 환경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국가와 민족을 넘어서는 전 지구적 시야를 가져야 한다"고 젊은 세대에게 당부했다.

박해현 기자 hhpark@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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