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다는 것이 생명에 대한 연민이더라    
매체명 : 경향신문   게재일 : 2008-03-10   조회수 : 7310
[책읽는 경향]경남에서-토지  

“날씨가 풀리면서 깨진 얼음덩이는 햇빛에 희번덕이며 둥둥 떠내려가고…끝이 누우렇게 옹그라붙은 보리와 붉은 흙이랑에 봄서리가 내린다.” 삼동내 얼어붙었던 강과 들판이 풀리는 모습을 ‘토지’(박경리, 나남)는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100년 전 선조들은 또 한 해를 무사히 살아냈구나 하는 안도와 더불어 다시 보릿고개를 넘었을 것이다. 그 고개를 넘기 위해 산과 들을 헤매며 온갖 식물들을 벗기고 캐내 모진 삶을 이어갔을 것이다.

소설 ‘토지’는 땅에 기대어 살아온 순한 백성들의 이야기이며, 이데올로기가 개입되지 않은 민족의 이야기다. 아직 파릇한 보리를 우적우적 씹어 먹고 싶은 궁핍한 허기도 보이고, 인간들의 염치없음에 혀를 차기도 하며, 만석지기 사대부가 자신의 곳간을 열어 기근미를 나누듯 춥고 아슬아슬한 이웃들도 챙겨보게 된다.

“산다는 것은 생명에 대한 연민”이라는 작가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땅에는 먹고 먹히면서도 자신을 피워내는 생명이 지천이다. ‘토지’가 삶의 터전으로서의 토지를 제시했지만, 지금 우리에게 토지는 그렇지 못한 것 같다. 책은 뭇 생명에 대한 안쓰러움으로 가득 차 있고, 염치없는 인간들을 쉼 없이 나무라고 있기 때문이다.

〈 최영욱 시인·평사리문학관장 〉
이전글 독립운동가 기당 현상윤 선생 업적 담은 전집 출간
다음글 ‘속물 시대’ 해법을 찾아라
prev nex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