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에서-김종삼 전집
매체명 : 경향신문   게재일 : 2008-01-12   조회수 : 7642
[책읽는 경향]제주에서-김종삼 전집

낡은 시집을 하나 꺼내든다. 김종삼 시인의 ‘누군가 나에게 물었다’(민음사)이다. 하도 많이 봐 닳아서 옆 제목이 안 보인다. 그의 어느 시구처럼 ‘주먹만’한 제목의 활자들이 표지 앞면을 차지하고 있다. 고딕으로 찍힌 시들 42편 하나 하나가 거의 한 페이지씩을 차지하여 시집 전체는 56페이지다. 얇다. 하나 그의 또박또박 각진 글씨처럼 그의 시를 빨리 읽을 순 없다.

음악소리가 들린다. 그의 시집을 펼치면. 그때 나는 바닷가 방에서 홀로 바흐의 ‘조곡’을 수없이 반복해 듣고 있었다. 바흐의 음악은 천상의 소리처럼 나를 울려주고 있었다. 슬픔과 황홀함의 바다. 그후 김종삼의 이 시집이 내게 왔다. 바흐와 그렇게 맞을 수가 없었다. 바흐를 들으며 그를 읽으면 나는 하늘 저 편에 가 있었다.

그는 내게 ‘스와니강이랑 요단강이랑’ ‘그리운 안니·로·리’의 이국정서와 함께 ‘북치는 소년’ ‘미사에 참석한 이중섭씨’ ‘민간인’ 등의 슬픈 아름다움의 시인이었다.

한데 이 시집은 그런 기저를 유지하면서도 앞의 것들과 달랐다. 뭐랄까, 죽음이 보였다. 참회의 시, 고통의 시, 평화의 시. 대부분 10행 내외의 시들은 그 분량과는 비교도 안될 울림이 있었고 넓이가 있었다. 42편의 이 얇은 시집에서 울려오는 종소리 같은 것들이 참으로 멀리 퍼져나가고 있었다. 내 마음의 바다 깊숙한 곳에는 김종삼의 이 시집이 심해어의 빛처럼 떠다니고 있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 시집은 절판됐다. 대신 새로 출간된 ‘김종삼 전집’(나남)에서 그 향기를 느낄 수 있다.

한국시는 이 즈음 너무 말이 많아졌다. 짧고도 견고하게 빛나는 시. 올 봄에는 ‘작은 詩앗 채송화’ 동인이 선을 보인다고 한다.

〈나기철/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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