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있는 봄날] 저 높푸른 하늘 / 박정만
매체명 : 대구일보   게재일 : 2018-10-18   조회수 : 554

저 높푸른 하늘이 있었는지 나는 몰라/ 그것은 나에게 군말만 있었기 때문,/ 이제 철 지난 눈으로 저 하늘의 푸른 땅을 보나니/ 버리라 하면 다 버릴 것이다// 하지만 한 가지만 기다려보자/ 왜 생의 한나절은 내게 없으며/ 걸어가는 길섶에는 좋은 꽃도 없는지/ 나는 그것이 너무나도 그리웠다// (중략)// 저 높푸른 하늘을 좀 봐,/ 세상의 물그림자가 수틀처럼 걸려 있어/ 미리내는 한 별을 이 땅에 주고/ 별은 다시 또 하늘로 솟구쳐 날아오르지// 아무렴 저 꼭두서니 빛을 보라니까/ 저녁 산의 이마 위에/ 높푸른 하늘의 맑은 빛이 마냥 걸려서/ 내 꿈과 저승길로 걸어오는 걸/ 걸어와서 슬픔의 한 빛깔로 물드는 것을// 그래도 아직은 이것이 아닌 것 같아.
- 시집『혼자 있는 봄날』(나남, 1988)

 

박정만 시인은 출판사 고려원의 편집장 시절 1981년 ‘한수산 필화사건’에 휘말린 바 있다.
이때 당한 고문의 후유증을 술로 견디다가 1988년 서울올림픽이 끝나던 10월 2일 전셋집 화장실 변기 위에서 마지막 숨을 거두었다.

 
중증 간경화로 인한 급사였다.

 
그의 시집 서문에는 ‘1987년 6월과 8월 사이에 나는 500병의 술을 쳐죽였다’는 기록이 있다.
현실과의 타협을 포기하고 마지막까지 시인이기만을 고집했던 그가 죽기 전 1987년 단 20여 일 만에 무려 300여 편의 시를 신들린 듯 쏟아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 편을 후다닥 쓰고 나면 또 한 편의 시가 미리 대기하고 있었다고 한다.
이 시도 그 무렵 방바닥에 배를 깔고 엎드려 쓴 것이다.

 

시의 얼개는 짙은 서정성으로 밀도 있게 짜여 있다.
진작부터 향토적인 음률과 서정성은 소월과 미당, 박재삼에 이르는 서정시의 본류를 이어왔다는 평가를 받았던 그였다.
하지만 독백체로 노래한 이 시의 내포에는 야만의 시대를 살아가는 소시민의 소외와 탄식과 절망이 감춰져 있다.
그의 다른 시에서 ‘나는 사라진다.
저 광활한 우주 속으로’라는 구절이 떠오른다.
지금은 저 높푸른 하늘 미리내 가운데 한 별로 떠서 슬픔도 고통도 절망도 다 사라져 빛으로만 존재할까. 시인의 ‘저 가을 속으로’란 시가 있다.
“사랑한다, 사랑한다, 눈부신 꽃잎만 던져놓고 돌아서는 들끓는 마음속 벙어리 같아 (중략) 가을이 기우뚱 기우는 저 어둠 속으로”
오래전 덕수궁 ‘문화의 달’ 행사에서 당시 유인촌 문화부장관이 이 시를 낭독하였다.
낭독 후 말씀이 “박정만 시인을 직접 모셔서 낭독을 들었다면 더 좋았겠는데 아쉽습니다.
” 물론 작고 시인임을 알고서 하는 말이라 이해할 수 있겠으나 내겐 그리 들리지 않았다.
문화예술을 올바르게 이해하고 이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하려고 1972년부터 매년 10월을 문화의 달로 정하고, 문화예술진흥을 위한 여러 가지 문화행사를 벌이고 있다.
오랜 기간 서울에서 행사를 개최해오다가 2000년대부터 문화예술의 균형 발전을 위해 지역을 순회하면서 개최하고 있다.
올해는 19일부터 사흘간 순천만 일대에서 펼쳐진다.
이와 별도로 지자체별로 시행하는 문화 행사도 넘치는 10월이다.
내실과 효용 없는 형식적이고 낭비적인 축제와 행사도 적지 않다.
아무쪼록 저 높푸른 가을 하늘에 부끄럽지 않은 진정성이 깃든 행사이기를 기대한다.
유치원 비리처럼 나랏돈을 쓰는 행사에서 ‘먼저 보는 놈이 임자’란 말은 나오지 말아야겠다.
 
첨부파일 혼자있는 봄날_앞표지.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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