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시와 처벌] 인민재판이 어쨌다고?
매체명 : 비마이너   게재일 : 2018-05-14   조회수 : 594

68혁명과 푸코

 

 푸코에게 ‘철학교수’라는 직함이 붙은 건 1966년 튀니지의 튀니스 대학 철학과 교수로 부임하면서다. 거기서 푸코는 68년을 정점으로 하는 정치적 소용돌이 속에 던져진다. 1967년 이스라엘이 예루살렘을 침공하여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몰아내자, 튀니지에서는 친팔레스타인(반유대주의) 봉기가 일어난다. 이 시위는 처음엔 팔레스타인 형제들을 위한 것이었다가 점차 마오주의적 색채를 띠면서 정권타도 투쟁으로 확대되었다. 정부의 강경진압에 수많은 대학생들이 투옥되고 고문당했다. 푸코는 피신한 학생들을 집에 숨겨 주기도 하고, 학생들의 등사기를 자기 집 정원에 숨겨두고 유인물을 찍도록 했다. 그 때문에 푸코는 사복경찰의 위협을 받고 린치를 당하기도 했다. 하지만 과거의 식민모국이며 여전히 지배력을 행사하는 프랑스 출신의 대학교수라는 신분이 그를 지켜주었다. 동료교수들이 체포되고 자기 학생들이 고문당하는 것을 지켜보며 푸코는 지배자의 위치에서 안전한 자신에 대한 자책감과 봉기하는 자들의 열정을 가슴에 새겼다.

 

튀니지의 68혁명을 목격한 푸코는 프랑스의 68혁명이 끝나갈 무렵 프랑스로 영구 귀국했다. 푸코는 낭테르 대학의 심리학 교수를 제의 받았지만 더 이상 심리학을 가르치고 싶지 않았다. 대신 푸코는 68혁명으로 기획된 뱅센 실험대학(파리 8대학) 창설에 합류한다. 뱅센 실험대학의 교수 모집과 철학과 교수직을 제의받은 것이다. 68년 5월 사태에 깜짝 놀란 프랑스 정부는 계층 간 틈새를 메우기 위해 서둘러 ‘고등교육개혁’에 착수했다. 그 일환으로 신임 교육부장관 에드가 포르는 ‘학문간 벽 허물기와 학생 참여 운영, 그리고 자유’라는 원칙 속에서 뱅센 숲 안에 ‘실험대학’을 건립했다. 68정신의 총화로 탄생한 뱅센 실험대학의 교수진은 68혁명에 참여한 좌파 지식인들로 채워졌다. 교수임용 위원회에서 철학분과를 맡은 푸코는 프랑스 철학의 현대적 흐름을 대표하는 사람들을 한데 모으려 애썼다. 분파들의 난립, 이론적 수준의 차이, 정치적 성향의 중재라는 복잡한 함수 속에서 자크 라캉의 딸이자 자크 알랭 밀레의 아내인 주디트 밀레, 알랭 바디우, 자크 랑시에르, 에티엔 발리바르 등 우리에게도 익숙한 자들을 실험대학, 혹은 대학 실험에 참여시켰다.

 

1968년 12월에 문을 연 후에도 뱅센 실험대학은 소요가 끊이지 않았다. 1969년 1월 68혁명에 관한 다큐멘터리 상영을 막는 교육부에 항의하여 학생들이 대학을 점거하고 학내 기물들로 바리케이트를 쳤다. 정부는 강경하게 진압했고, 학생들은 수배되었다. 급기야 에드가 포르의 후임으로 온 교육부장관은 학생들의 무질서와 마르크스주의 일색의 커리큘럼을 문제 삼아 뱅센 대학의 학위를 인정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이에 푸코는 뱅센 대학에 자유를 약속하고서 막상 그 자유를 실천에 옮기려니까 탄압하는 정부의 기만성을 비난하며 “도대체 철학이 무엇인지를 내게 분명히 말해 달라.”고 반문했다.

 

푸코는 뱅센 실험대학에 2년간 있었다. 대학을 자본주의 체제의 일부로 여기는 뱅센의 급진적 분위기 속에서 푸코는 섹슈얼리티 담론, 니체의 권력 담론에 대해 강의했다. 그 사이 1968년 푸코의 스승 장 이폴리트가 사망했다. 그 후임으로 푸코를 콜레주 드 프랑스Collège de France 철학교수직에 앉히기 위한 뒤메질과 쥘 뷔유맹의 (그리고 죽기 전까지 장 이폴리트의) 노력 끝에 1970년 푸코는 콜레쥬 드 프랑스 철학 교수가 된다. 1530년 프랑수아 1세에 의해 설립된 콜레주 드 프랑스는 각 분야의 저명한 학자들이 자신의 연구 결과를 국민들에게 보고하는 식으로 강의하는 국립 성인교육기구이자 연구소이다. 학위나 자격증을 수여하지 않으며, 입학시험이나 수업료도 따로 없다. 이 국립대학의 강단에 선다는 것은 프랑스를 대표하는 학자의 반열에 들었다는 것을 뜻한다.


1970년 12월 2일 콜레쥬 드 프랑스 신임 철학교수의 개강연설에 수백 명의 청중이 몰려들었다. 뱅센 실험대학에서 건너온 푸코, 실험대학을 만들고 지키기 위해 싸운 그 푸코를 보기 위해 몰려든 것이다. 소르본 인근 도로에 철모를 쓰고 곤봉을 든 데모 진압부대와 경찰차량의 차단선을 건너온 청중들은 마치 68년 5월이 파견한 사절단 같았다. 이듬해 『담론의 질서』로 출간된 이 개강연설에서 푸코는 지식의 고고학으로부터 권력의 계보학으로 이동하는 자기 작업의 성격을 천명한다.

오늘 저녁, 나의 작업장 - 또는 매우 일시적인 극장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 에서 내가 개진하고자 하는 가설은 이것이다. 어떤 사회든 담론의 생산을 통제하고, 선별하고, 조직화 하고 나아가 재분배하는 일련의 과정들, 즉 담론의 힘들과 위험들을 추방하고, 담론에서 야기될 수 있는 우연한 사건을 지배하고, 담론의 무거운, 위험한 물질성을 회피하는 일련의 절차들이 존재한다.1)

담론의 “무시무시한 물질성”, 담론의 “부단하고 무질서한 웅성거림”을 제거하려는 담론통제장치에 대한 비판은 ‘68혁명이 파견한 사절단’을 향한 답례이다. 강의 말미에서 푸코는 콜레주 드 프랑스 철학교수의 자리를 넘기고 죽은 장 이폴리트에게 헌사를 바친다. 거기서 푸코는 철학이란 “경험의 극단적인 불규칙성 속에서 존재할 수 있는 것, 삶 속에서, 죽음 속에서, 기억 속에서 끊임없이 다시 취해지는 ‘물음’으로 주어지고 탈취되는 것”, 철학은 ‘완성’이 아니라 ‘반복적인 물음’이기 위해 “언제나 뒤에 물러앉아 획득된 일반성들과 관계를 끊고 비철학과의 접촉을 시작해야 한다.”고, 그것이 자신이 이폴리트의 헤겔 강의에서 배운 바라고 말한다. 프랑스 대학제도의 성자반열에 서서 대학 담론과 철학 담론을 비판하는 게 역설적으로 보일지 모른다. 어쩌면 그 자리에서야 비로소 그 물음을 던질 수 있을지 모른다. ‘철학하기란 무엇인가?’ 78년의 한 인터뷰에서 푸코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나 자신을 철학자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내가 하는 것은 철학을 하는 방식도 아니고, 다른 이들에게 철학을 하지 말라고 제안하는 방식도 아닙니다. 나로 하여금 기존의 대학 교육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해준 가장 중요한 저자들은 프리드리히 니체, 조르주 바따이유, 모리스 블랑쇼, 삐에르 클로소프스키 같은 이들이었습니다. 이들 모두는 엄격한 제도적 의미에서는 철학자가 아니지요. 내가 그들에게 끌렸던 가장 큰 이유는 그들이 체계를 구축하는 데 관심을 보인 사람들이 아니라, 직접적이고 개인적인 경험들을 손에 넣는 데 관심을 기울인 사람들이라는 점이었습니다.2)
 
감옥정보그룹 활동가 푸코

 콜레주 드 프랑스 개강연설에서 시적으로 묘사한 담론통제의 대상, 즉 담론의 “무겁고도 무시무시한 물질성”, “담론의 이 부단하고 무질서한 웅성거림”은 대학 강단에서 말해질 수 있는 게 아니다. 담론의 위험한 물질성, 그 속에 웅성거리는 힘의 의지는 “직접적이고 개인적인 경험들을 손에 넣어야”만 포착할 수 있고 말해질 수 있다. 푸코는 그 직접적 경험의 장소로 감옥을 택했다. 1971년 2월 푸코는 ‘감옥정보그룹’을 결성했다. 그 선언문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우리는 감옥이란 무엇인지, 누가 거기에 가고, 어떻게 왜 거기에 가는지, 거기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죄수들과 그 감시원들의 생활은 어떤 것인지, 감옥의 건물, 음식, 위생 상태는 어떠한지, 내부 규칙과 의학적 통제와 작업장은 어떠한지를 세상에 알리고 싶다. 그리고 거기에서 어떻게 빠져나오는지, 또 우리 사회에서 출소자들의 지위는 어떠한 것인지를 역시 알리고 싶다.3)

감옥정보그룹은 68년 5월 이후 투옥된 좌파 투사들의 감옥 내 투쟁이 계기가 되어 결성되었다. 1970년 9월 투옥된 투사들 29명이 정치범으로서의 특별대우를 요구하며 단식투쟁을 했다. ‘공안재판소’에서 재판받지 않고 ‘파괴방지법’에 의해 기물파괴자로 수감된 투사들은 일반사범과 같은 방에서 똑같은 처우를 받아야 했기 때문이다. 1971년 외부에서의 단식투쟁과 ‘붉은 구원대’의 시위로 좌파 수감자들의 투쟁은 거리로 확산되었다. 푸코도 시위에 참가했다. 시위 도중 마이크를 건네받은 푸코는 감옥정보그룹 선언문을 낭독했다. 푸코의 선언문으로 시위의 성격이 바뀌었다. 좌파 투사들의 특별대우를 요구하는 게 아이러니하다는 인식이 퍼지면서 모든 수감자에게 가해진 감옥의 억압 체제에 대한 고발로 운동의 성격이 바뀐 것이다.

푸코의 선언이 나온 지 얼마 후 감옥정보그룹은 예고한 조사활동을 시작했다. 수감자 가족들을 대상으로 설문지를 돌리고 선언문에 언급된 정보들을 수집하기 위해 감옥에 관련된 모든 사람들, 출소자, 간수, 의사, 변호사, 그 외 제보자들을 모아 팜플렛을 만들었다. 질 들뢰즈를 비롯해서 자크 동즐로, 클로드 모리악 같은 지식인들도 감옥정보그룹에 합류했다. 푸코는 직접 우편물을 발송하고, 수천 통씩 전화를 돌리면서 이 운동을 실질적으로 이끌었다. 1971년 11월부터 프랑스 전 지역의 감옥에서 저항운동이 일어났다. 대표적으로 뚤르(Toule) 감옥에서 폭동이 일어나 진압과정에서 15명의 수감자들이 부상당했다. 정부의 탄압에 맞서 푸코는 ‘진실-정의 위원회’를 만들어 정보를 수합했다. 감옥의 참혹한 실태를 고발한 감옥 담당 정신과의사 에디뜨 로즈의 글이 푸코의 서문과 함께 신문에 대서특필 되어 파장을 일으켰다. 곳곳에서 수감자들의 폭동이 일어났고, 법무장관은 재소자 폭동을 부추긴다고 감옥정보그룹을 비난했다. 흥미로운 건 공산당 신문 역시 ‘불한당 노조’의 소요를 종식시키라고 공권력에 요구했다는 점이다.

감옥정보그룹은 정보수집과 팜플렛 배포에 그치지 않고 시위도 조직했다. 감옥과 세상의 소통을 위해 크리스마스 전날 감옥 앞에서 이벤트를 열고 연극공연을 하기도 했다. 감옥정보그룹은 대단한 성공을 거두어 프랑스 전역에 지부가 결성되었다. 운동을 주도한 사람들은 주로 마오주의 투사들이었지만 좌파 서클을 넘어 변호사, 의사, 성직자들도 참여하여 비공식적으로 2~3천명의 회원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성공은 오래 가지 않았다. 푸코는 처음에 약속한 대로 출소자들에게 발언권을 넘겼다. 그래서 결성된 ‘죄수행동위원회’는 ‘정보수집’에서 ‘행동’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정보수집의 네트워크 대신 행동조직으로 방향이 바뀌면서 활력이 떨어졌다. 1976년 감옥정보그룹은 해체됐다.
 
왜 감옥정보그룹은 성공했고, 죄수행동위원회는 실패했을까? 전자는 온건한데 후자는 과격해서? 전자는 명망가 중심인데 후자는 출소자 중심이라서? 새로운 문제를 제기하는 조직의 활력과 당면한 문제에 답해야 하는 조직의 곤란 때문이 아닐까? 전자는 감옥에 관한 각종 정보를 수집하여 문제를 제기하는 조직이다. 정치범을 일반사범과 다르게 대해달라는 좌파의 문제제기를 감옥에는 어떤 사람들이 있고, 거기서는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 라는 문제로 바꾼 데서 활력이 생겼다. 감옥은 도시 안에 있고 우리들 중 많은 사람들이 거기 가지만 아무도 ‘감옥’에 대해 진지하게 묻지 않는다. 마치 물을 필요도 없이 자명하다는 듯이. 감옥정보그룹은 그런 자명성 속에 은폐된 감옥의 본질적 기능에 대해 물었다. 그 문제제기는 근원적이면서 새로웠고 감옥 뿐 아니라 감옥을 필요로 하는 사회에 대해서도 새로운 사유를 촉발했다.

반면에 죄수행동위원회는 행동을 조직하고 요구사항을 제시하는 조직이다. 이 조직은 우선 자기 조직의 정체성에 관한 문제에 답해야 한다.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지배 권력의 억울한 희생자인가, 사회 부적응자인가, 체제 전복자인가? 정체성의 문제는 요구사항의 문제와 연결된다. 무엇을 어디까지 요구할 것인가? 재소자 처우개선만 요구할 것인가? 감옥 시스템 자체의 폐지까지 나아갈 것인가? 재소자에게 합당한 인권은 어디까지인가? 이 문제에 답하다 보면 곧 우리는 다 같은가? 우리는 모두 정당한가? 감옥은 우리 모두에게 필요 없는 곳인가? 라는 분열을 내포한 회의에 직면하기 십상이다.

감옥에 갇힌 사람이 전부 같지는 않다는 다름의 인식은 감옥에 대한 대중들의 인식과 그들 자신의 인식이 별반 다르지 않기 때문에 생긴 것이다. 감옥에 대해 지배적 인식과 다른 사유를 갖는 것, 외부의 시야를 만들어내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단지 자신의 억울하고 고통스런 경험을 토로한다고 되는 게 아니다. ‘현재’에 갇힌 관점으로부터 해방시켜 줄 푸코 같은 고고학자도 필요하고, 감옥과 연결된 다른 권력장치에 예속된 사람들과 연대하고 정보도 교류해야 한다. 네트워크로 이뤄진 전체에 대한 통찰의 넓이만큼 자기에 대한 인식도 날카로워지고 그런 만큼 새로워진다. 죄수행동위원회가 봉착한 난관은 오늘날 장애인운동이나 다른 소수자 운동, 정체성 운동 그룹들도 직면하고 있는 문제이다.

인민재판이 어쨌다고?

이 시기 푸코는 이주노동자 운동과 반인종주의 시위에도 적극 참여했다. 1971년 한 알제리 청년이 아파트 경비원의 남자친구가 쏜 총에 살해되었다. 71년의 분위기는 이 사건을 가만두지 않았다. 수천 명이 시위대가 인종주의 반대 데모에 나섰고, 푸코는 파리 아랍인 거주지역의 생활조건을 조사하기 위한 위원회를 조직했다. 72년 12월 알제리출신의 한 이주노동자가 경찰서에서 죽은 사건이 일어났다. 이에 항의하는 시위대 맨 앞에 푸코가 있었다. 프랑스 전역에서 마오주의자들이 ‘진실-정의 위원회’를 설치했고, 푸코는 그 위원회가 조직한 집회에 적극 참여했다. 당시 푸코의 정치적 실천은 ‘감옥’, ‘경찰’ 등 사법장치를 타겟으로 하고 있었으며 마오주의자들이 주도한 민중적 사법 운동, 즉 ‘진실-정의 위원회’ 활동과 겹쳐 있었다.

1970년 랑스에서 광부들이 탄광에서 사망한 직후 마오주의자들은 경찰의 미온적 태도를 비판하고 탄광회사를 고발하기 위해 인민재판소를 설치하고 싶어 했다. 푸코는 <현대> 지에서 마오주의자인 빅토르와 인민재판에 대해 대담을 가졌다. 이 대담에서 푸코는 일관되게 ‘재판’이라는 사법장치의 부르주아적 성격을 문제 삼았고, 빅토르는 프롤레타리아의 혁명적 이념이 구현된다면 재판 제도는 괜찮고, 또 반드시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푸코는 우선 사법제도의 역사를 거론했다. 중세까지 형벌제도는 주로 ‘징세’ 기능을 맡았고, 민중 봉기에 대한 탄압은 ‘군인’이 맡았다. 근대에 와서 사법-경찰-감옥 장치가 민중봉기를 억압하는 국가장치로 자리 잡았다. 프랑스 혁명 후 1792년 파리 코뮨에 세워진 인민재판도 이 과정에 한몫 했다.

푸코가 인민재판에 반대한 이유는 적대적인 양 편 사이에 진실을 판정하는 제3의 심급을 두기 때문이다. 중립적이고 객관적인 진실에 복종한다는 재판의 배치와 형식 자체가 부르주아적 국가장치라는 것이다. 푸코가 보기에 그것은 인민적 정의를 실현하는 형식이 아니다. “진정한 인민적 정의는 세 요소가 아니라 민중과 적이라는 두 요소가 있을 뿐입니다.”4) 재판의 공간적 배치와 함께 소송당사자들 사이에 공통의 카테고리(절도, 사기, 기물파손 같은 형사 카테고리와 성실, 불성실 같은 도덕 카테고리)를 설정하고, 모두 거기에 승복할 것을 전제로 하는 것 역시 부르주아적 정의이지 인민적 정의라 할 수 없다. 적대적인 당사자 뒤에서 중립적이고 객관적인 진실을 판정하는 제3자란 결국 지배적 이데올로기를 대변하는 쁘띠부르주아 계급, 지식인들이다. 객관성, 중립성, 보편성의 원리로 구성된 인민재판은 결국 인민을 배반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푸코의 주장이다.

이에 대해 빅토르는 혁명의 초기 단계에는 자생적 인민재판, 즉 민중적 복수가 불가피하게 필요하지만, 혁명의 성숙기와 프롤레타리아 독재 단계에는 그렇지 않다고 한다. 그때는 자생적 복수를 금지하고, 대신 이성적이고 보편적이고 과학적인 사법적 정의를 구현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대중운동은 그 자체로는 부족하고 프롤레타리아 당파성에 의해 방향 지도를 받아야하기 때문이다. 당의 목적의식적이고 과학적인 지도가 없을 때 대중운동 내부에 충돌이 빚어지는데 그것을 중재하는 것이 재판의 형식이라고 한다. 인민들 사이의 분열과 충돌에 대해 푸코는 그거야말로 근대 사법장치의 산물이라고 받아친다. 부르주아 계급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노동자 계급이 폭도가 되어 거리로 뛰쳐나오는 걸 막는 일이다. 그러기 위해 노동자 계급과 거리의 대중(mob)을 분리시켜야 한다. 루이 보나파르트처럼 룸펜 프롤레타리아들을 반혁명부대로 조직하거나 군대로 보내거나, 식민지로 유배를 보내는 것이 전통적인 방법이었다. 보다 근대적인 방식은 확장된 경찰-감옥 제도를 통해 노동자 계급과 그 밖의 반사회적 인민들을 분리하는 것이다. 감옥 제도는 범죄 행위와 프롤레타리아 투쟁 간의 거리를 벌려놓는 효과를 발휘했다. 비행자, 좀도둑, 강도, 깡패, 부랑자, 방탕아, 기물 파손자, 마약중독자들의 반-사회성(범죄성)과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반-사회성(혁명성) 사이에 소통 불가능한 장벽이 쳐질 때 그 장벽의 효과로(범죄자에 대한 공포 속에서), 혹은 학교, 공장, 군대, 가정에서의 규율과 도덕의 효과로 노동자계급은 범죄와 범죄자에 대해서 부르주아와 동일한 가치체계를 내면화하게 되었다. 그 결과 71년 좌파 재소자들이 자신들을 일반 범죄자들과 똑같이 대했다고 항의했고, 푸코는 감옥정보그룹 활동으로 두 반체제 인민 간에 소통의 길을 만든 것이다.

푸코와 빅토르의 논쟁은 사법을 포함한 억압적 국가장치를 어떻게 볼 것인가의 문제로 확장된다. 빅토르는 맑시스트들의 전통적 신조대로 혁명을 통해 억압적 국가장치를 장악하고 그 장치를 프롤레타리아 독재 장치로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에 반해 푸코는 그 국가 장치를 해체하지 않는 이상 혁명은 반혁명으로 귀결된다고 주장한다. 비유하면, 빅토르는 국가적 억압 장치라는 “몽둥이를 반대 방향으로 비틀어야 한다.” 말하고, 푸코는 “몽둥이를 꺽어 버리면 된다.” 말한다. 이것이 1975년 『감옥의 탄생: 감시와 처벌』으로 표현된 푸코의 권력 이론이 생성된 현장의 논쟁 상황이다. 

1973년 사르트르는 벨기에의 한 잡지사와 가진 인터뷰에서 “나는 마오이스트와 한편으로” 푸코의 주장이 “민중적 사법을 단순한 폭력행위로 인식하게 만든다.”며 비판했다. 인민적 정의는 무분별한 복수가 아니라 분별 있는 재판의 형태로 이뤄져야 한다는 것이다. 사르트르의 이 발언은 1972년 내내 신문 사회면에 오른 ‘르루아 사건’과 관련한 것이다. 프랑스 북부의 광산도시에서 16세의 한 소녀가 피살됐다. 예심판사는 탄광회사의 부동산 관리인 르루아의 혐의를 인정하여 그를 구속시켰다. 검찰청이 피고인의 보석을 요구했지만 예심판사는 거절했다. 도시의 모든 노동자들이 부르주아의 사법에 대항하는 그 예심판사를 지지했다. 마오주의자들은 진실-정의 위원회를 설치하는 한편 <해적>이란 신문을 통해 부르주아지가 은폐한 계급적 정보를 쏟아냈다. 주된 내용은 “평화롭게 할머니를 만나러 가던 한 노동자의 딸이 갈기갈기 찢겼다. 그것은 식인과도 같은 잔학행위다. 부르주아 사법의 판결이 어떠하든 간에 르루아는 인민재판의 판결을 받아야 할 것”이라는 것이다. “그런 짓을 할 사람은 부르주아밖에 없다”는 인민적 감각이 사태의 흐름을 결정했다.

그러나 마오주의자들과 친한 <인민의 대의> 지 사장 사르트르는 증거도 없이 한 사람을 죄인으로 몰고 가는 것은 민중적 정의가 아니라 ‘린치’일 뿐이라고 마오주의자들을 비난했다. 인민재판에 대한 논쟁에서 마오주의자들의 지향점과 같다던 사르트르가 마오주의자들의 인민재판에 반대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에서 푸코는 어떤 입장이었을까? 마오주의자 친구 클로드 모리악의 일기에 따르면 푸코는 마오주의자들의 입장에 가까웠다. 모리악이 “증거도 없이 유죄선고를 하는 건 문제가 아닌가요?” 라고 하자 푸코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 개입이 없었다면 르루아는 석방되었겠지요. 파스칼 판사는 상부의 압력에 굴복했을 겁니다. 항상 보호만 받고 있던 북부의 부르주아가 이처럼 보호벽 밖에 내던져진 것은 난생처음일 겁니다."5) 미투(Me Too) 운동에 대해 인민재판 하냐고 비난하는 이들에게 푸코는 뭐라고 할까? 인민재판 하냐고? 인민재판이 어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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