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정1] "현실에 살지 말고 역사에 살라" 온몸으로 쓴 김준엽의 현대사 대장정
매체명 : 세계일보   게재일 : 2017-08-29   조회수 : 770

냉전적 대결과 권력투쟁으로 점철된 한국현대사의 격변은 지금껏 이분법적 대립구도를 초래해왔다.

 

그러나 김준엽(1921∼2011·사진) 전 고려대 총장은 양자의 어느 극단에 서지 않은 선비로 전해진다. 광복군 출신으로 대한민국 건국의 초석을 닦았으며 군부독재에 항거했지만, 드물게 양심의 훼손을 경험하지 않은 인물이다. 만일 그가 생존해 있다면 지금의 ‘건국절’ 논란은 간단히 정리되었을 것이다. 보수-진보 대결로 비화된 이 같은 논란은 결국 당시 상황을 제대로 기억해내지 못한 결과로 볼 수 있다.
장정은 그 해결의 단초가 될 수 있는 책이다.
‘장정’ 전 5권은 몸으로 쓴 김준엽의 현대사다. 1940년대 재중국 대한민국임시정부와 광복군의 투쟁, 해방 전후의 사실들이 손에 잡히게끔 생생하게 서술되었다. 제 1, 2권에는 1945년 8월 18일 ‘광복군 국내정진군’의 일원으로 여의도 비행장에 내린 애국 청년의 역사적 현장체험이 담겼다.
김준엽은 1985년 전두환에 의해 고려대 총장직에서 물러난 이후 장정 집필을 시작해 2000년 무렵 완성했다. 무려 16년이다. 나남출판사는 올해 ‘장정’ 개정판을 새롭게 재편집 출간해 보다 쉽게 해방 전후 시기를 이해하도록 보완했다.
김준엽은 장정 제 1권 서두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나의 가장 중요한 시기인 20대에 중국에 가게 된 것은 일제의 학병으로 끌려 나갔기 때문이다(당시 일본 게이오대 유학). 하지만 나는 이를 기회 삼아 철들면서 동경했던 임시정부와 광복군을 찾아가는 데 성공했다. 나는 목숨을 걸고 일본군 부대를 탈출했다. (장제스 산하) 중국 유격대로 넘어가 항일투쟁을 하였고, 이 유격대가 공산당의 공격으로 궤멸되면서 국공 투쟁에 휘말리기도 했다. 그로부터 중경(重慶)으로 가는 6천리 장정의 길에 나섰다.”
“안휘성 임천에서 김학규 장군이 이끄는 광복군에 참가하여 중국군관학교 부설의 한광반(韓光班·한국광복군 특별훈련반)에서 훈련받은 다음, 다시 장정을 계속하여 중경 임시정부에 가담하였다. 이범석 장군의 부관이 되었고, 서안에 있는 광복군 제2지대에서 OSS(Office of Strategic Service) 특별훈련을 받고 지하공작원으로 국내에 진입하려던 때에 일본의 투항(항복)을 맞이했다.”
“그러나 미국 측의 비협조로 국내 진입의 목적은 달성하지 못했다. 이청천 총사령관을 수행하여 일본군 내에 있던 한적사병(韓籍士兵)들을 광복군으로 편제하는 일에 종사했다. 이때 김구 주석을 비롯한 임정요인들은 ‘개인자격’으로 환국했다.”
김준엽에게 이 시기는 격동의 나날이었다. 아울러 임시정부와 광복군에 참가하여 일제 침략자들과 싸운 영광의 시절이기도 했다. 그는 1년 반이라는 짧은 시간밖에 항일전쟁에 참가하지 못했다. 그러나 누구보다도 당시를 생생히 기억했던 몇 안 되는 인물이다. 
그는 1권 서두에서 “내가 목격하고 체험한 독립투쟁이란 지극히 미미한 것에 지나지 않지만, 감히 내가 이 수기를 남기려는 까닭은 독립운동에 헌신한 많은 열사들이 본인의 직접 경험을 회고록으로 남긴 것이 거의 없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장정에는 독립운동사 연구에 중요한 사실들이 많이 담겨 있다.
‘장정’을 읽으면 장준하의 ‘돌베개’나 신상초의 ‘탈출’, 이범석의 ‘우등불’이 떠오른다. 특히 장준하는 김준엽의 가장 친한 친구였고, 이범석은 그의 직속상관이었다. 장준하의 행적은 ‘장정’ 곳곳에도 나와 있다. 두 사람의 삶은 적지 않은 부분에서 같은 궤적을 보여주었다. 김준엽의 학병 탈출은 유럽 지식인의 나치 탈출에 비견될 만큼 목숨을 건 행동이었다.
중국사를 연구하는 학자의 길을 걸었던 김준엽은 모두 12번이나 정치 참여 권유를 받았다. 장정 4권에는 박정희 정권 시절을 비롯해 1980년대 말 국무총리를 맡아 달라는 노태우 정권의 요청을 끝내 사양했던 사연을 구체적으로 밝혔다. 5권에선 김영삼, 김대중 정권의 입각 권유를 고사했던 사실도 밝혔다.
“대신 내가 한 일은 1987년 헌법 개정 때 대한민국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는 것을 헌법 전문에 명시토록 하고, 1993년 민족정기 앙양을 위해 임시정부 요인들의 유해 봉환과 구 조선총독부 건물의 철거를 건의해 관철시키는 등 국가의 정신적 기틀을 바로잡은 일이었다.”
장정에는 과거사를 제대로 청산하지 못한 해방 공간의 혼란상과 주체적으로 대한민국을 건국할 수 없었던 시대적 상황이 객관적으로 기술되어 있다. 아울러 김일성 역시 일제 항복 직전에 준비했던 국내 진공작전 실패로 인해 소련의 앞잡이로 전락한 과정이 서술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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