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회 지훈문학상

수상자
장석남
수상작품
《꽃 밟을 일을 근심하다》
수상자의 말

며칠째 수상 소식의 의미를 새기고 있습니다. 그 인연이 어떻게 연유한 것인가, 내 생애에 간단치 않은 의미가 될 텐데 그것은 또 무엇인가. 웬일인지 또렷이 눈앞에 내놓고 바라보기보다는 저만치 베보자기 같은 것으로 가려 놓은 채 바라보고 또 바라보고 하는 듯한 생각의 이어짐입니다. 분에 넘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사랑이 싹트는 때의 기분이랄까 오래 원하던 물건을 마침내 취하고는 망설이며 쉬 펼치지 못하는 심정이랄까 아무튼 내게 ‘지훈’ 선생이라니…하는, 벅차고 무겁고 그러나 파고들수록 식을 줄 모르는 따스한 구들장이 놓여 있을 듯한 크고 귀하고 설레는 시간이었습니다.

다들 그렇듯이 교과서에서 선생의 시를 배웠으나 고등학생으로 그 시의 살에 닿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당시엔 다만 고요한 옛날의 이미지만이 전해졌으니 그 각인의 깊이가 깊은 것이 이상한 일이기는 했습니다. 지금으로 치면 고등학생에 해당하는 나이에 선생이 그러한 세계를 안팎으로 거느렸다는 그 조숙이 놀랍기만 합니다.

친구의 초대로 남도를 다녀왔습니다. 바닥에 붉은빛 낭자한 동백숲을 보았고 치솟은 대나무의 울창한 사잇길을 걸었습니다. 때마침 쏟아진 빗물로 계곡물은 불어 청년의 질주처럼 소리를 내며 흘렀고, 건너가니 암벽 뒤에 아리따운 정원이 고요히 숨어 있었습니다. 유상곡수(流觴曲水)가 둘러 나가고 그 앞에 낮은 정자가 먼 옛날의 주인을 고대하는 듯 앉아 있었습니다. 화단마다 모란이, 영산홍이 제철이었습니다. 묵은 매화 등걸과 뽕나무 등걸이 도드라질세라 돌담에 스며서 고전처럼 묵은 목피를 검게 적시고는 의젓했습니다. 낙숫물 떨어지는 처마 

아래 앉아 멋에 대해서, 옛것에 대해서, 풍류에 대해서, 지나감에 대해서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것들에 참여하고 싶다는 강한 욕구가 솟는 것을 느꼈습니다. 옛사람이 될 수는 없으니 지금을 사는 이로서 그 시간과 그러한 멋의 사상에 참여하는 방법이란 무엇일까 궁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거기 지훈 선생도 오랫동안 환영으로나마 함께했습니다.

봄이 한창이어서 마당가에 심은 서너 주의 소나무 순이 삐죽삐죽 올랐습니다. 들락거리며 그것들을 다듬습니다. 가위를 들고 딸깍거리며 붐비는 가지를 솎아줍니다. 솔향이 오지요. 손에 송진이 묻어 끈적입니다. 이 소감문을 작성하는 순간에도 손금에 송진이 묻어 끈적입니다만 괜찮습니다. 지훈 선생의 삶에서도 손에 송진이 묻었을 것을, 손톱에 바위 이끼가 끼었을 것을 압니다. 송진 묻은 커다란 손에 펜을 쥐고 소나무 같은 생각과 문장을 썩썩 적어 나갔을 것을 상상하는 계기로서도 이 상은 복되고 복됩니다.


일찍이 시골 한적한 언덕 아래에서 거름이나 내다 쓰러지자는 희망을 품었습니다. 근처에 숨은 바위가 있다면 거기서 땀을 식히자고도 생각했었습니다. 붓길도 좀 알아야겠기에 고산 선생 서실을 들락거리며 먹물 다루는 것도 흉내 내 보았습니다. 옛사람의 귀를 가지고 싶어 김영재 선생으로 내려오는 신쾌동류 거문고 산조의 선생에게도 출입해 보았습니다. 종로 시장에서 매화분을 사다가 죽인 것도 여럿입니다. 무엇 하나 제대로 이룰 수 없을 줄은 애당초부터 알았지만 그만한 사치는 부려보고도 싶었습니다. 황해바다 한 점 섬의 근거 희박한 가계에 대해서는 일찍이 부끄러울 것도 없이 드러낸 심사라 덮어 두고 그러한 끌림이 어디서 연유했는지 저로서도 알 수는 없습니다. 남명으로 대표되는 조선 유학의 산림처사들의 그 개결성이라던지 산문(山門)을 빛낸 스님들의 일화가 너무나 좋았습니다. 그분들의 언어에 통달하지 못하는 것이 내내 아쉬운 일입니다.

거기에서 기본자세의 중요성을 어렴풋이 깨달았습니다. 유장한 거리를 가로질러 멀리 도달하려면 팔랑거리는 자세 가지고는 되지 않는다는 것쯤은 알게 되었습니다. 제가 근래 좋아하는 운동인 탁구로 비유하면 아래에 묵직한 무게를, 중심에서 바로 세워 주는 균형추를 갖추지 않고서는 기본자세는 나오지 않습니다. 잔재주로 동네 탁구장에서나 거들먹거릴 심사로서는 이미 망한 셈입니다. 그 상스러운 재미에 맛을 들이면 기본으로 다시 돌아오기는 처음 시작하는 것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그런 자들이 이제 시작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많이 자세를 가르치려 달려들기도 하는 것을 보면 어디나 어처구니없는 자들은 있게 마련인 모양입니다. 삶을 대하는 자세에 따라서 시와 예술은, 아니 모든 정신에서 소출된 품목의 경도는 결정된다고 봅니다.

지훈 선생에게서 그 전형성을 보게 됩니다. 만해와 매천의 삶을 앙모하여 기렸다고 하니 영남 사림의 맨 마지막 인물 같은 이미지에 일찍이 조숙한 고아한 시경에 진입한 데다 여러 방면의 민족문화사에 대한 심도 깊은 연구와 안목, 역사가 어떻게 추동해 가야 하는지 그 주체가 어디가 되어야 하는지까지 지훈 선생의 지혜와 지조와 선비적 멋은 실로 크고 높은 모범이 아닐 수 없습니다. 

평생 숙제를 하나 받아 들었다는 것은 우선 명확한 듯합니다. ‘지훈’이라는 한 시대의, 아니 우리 공동체의 역사에 영원히 맑은 뿌리를 얽은 시인이고 사색인이고 개결한 정신의 표상을 늘 가까이 두고 그 눈빛 아래 살아야 한다는 숙제는 무겁겠으나 저와 같은 의지박약한 인간에게는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요. 나아가 좀처럼 그 깊이를 드러내지 않을 우물과도 같은 학문과 시의 세계를 남기고 있으니 그 속으로의 두레박질은 얼마나 시원하고 즐거운 숙제가 될 것인지요.


선생의 산문 〈돌의 미학〉에 이르러서 저는 무릎을 치며 발을 구르며 그분의 세계를 환하게 안아 들였습니다. 초기의 〈돌의 얼굴〉이니 〈돌의 새〉니 하는 시편들이며 최근까지도 나를 떠나지 않는 ‘바위’ 운운하는 유의 시들은 모두 선생의 이 깊은 사색을 드러낸 명산문의 자장 안에서 소박하나마 펼쳐진 것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 바위에는 큰 나방이가 한 마리 붙어 있었다. 나는 그것이 자꾸만 열리지 않는 돌문 앞에 매어 달려 울고 있는 것으로 느껴졌다. 주먹으로 꽝꽝 두드려 보면 그 바위는 무슨 북처럼 울리는 것도 같았다. 이 석문(石門)을 열고 들어가면 맷방석만 한 해바라기 꽃송이가 우거지고 시원한 바다가 열려지는 딴 세상이 있을 것도 같았다. 나는 이 바위 앞에서 바위의 내력을 상상해 본다.”(조지훈, 〈돌의 미학〉 중) 같은 구절을 만나고는 “바위 위에 팥배나무의 하얀 꽃잎들이 앉아 있습니다/ 바위 속이 훤히 들여다보입니다//팥배나무와/바위/사이/꽃잎들이 내려온/길들을/다/걸어보고 싶습니다”(〈길〉 전문) 같은 제 졸시의 내력과 크게 다르지 않은 일체감에 가슴으로 환호했던 기억이 납니다. 


이십여 년째 성북동 한 모퉁이에서 살며 아이를 키웠습니다. 일찍이 삶의 터전을 그 동네로 이끌었던 것이 어렴풋이 있습니다. 만해나 상허, 근원, 수화 같은 분들의 글과 동네에 얽힌 일화들이 너무나 향기로워서였습니다. 물론 앞의 산문 말미에 지훈 선생이 배치해 둔 당신 생애의 한 장면 또한 너무나 선명해서 이즈음도 집으로 걸어올 기회가 있을 때마다 빠짐없이 선생의 기분을 환기하면서, 조금은 억지스럽더라도 동일시하면서 걷게 될 때가 있습니다. 남들은 알 수 없는 혼자만의 자부심 같은 것이 솟기도 합니다. 스스로 멋스럽기 한량없다 여깁니다. 그분과 내가 같은 지형을 걷고 북한산의 같은 높이와 이름의 바위를 이마에 얹어 놓는 대화를 나누는구나 하는 자부심 말입니다. 이 산문의 마지막은 다음과 같습니다. “혜화동 고개에 올라서서 성(城) 돌에 앉아 우이동 연봉을 바라보는 맛, 삼선교에서 성북동 뒷산을 보며 황혼길을 걸어오는 맛은 동양화의 운치가 있다. 석산과 송림 위로 지나는 사계의 산기(山氣) 기운과 바람소리의 변화를 보고 들으며 내 암석사상의 풍상의 열력(閱歷)을 샅샅이 알고 있는 옛집에서 조용히 늙게 될까 보다. 예지와 정감과 의지의 혼융체–이제사 전체로서의 바위의 묘경(妙境)이 알아질 듯도 하다.”(조지훈, 〈돌의 미학〉 중)

그 묘경에 저도 언젠가 참여하고 싶습니다. 선생이 살던 집터에는 조그만 표지석이 있습니다. 가끔 그 바로 곁의 세차장에 갈 때가 있습니다. 차를 두고는 이리저리 둘러볼 때가 있습니다. 그분이 누웠던 자리가 어디였을지, 대문이 어디에 있었을지 가늠하기 쉽지 않으나 그것만으로도 한결 그분과 가깝게 느껴지는 것을 알게 됩니다. 선생의 병이 깊어지면서 말년에 선생은 그 집터를 싫어했다고 합니다. 그 위쪽 양지바른 터를 장만하고 새로 집을 지어 이사하려던 와중에 그만 안타까운 일이 일어났다고 하니 또한 착잡한 마음까지도 동시에 일어나곤 했습니다. 


‘지훈상’의 과분한 명예와 숙제를 안겨준 시집 《꽃 밟을 일을 근심하다》는 공교롭게도 제가 시를 발표한 지 30년째가 되는 해의 그것이었습니다. 옛날 같지 않고 시집도 시비도 쉽게 내고 세우는 시절인지라 그 가치가 덜해진 듯합니다만 그럼에도 30년이라는 마디 시간을 그냥 지나칠 수는 없었던지 이만저만한 혼자의 생각에 잠기기도 했습니다. 시의 궁극에 충실한 것인지, 우리말의 원천을 망각하고 있지나 않은지, 속된 욕망에 좌고우면하는 것은 아닌지 되짚어 보기도 했습니다. 부끄러움과 외로운 감이 왜 없었겠습니까만 지훈 선생이 지향했던 것의 희미한 한 가닥이라도 붙들고 있었다면 참으로 다행일 것입니다.

문법이 안 되는 시들이 횡행하고 더구나 대접까지도 받는 시대가 가소롭습니다. 재미삼아 비유했던 탁구장의 막탁구꾼들의 그 꼴입니다. 시가 문법이 안 되다니요! 그 미숙성을 마치 저쪽에서 온 새로운 사조라도 되는 듯이 구부려 대변하는 것을 보면 우습기 짝이 없습니다. 게다가 서양말이 아무 거리낌 없이 필연의 요구도 없이 멋인 양 쓰이기도 합니다. 우리말의 서양식 창씨개명이라고 할까요? 심지어 주소가 아예 그렇게 되어버렸습니다. 무슨 힐스타운이니 뭐니 합니다. 탄식할 노릇이 아닌지 살펴볼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우리 한반도의 역사는 분명 예기치 않은 계기를 거쳐 밝은 국면으로 전환되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올해는 공교롭게도 선생의 서거 50주년이 되는 해라고 합니다. 이태 후면 탄생 100주년이 됩니다. 모처럼 맞은 이 희망의 국면에서 생각합니다. 지훈 선생이 남긴 글, 행동, 정신에 정치, 문화, 공동체 모두의 건전한 발전에 참조해야 할 덕목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고 생각됩니다. 다시 꼼꼼히 살펴서 선명히 드러내고 널리 선양되어야 될 줄 압니다. 우리 현대사에서 이만 한 크기의 인물을 가졌다는 것이 한없는 자부입니다. 이분이 시를 썼고 제가 미숙하나마 시를 써서 이분의 큰 줄기 중의 한 끝자락에 앉을 수 있다고 인정받았다는 것에 큰 자부를 느낍니다. 더불어 넓은 성찰의 계기로 삼겠습니다. 

끝으로 지훈 선생의 뜻을 가장 아름다운 방식으로 기리시는 나남문화재단의 조상호 이사장님, 얼마 전 모 신문 칼럼에서 나이 70에 자작나무 어린 묘목 수천 주를 심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한참을 생각했습니다. 큰 공부가 되었습니다. 운영위원회 이남호 위원장님, 김기택, 나희덕, 이영광 세 분 심사위원 선생님, 오늘날까지 이 상의 역사를 빛내주신 관계자 여러분의 뜻을 다시 씻어 살펴봅니다. 감사합니다. 


장석남

심사평

심사는 원로, 중견, 소장 시인들의 노작을 즐겁게 읽고 어렵게 판정하는 과정이었다. 본심 진출작들 사이에 눈에 띄는 격차는 없었으며, 어떤 순간의 비교우위가 있었다고 보는 것이 정확할 것 같다. 마지막 단계에서 중견의 저력을 믿는 쪽으로 의견이 일치했다. 각각의 개성을 어렵사리 저울질한 결과로 심사위원들은, 긴 시력의 고비에서 예사롭지 않은 진일보를 보인 장석남 시인의 시집 《꽃 밟을 일을 근심하다》를 제18회 〈지훈상〉 문학부문 수상작으로 선정하였다.

장석남 시인의 시적 관심사는 자연, 인생, 사랑의 사건들에 더해 예인(藝人)의 감흥과 선취(禪趣)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면서도 꾸준하다. 이들은 익숙하고 낡아 이제 오히려 시에서는 다루기 어려운 질료가 되었다. 《꽃 밟을 일을 근심하다》는 이 어려운 질료들과 오래, 새로이 싸운 기록이다. 시집 전체에 걸쳐 화자의 말수는 적고, 목소리는 경쾌하고 활달한 리듬에 얹혀 있다. 그것은 “바위 살림에 귀화(歸化)를 청”(〈소풍〉)하거나 생의 비의를 “저물녘의 긴 그림자 같은 경전”(〈여행의 메모〉)에 견주는 유비의 형식으로 우선 풍요롭게 드러난다. 

그러나 여유롭고 노숙한 발화들은 시집 곳곳에서 가시를 삼킨 듯 더듬거린다. 훤칠한 비상의 발걸음을 방해하는 애착의 그림자가 삶과 사랑의 갈피에 “날고기처럼 피 흘리”(〈오래된, 오래되었다는 고백〉)고 있어서다. 애써 “커지려는 불을 다독이”(〈모닥불〉)려는 억누름이 시에 갈등을 일으키고, 그 순간의 착잡한 말들이 거꾸로 시집에 마음공부의 깊이를 부여한다. 익숙한 것은 이렇게 낯선 것이 된다. 이 과정을, 그의 숙련된 언어가 “부재의 조율사”(〈조율사〉)처럼 가다듬어낸다. 빼어난 비유와 공교한 말부림 가운데서도 그는 마치 기교를 다 버린 듯 유유히 시를 쓴다.

오래된 새로움의 또 다른 사례로 ‘고대’(古代) 라는 시간의 발견을 들 수 있겠다. 이 시간성의 선행 탐구자는 물론 미당(未堂)이다. 고대 설화의 몸에 영원주의라는 독특한 관념의 옷을 입힌 미당의 고공비행과는 달리, 장석남 시인은 자기 삶의 원초적 체험을 기억의 방식으로 불러내어 상상적으로 재구성한다. 이는 유년의 가난 체험 속에서 슬픔의 원형을 찾거나 소금이나 호미와 같은 곁가지 사물들을 통해 아스라이 꿈꾸어 보는, 오래되고 먼 삶에 대한 그만의 감각이다.

그러나 이 ‘고대인’의 등에는 현세적 삶의 부담중량 또한 얹혀 있다. 그의 영원은 요양원의 “발작 소리”(〈가을의 서정〉)와 “피의 콧노래로 나를 부르는 정육점”(〈정육점〉)과 같은 생의 굴레 속을 어렵사리 저공비행한다. 인생 중년의 처연한 심회에 대한 날카로운 묘사, 지훈 시와의 친연성을 짚게 되는 음률에의 애호 등은 이 비행의 충실한 날개 노릇을 한다. 이러한 의식적 지향을 아울러 내는 것은 물론 시어의 격조 높은 새로움이며, 그의 시가 재래 서정시를 그만의 방식으로 쇄신하고 있다면 이 점을 우선적인 증거로 들어야 할 것이다.

심사위원들은 장석남 시인의 이러한 면모가 우리 시단의 대표적 중견 시인 한 사람이 선보일 수 있는 진일보라 판단하였다. 지훈 시의 고아한 탈속과 미당 시의 분방한 초월 사이 어디쯤에 그의 노선과 정처가 있을 듯하다. 이 구름장 같은 선배들의 그늘에 들기도 나기도 하며, 그는 또 다른 한 걸음을 꿈꿀 것이다. 수상을 축하드린다. 


제 18회 지훈문학상 심사위원회

심사위원장 김기택

심사위원 나희덕이영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