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회 지훈문학상

수상자
이윤학
수상작품
《짙은 백야》
수상자의 말

제가 태어났을 때 아버지는 금광(金鑛)의 광부였습니다. 할아버지도 강제 징용에 끌려가 탄광의 광부로 일했다 들었습니다. 성격이 불같았던 그분은 해방이 되기 전에 중국과 러시아 등지를 떠돌았습니다. 추수 철이 되면 어김없이 돌아와 식솔들 먹고 살 양식도 남기지 않고 환전해 사라졌다 하였습니다. 어디를 어떻게 떠돌았는지는 아무도 물을 수 없었고 들을 수도 없었습니다. 먹고 살기 힘든 친척들이 있으면 술김에 그랬는지 땅덩어리를 내주었다고도 하였습니다.


그분은 징용에 끌려가 혹사당한 후유증으로 평생 진폐증(塵肺症)을 앓았습니다. 제가 다섯 살 나던 해에 지금 사는 집으로 이사하게 되었는데, 그분이 장에서 사왔다는 트랜지스터라디오를 들고 온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그해 겨울 눈보라 치는 밤이었습니다. 어디서 얼마큼 술을 마셨는지 간신히 집까지 찾아와 나무대문을 밀치고 쓰러진 그분과 아랫목으로 그분을 모시던 아버지 모습이 생생합니다. 그분이 돌아가실 때 장면도 생생합니다. 가쁜 숨을 몰아쉬던 그분은 간신히 손목시계를 끌러 아버지 사타구니에 던지는 것으로 생을 마감하였습니다.


오밤중 닫힌 나무대문이 삐걱거릴 때면 그분이 집을 제대로 찾아온 것이라고 대문을 열어주던 할머니는 저를 바닥에서 재운 적이 없는 분이었습니다. 집 앞 논에 벼꽃이 핀 어느 날 그분은 손목시계를 귀에 대고 앉아 있었습니다. 당신이 살았는지 죽었는지 시계소리를 듣고 확인해 보는 것이었습니다. 금방 피었다 지는 벼꽃이 물에 떠 있었습니다. 저는 그분이 남긴 손목시계를 분해했습니다. 대체 시간이 어떻게 생겨 먹었는지 실체를 들여다보고 싶었습니다. 제가 한 짓인 줄 뻔히 알면서도 아버지는 망가진 손목시계를 보면서 나를 나무라지 않았습니다.


금광이 폐광되고 아버지는 줄곧 농사꾼으로 살았습니다. 초등학교 4학년을 끝으로 학업을 그만둔 아버지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을 것입니다. 새벽에 일어나 줄담배를 피우는 아버지의 뒷모습을 바라보곤 하였습니다. 줄줄이 딸린 식솔들을 어떻게 먹여 살려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을 아버지의 심경을 저는 지금도 헤아리지 못합니다. 고심을 끝낸 젊은 아버지는 가득 찬 요강을 들고 밖으로 나갔습니다. 곧 삭정이 분지르는 소리와 생솔가지에 불이 붙어 불과 연기가 방고래로 드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바짝 펴졌던 장판이 우그러드는 느낌과 미열을 찾아 여기저기 손바닥을 대 보던 그때의 새벽이 떠오릅니다. 아궁이 앞에 앉아 재미나게 얘기를 나누는 두 분이 있어 얼마나 안심이 되었는지 모릅니다. 막막함을 풍요로 일구기 위해 두 분이 얼마나 애썼는지를 저는 지금도 조금밖에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저는 그분들 곁에서 지켜봐 잘 알고 있습니다. 한정된 논밭에서 소출을 극대화하기 위해 얼마나 악착같이 일했는지. 추수를 끝내기 무섭게 갯일을 해서 자식들을 먹여 살리느라 얼마나 고달픈 일에 매달렸는지. 올해도 농사를 잘 지었다는 이웃의 덕담 한마디에 그동안의 노역을 다 보상받고도 남는 분들이 저의 부모님이었습니다. 이까짓 거 금방 쳐부술 수 있어. 일하기 전에 혼잣소리로 최면을 걸던 아버지의 농사를 저는 글을 쓰면서 조금씩 알아갑니다.


언젠가 사십 후반이 된 아들 얼굴을 보면서 아버지가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어려서부터 농사일을 해 보니 사십 대가 가장 힘이 좋더라. 아버지는 제 얼굴을 보면서 웃음으로 물었습니다. 저는 고등학교 이후로 운동을 하지 않아 체력이 바닥난 상태였습니다. 이제 술 담배 좀 줄이고 몸을 움직이라는 말씀이었지만 정곡을 찔린 저는 슬그머니 밖으로 나오고 말았습니다. 저는 제때 밥도 못 챙겨 먹을 만큼 바쁘게 사는 것도, 끼니를 거를 만큼 가난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나 하나 건사하지 못하는 제가 한심스러웠습니다. 기본기도 못 갖춘 사람이 무엇인들 제대로 할 수 있을까 자괴감이 들었습니다. 저는 그날 저녁, 아버지가 금광에 다닐 때 사용한 간드레를 가져왔습니다. 몇 년 전 쓴 산문 〈간드레〉에 저의 어린 날과 아버지의 젊은 날이 담겨있습니다.

 

아버지가 금광(金鑛)에 다닐 때 사용하던 간드레가 내 방에 걸렸다. 면벽(面壁)을 할 때마다 간드레가 유년의 시간들을 밝혀주었다. 어느 순간 방안은 금광의 갱도로 변하고 나는 희뿌연 돌가루 속에서 금맥을 찾는 광부가 되었다. 아버지는 열두 살 때부터 금광에 다녔다고 했다. 그러니까 내 방에 걸린 간드레는 내가 태어나기 훨씬 전부터 아버지 손을 탄 것이다.


어두컴컴한 방에서 줄담배를 피우던 아버지는 요강을 비워 방안에 밀어 넣고 쇠죽을 쑤기 시작했다. 생솔가지 타들어 가는 소리와 매운 연기가 방으로 스며들었다. 안마당과 바깥마당을 오가는 아버지의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아아~ 으악새 슬피 우니 가을인가요. 지나친 그 세월이 나를 울립니다. 여울에 아롱 젖은 이지러진 조각달. 강물도 출렁출렁 목이 멥니다.’ 간드레 불을 흔들며 광산에서 돌아오는 젊은 시절의 아버지와 만날 수 있었다. 주먹 하나로 입을 틀어막고 다른 주먹을 움켜쥔 아버지가 마른기침을 쏟아내고 있었다. 질끈 감은 눈 속에서 금가루가 흩어지고 있었다.


아버지는 진폐증을 앓았다. 마른기침을 할 때마다 아버지의 얼굴은 짓무른 홍시 같았다. 마른기침이 잦아들면 아버지는 줄담배를 피워댔다. 담뱃불이 필터에서 똑 떨어질 때까지 피우고 그 불똥으로 담뱃불을 이어 붙였다. 부엌에는 훈제가 되어가는 돼지비계가 걸려 있었다. 쇠죽을 쑨 불씨를 긁어낸 아버지는 프라이팬에 돼지비계 고추장구이를 볶고 있었다. 등을 돌리고 돼지비계 고추장구이를 집어먹는 아버지의 깡마른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아궁이로 다가가 ‘아버지 뭐 하세요?’라고 묻고 싶었다. 돼지비계 한 점 얻어먹고 싶었다. 하지만 입맛을 다시면서 말을 삼켜야 했다. 아버지는 대를 물려 진폐증을 앓고 있었다. 돼지비계 한 점 받아먹으면 나도 광산에 다녀야 하고 진폐증을 물려받아야 할 것 같았다. 나는 방으로 들어가 뜨뜻해진 방바닥에 등을 지지며 아버지처럼은 살지 않겠다, 작심하고 있었다.


밥 뜸을 들이고 들어온 어머니는 밥상에서 벌레 먹은 콩을 골라냈다. 겨울에는 고무 다라에 바지락을 담아 와 윗목에서 깠다. 엄마가 시집왔을 때 산이란 산은 다 벌거숭이였지. 나무는 고사하고 솔걸(솔잎) 몇 개 줍기 위해 온 산을 뒤지고 다녔지. 이불이라도 제대로 있나 냉골에서 밤새 떨었지 뭐냐. 너는 한 번도 바닥에서 잔 적이 없을 겨. 할머니, 할아버지, 막내 고모가 너를 돌아가면서 품 안에 품고 잤으니께. 아버지, 엄마가 너를 빼앗긴 것 같아 얼마나 서운했는지 모를 겨. 네 아버지는 광산에 일하러 갈 때, 그리고 캄캄한 밤중에 돌아와 네 눈을 들여다봤다. 아버지에겐 네가 세상에 없는 사람이었던 것이지. 네 눈이 아버지에게는 금광이었던 거지.


나는 어머니의 잔소리가 듣기 싫어 밖으로 나왔다. 으스스한 바깥마당 쪽마루에 앉아 13킬로미터를 달려오는 기적 소리를 들었다. 어서 지긋지긋한 집구석
을 떠날 궁리를 하고 살았다. 아랫사랑 앞 사철나무에 올라가 가지 사이에 가랑이를 끼우고 앉아 나뭇가지를 흔들었다. 여기가 아니라면 어디라도 좋으니 나는 떠나고 싶었다. 아버지가 광산에 다니기 시작한 열두 살 때, 나는 친구와 공모해 무인도로 배를 저었다. 그 다음은 서울 가는 기차를 탔다. 아버지는 일주일을 못 버티고 돌아온 나를 추궁하지 않았다. 헛간에 걸린 간드레를 가져오는 날에도 아버지는 웃으면서 잘 다녀오라고만 말했다. 여기저기 거처를 옮겨 다니며 사는 아들에게 아버지는 네 집은 여기니, 언제든 돌아올 집이 있으니 갑갑하게 살지 말라는 주문을 한 것이다.


그 옛날 아버지의 젊은 날과 함께한 간드레를 보면서 나는 내가 아버지의 금광이었음을 되새긴다. 아버지가 내 눈을 들여다보았듯 나는 내 글을 들여다보면서 한 사람의 독자를 상상한다. 이 금광은 내가 죽어서도 얼마간 폐광이 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나는 간드레 불을 켜 들고 몸속의 금맥을 따라 나아간다.
-〈간드레〉 전문

 

저는 부모님이 보여 준 자세를 떠올리면서 안주하고픈 마음을 다잡곤 했습니다. 농사짓는 일과 글 쓰는 일이 같을 수는 없겠지만, 그것 말고는 할 것이 없어야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딱 한 가지였습니다. 딴짓 안 하고 글을 쓰는 것이 그 한 가지 일이었습니다. 말을 심하게 더듬는 반벙어리를 둔 부모의 속을 어지간히 썩인 저였습니다. 첫 말이 안 터져 학교에서는 책도 못 읽는 까막눈 취급을 받은 저는 주눅이 든 채 바닥을 보고 걸었습니다.


그런 저를 이 세상에는 없는 사람으로 돌봐 준 부모님께 지훈 선생님의 이름으로 주는 이 상의 영광을 돌리고 싶습니다. 묵묵히 네 길을 가면 된다는 그분들의 다독거림이 없었다면, 저는 사람들과 어울려 살 수 없는 스스로 왕따가 되어 살아가고 있을 것입니다. 종로 3가에 있던 말더듬교정학원에 다니면서부터 심호흡을 하였습니다. 눈을 감고 코로 숨을 들이마시면서 눈앞에 초원이 펼쳐진다 상상했습니다. 배에 힘을 준 채 숨을 참다 입으로 천천히 뱉으면서 그동안 사로잡혔던 패배의식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믿었던 제가 무엇이라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어머니마저 저를 믿어주지 않았다면, 저는 나만이 뛸 수 있는, 내가 아니면 뛸 수 없는 나의 코스를 최선을 다해 뛰는 기쁨을 누리지 못했을 것입니다. 어머니가 제게 보낸 웃음의 의미를 이제야 조금씩 알아갑니다. 근래에 어머니를 생각하며 쓴 산문을 여기 옮겨 봅니다.

 

생일상을 물린 어머니가 넌지시 안면도에 가보자는 말을 꺼냈다. 새벽에 내려온 형제들은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동생들은 졸린 눈으로 하품을 하고 아이들은 핸드폰에 빠져 있었다. 그래도 어머니는 바다에 가서 굴을 좃(까)고 바지락을 긁어왔음 좋겠다 고집을 피웠다. 어머니가 잘하는 일 중 으뜸이 갯일이다. 바닷가 태생인 어머니가 농사짓는 집안에 시집와서 쉴 수 없었던 것은 늦가을에서 이른 봄까지 하는 갯일 때문이다. 추수가 끝나면 어머니는 갯일을 하러 다녔다. 개펄을 뒤져 굴과 바지락, 피조개, 소라, 박하지(돌게) 등을 대소쿠리와 양동이에 날랐다. 니들 가르칠 동안만 하고 그만둬야지. 그땐 집 안을 깨끗하게 치우고 도시 사람들처럼 살아 봐야지. 어머니의 바람은 니들 장가들고 시집갈 때까지로 미뤄지더니 이제는 자식들 먹을거리를 대기 위해 쉬지 못한다.


전화를 않는 내게도 가끔 전화를 걸어오는 어머니다. 씨암탉이 너무 컸어. 찔겨지기 전에 어서 와서 먹고 가야지. 하루 전에 전화하면 잡아놓을 텐게 꼭 전화하고 내려와. 오늘 아침에 새로 담근 김치 부쳤으니 잊지 말고 냉장고에 넣어. 김치냉장고 없음 소 팔아서라도 사 줄 테니 … . 나는 김치냉장고 놓을 자리가 없다고 사양하지만 어머니는 집을 사준다는 말은 좀체 꺼내지 못한다.
몇 번인가 대리석 계단에서 미끄러져 다친 후로 부쩍 겁이 많아진 어머니였다. 그래서 현관으로 통하는 계단 옆에 난간손잡이를 만들었다. 얼마 가지 않아 생나무손잡이가 매끈해졌다. 축사에서 소가 한두 마리씩 줄어드는 걸 지켜보면서 씁쓸해졌다. 이제 일할 힘이 부친다는 증거였다. 농사 일 년만 더 짓고 내놔야지. 일 년만 더 짓고. 일 년 일 년 연장하던 농사도 올해부터는 반만 남기고 남 줬다고 말할 때, 어머니는 함석지붕 위로 올라온 측백나무 벼슬을 보았다. 옥상에 올라가 달을 보고 있는데 어머니가 술상을 차려왔다.


달을 보니 좋지? 옴마는 달을 보면 니들 얼굴밖에 안 떠올라야. 시간이 더디 가는 줄 알았는데 금방 다 갔어야. 새벽에 일어나 왔다갔다 하다보면 아침 먹을 시간이지. 들에 나갔다 돌아와 점심 먹고 잠깐 눈 붙이고 일어나면 또 나가야지. 캄캄해서 돌아와 저녁밥 지어먹고 나면 몸이 천근이지. TV 켜 놓고 누워 잠깐 보다보면 스르르 잠들지 … . 어머니는 웃는 얼굴로 나를 쳐다보며 물었다. 넌 지금 어디쯤 와 있는 것 같으냐? 나는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다 하려다 말았다.


어머니를 따라 바다에 갔던 때가 엊그제 같았다. 구멍 숭숭 뚫린 꺼칠한 스웨터에 낡은 잠바를 껴입은 젊은 어머니는 대소쿠리에 조새와 호미를 넣어 들고 개펄로 들어갔다. 어머니는 물새처럼 작아져서 썰물 근처에서 갯일을 하고 있었다. 나는 어머니가 피워 준 해변의 모닥불에 고구마를 구워먹고 심심해져 집으로 돌아왔다. 한참을 놀아도 어머니는 돌아오지 않았다. 배고픈 나는 사철나무에 올라가 바다로 통하는 산길을 내다보았다. 양동이를 이고 대소쿠리를 든 어머니가 땅거미와 함께 돌아오면 아궁이 앞에서 해산물 즉석 파티가 열렸다. 우리는 어머니가 아니라 굴호이(굴회)와 굽은 피조개, 소라를 기다렸는지도 모른다.


어머니와 나 여동생 셋이서 안면도로 출발했다. 우리가 도착한 드르니항은 여느 어촌이랑 다를 바 없었다. 조새와 소쿠리를 든 어머니가 굴을 쪼기 시작했다. 그리고 해풍에 날아가는 어머니의 말이 이어졌다. 굴을 좃으면서 맛나게 먹어 줄 너희들 얼굴을 떠올리면 실실 웃음이 나왔다. 허리가 끊어질 듯 아파도 손발이 얼어 터져도 볼때기가 면도칼에 오려지는 것 같아도 너희들을 생각하면 물이 차오르는 줄도 모르고 굴을 좃게 됐지.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욕심을 부리다 보면 꼴찌로 남게 됐지 뭐냐. 너희들 먹일 생각으로 단걸음에 달려갈 수 있었다. 조새는 옴마 눈이었어. 불쌍한 내 새끼들 먹여 살릴 궁리만 하는 조그맣지만 언제나 흰 빛을 잃지 않는 눈이었다. 우리들은 어느 짐승의 날카로운 뿔처럼 생긴 조새가 굴을 쪼아 소쿠리에 담는 것을 지켜보았다.
- 〈조새〉 전문

 

글을 쓰는 고등학생 아들에게 두툼한 붉은 칸 원고지 한 묶음을 아무 소리 없이 내밀던 어머니의 웃음을 기억합니다. 말로 하고 싶었지만 도저히 할 수 없었던 말이 겨우 글이 되어 나올 때까지 기다려 준 어머니, 더 늙어 마르기 전에 손을 잡아보고 싶습니다.


‘지훈문학상’ 수상소식을 접하고 며칠 동안 먹먹한 상태로 살았습니다. 고향집 아랫사랑채에 사시던 초등학교 4학년 시절 은사님 성함을 속으로 불러 보았습니다. 그분은 지독한 말더듬이던 저에게 책을 읽게 만들었고 글을 쓸 수 있도록 기다려 주었습니다. 책보를 마루에 집어던진 저는 산과 들, 바다를 쏘다녀 저녁밥을 먹기도 전에 졸음이 쏟아졌습니다. 하지만 선생님은 하루도 거르지 않고 말하기 힘든 저에게 도서감상문을 쓰게 했고 내일 읽을 책을 내밀었습니다. 글쓰기가 가장 재미난 일이 되고부터 저는 저녁뜸까지 사철나무에 올라가 책을 읽었고 관찰하여 글을 쓰는 아이가 되어 있었습니다. 무슨 말인가를 하려고 발을 구르다 선생님 발을 밟은 적이 있습니다. 그때 선생님은 제 손을 모아 잡으시고 눈으로 말하는 법, 가슴으로 말하는 법, 느낌으로 말하는 법을 알려주셨습니다. 힘에 부쳐 도망치고 싶을 때 선생님과 함께한 시간을 떠올립니다. 노래를 부를 땐 말을 더듬지 않지? 말하고 싶을 땐 노래를 부르면 되겠구나. 욕심을 부려 장벽에 부딪힐 때마다 초심으로 돌아가 시작할 수 있도록 다독거려 주시는 선생님, 못난 저를 사랑으로 품어주신 은혜, 차돌의 금속들이 금으로 바뀌는 시간이 흘러도 잊지 않겠습니다.


고향집 뒷산에 올라가 노을 카펫이 깔린 천수만을 바라봤습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어 서글펐던 시간이 지나갔습니다. 언제나 힘을 실어 준 부모님과 은사님, 그분들께 이 자리를 빌려 다시 약속드립니다. 죽은 자의 힘을 빌려 살지 않겠습니다. 나를 믿고 나의 길을 가겠습니다.


지훈 선생님의 작품을 곁에 두고 읽겠습니다. 선생님의 고매한 정신을 평생 글을 쓰면서 닮아 가겠습니다. 17회 지훈문학상 심사위원 김사인 김기택 이영광 선생님, 나남출판사 나남문화재단 조상호 선생님께 감사인사 올립니다. 앞으로 치열한 작품으로 인사드릴 것을 약속드립니다. 혼자 힘으로 끝까지 가겠습니다.

 

이윤학

심사평

심사위원들은 미리 추천한 시집 열두 권을 읽은 후에 수상작 선정을 위한 논의에 들어갔습니다. 만만치 않은 시적 성취를 이루었으면서도 거기에서 더 나아가려는 중견 시인들의 노작이 적지 않아 어려운 과정이 예상되었지만, 이심전심이 통하여 이견 없이 이윤학 시집 《짙은 백야》 를 수상작으로 결정하였습니다.


이윤학의 시는 과거에 펴낸 여덟 권의 시집에서 후미진 곳, 잘 보이지 않는 곳에서 격렬하게 운동하는 슬픔들과 아픔들을 직관적으로 포착하여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담담하게 진술하는 시적 방법으로 삶과 존재의 비극적인 본질을 탐색해 왔습니다. 그가 포착한 슬픔이나 비극성은 하찮고 보잘 것 없음, 평범함, 구차함으로 위장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면을 뒤흔들어 설명하기 어려운 질문을 이끌어 내는 힘이 있습니다. 아홉 번째 시집인 《짙은 백야》 에서는 이러한 시적 방법을 더 치열하게 밀어붙여 이윤학의 시가 도달할 수 있는 하나의 경지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담담하고 무표정하지만, 문장에서 돋아나려는 감정을 여지없이 도려내고 있지만, 시의 행간에서는 울음을 오래 삭인 목소리가 들립니다. 삭고 문드러져서 더 이상 슬픔 같지 않은 목소리의 깊은 질감이 느껴집니다. 그의 시선에는 슬픔을 탐지하는 촉각과 후각이 풍부하게 달려 있어서 어조가 아무리 무표정하고 담담해도 그것을 다 감추지는 못합니다. 그래서 그의 시를 읽으면 편안함과 아름다움에 기대려는 마음은 철렁 내려앉거나 집요한 통증의 여운으로 안절부절 못하게 됩니다. 마치 슬픔이 더 지독해질 수 없을 때까지 또는 괴로움이 스스로 목이 졸릴 때까지 기다리고 있다가 가장 순도 높은 미적 순간을 적시에 포착하여 기록하는 것 같습니다.


이윤학의 시는 몸과 하나가 되어 떼어낼 수 없는 슬픔을, 몸 안에 갇힌 채 마음을 마음껏 괴롭히는 비극적인 내면을, 지속적으로 놓아주면서 그것들이 어떻게 노는지 담담하게 바라봅니다. 아무리 많이 놓아주어도 그 슬픔이나 괴로움이 고갈되는 일은 없을 것 같습니다. 그의 시선은 메뚜기의 다리를 부러뜨리고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는 심술궂은 어린이가 되기도 합니다. 그러면 슬픔은 절뚝거리면서 건강한 상태일 때보다 더 격렬하게 운동하는데, 이때 그 우스꽝스러운 운동은 어쩔 수 없이 존재와 삶의 불구성을 떠올리게 합니다.


“너는 어금니로 풍선껌을 몰아 씹었다/ 나는 벌레들이 터지는 소리를 들었다”(〈비문을 옮기는 포클레인의 후미〉)고 말할 때, 그동안 마음이 겪었던 내밀한 사건들은 순간적으로 이빨 밑으로 모여들어 견딜 수 없는 슬픔의 순간들을 터뜨립니다. 껌 씹는 일처럼 하찮은 일상과 지루한 반복으로 위장해도 이 격렬한 슬픔이 비어져 나오는 것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야산에 올라 무덤가에서 소주를 들이켜는 사내를 관찰하며 “막다른 골목까지 걸어간 사내가/ 풀을 쥐고 매달려 있는 시간이 늘어났다/ 숨을 쉬느라 목소리를 들려준 적 없었다”(〈사일로가 보이는 식탁〉)고 말할 때, 그 건조한 목소리는 격렬한 슬픔과 충돌하면서 시의 표면을 요동하게 하고 들뜨게 합니다. 그리하여 주변의 구차스럽고 너저분한 일상들 속에 얼마나 많은 격렬한 사건들이 숨어 있는가를 느끼게 하고 새삼스럽게 다시 쳐다보게 합니다. 그러나 그는 그런 현실을 아주 세밀하게 구체적으로 바라보기만 할 뿐 섣불리 그것을 해석하거나 설명하거나 깨달음으로 미화시키지 않습니다.


이와 같은 시적 성취를 높게 평가하여 이윤학 시인을 수상자로 결정하였음을 보고합니다.

 

제 17회 지훈문학상 심사위원회
심사위원장 김사인
심사위원 김기택・이영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