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회 지훈문학상

수상자
유종인
수상작품
《양철지붕을 사야겠다》
수상자의 말

나는 나에게 모여야 한다, 유쾌한 당신과 함께


소식을 듣고 제가 사는 변방이 왠지 안온하고 쓸쓸하고 정겨웠습니다. 저에게 변방은 주류(主流)와 중심의 반대말이 아닙니다. 끝없는 소요(逍遙)의 교두보이고, 세상에서 버려진 것은 가만히 보호되는 곳이란 생각을 줍니다. 한낮 햇빛이 쟁쟁한 곳에서도 그늘이 어깨를 기대왔습니다.


어느 가난한 마음일 때는 돌을 하나 주워 뺨에 대거나 운두가 깨진 접시를 들고 와 벼루 대신 먹물을 푸는 기명(器皿)으로 쓰기도 했습니다. 개 코에 떨어지는 빗방울을 보다가 세상의 어디에도 없고 또 세상 어디에도 있을 당신을 떠올립니다. 어린 날 막내인 나는 아버지의 서예를 위해 무릎이 저리도록 먹을 갈았습니다. 아버님는 묵묵하셨고 내 먹 가는 품새는 주니가 들어 늘 “묽다, 더 갈아라”란 말을 단골로 들었습니다. 그 사이 창밖의 아이들 노는 소리는 어둠에 묻혀 사라졌습니다. 그런 아버지의 붓놀림도 어느 날 중풍이 멈춰 버렸습니다. 가끔 오징어나 낙지나 문어를 데려다 먹물을 품게 해 내 붓을 적셔 볼까 궁리합니다. 나의 한가함은 생활을 몰라서가 아니고, 이 세계의 불안과 공포의 새로운 공작을 몰라서도 아닙니다. 그럼에도 나는 세상을 내 붓으로 다스릴 수 없고 내 어눌한 시로 개전(改悛)시킬 수 없습니다. 아직 말입니다.


여기는 도대체 어디입니까? 우리는 도대체 무엇입니까?
투미하고 어령칙한 제 정신은 언제쯤 한 맑은 고요라도 얻고 저 이끼 서늘한 그늘이라도 얼러 낼 수 있을까요.


지훈 선생께서 돌아가신 해에 저는 이 세상에 왔습니다. 생사가 이렇게 한 물살로 들고나는 것도 인연이라면 인연이겠습니다. 무슨 대단한 영혼의 바통 터치를 한 것도 아닌데 저는 그렇게 선생과의 인연을 막막하게 얼러내 봅니다. 파초우(芭蕉雨)의 맑고 수수로운 마음도 때로 가져야겠습니다. 인생이 인생이어야겠기에 번뇌는 별빛이어도 좋겠습니다. 그다음에는 여전히 변두리이고 허망이자자해도 눈물이 슴슴한 즐거움을 세상의 그대에게 풀어내야겠습니다. 무엇이나 다 되고자 하는 세상에 시인 하나도 버거운 저는 시의 쓸쓸함과 드넓은 자유와 품격과 풍류를 조금씩 번져 살아갈 듯합니다. 지훈 선생께서 주신 가혹한 독려를 이제껏 써온 졸렬한 시에 대한 반성과 미구에 내 시의 새로운 기폭장치로 쓰고자 합니다. 과연 그렇게 할 수 있게 번뇌를 맑히고 맑혀 보겠습니다. 그리고 이 강퍅해지는 세상에 시라는 깊고 슬프고 유쾌한 사랑의 정담과 제 농담은 먼저 당신의 영혼을 울리고 웃기고 나서야 미소 지을 듯합니다.

 

지훈 선생의 고매한 얼로 주시는 이 상의 무게는 쉬 헤아리기 어렵습니다. 본격적인 시 쓰기에 발 디딘 지 만 스무 해가 지나도, 제 용렬한 그간의 좌충우돌의 행보가 미욱하기 짝이 없고 또 염려스럽기에, 이 상은 그간의 방황과 위태로운 행보와 지리멸렬한 시 쓰기의 와중(渦中)에 빠진 어리석은 소생에게 그래도 쉽게 포기를 몰랐던 미련함에 거는 황송한 기대라고 여깁니다.


학창시절 공부는 특출 나지 못했어도 헌책방을 들락거렸습니다. 가끔 술값과 헌책 값이 서로 싸웠습니다. 그러나 대학에서 문학을 전공하진 않았습니다. 용렬한 생각에 문학은 삶에서 흘러 절실하고 고통 중인 가운데 자유를 체득해야한다 여겼습니다. 편협하지만 그 진정성만큼은 이제 사유의 자유로움으로 번져 문학의 선생과 동료와 후배는 세상 어디에나 있다는 걸 조금 압니다. 시궁창에서 자란 미나리가 더 푸르고 튼실해 보이기도 합니다. 편파보다는 혼란을 택해 여기까지 왔습니다.


이십대 막노동을 하던 인천 송도 신도시매립지 공사 시절 손가락이 두 마디없던 동료 형이 떠오릅니다. 일이 끝나면 갯바위를 뒤져 꽃게며 우럭이며 해물들을 잘도 잡아냈습니다. 중요한 손가락의 두 마디가 없는 것이 그에게 콤플렉스라 여겼지만, 그는 전혀 구애되지 않았습니다. 변두리 다방을 좋아하고 거기아가씨들을 안마하는 걸 좋아한 막무가내 형은, 시정잡배로 몰렸어도 그 행보가 흔쾌했습니다.


그는 아마도 그의 잘린 손가락에 대한 나의 편견에 이리 말해 주고 싶었을지 모릅니다. 손가락 두 마디가 없으니, 꽃게의 공격에 덜 물릴 것이고, 물속에서손가락의 움직임이 적으니 물살의 기척이 적어 물고기의 촉각을 방심시켰지 않느냐고 말입니다. 그는 자유의 한 기미를 제게 주었습니다. 그는 세상의 무엇이 되기보다 세상의 무엇이 되지 않는 걸, 놓고 사는 걸 가르친 한 선생이었습니다. 저는 주변의 뭇 인연을 스승으로 삼고 변두리 자연과 세속도시를 캠퍼스로 삼는 대학, 풍물과 사람들로 우연 방생된 깨우침을 주고받는 대학, 더 넓게 번져 우주라는 무량한 대학의 덕으로 배움을 덧입는 소생(小生)인지 모릅니다. 그래서 universe와 university는 근친이지 싶습니다. 이만한 학력은 제가 누리는 변방의 호사입니다.


이 덕을 어찌 다 모른 척하고 지나칠 수 있겠습니까. 저의 염치는 한미한 시로나마 이 사소함에 깃든 우주의 은근하고 은혜로운 사랑에 소요(逍遙)하고 화답하는 일입니다. 내내 생활에 얽매여 있을 때도, 화장실 변기에 앉아 돈을 세면서도 제 속물근성조차 깨워 슬쩍 시로 보태는 데 있지 싶습니다.


이 저녁에도 지훈 선생의 그 지극한 선비적 자애(慈愛)의 근간이 쓸쓸히 기억돼야 마땅함을 모두가 아시리라 믿습니다. 그 절절한 한 편,

 

꽃이 지기로소니
바람을 탓하랴.

 

주렴 밖에 성긴 별이
하나 둘 스러지고

 

귀촉도 울음 뒤에
머언 산이 다가서다.

 

촛불을 꺼야 하리
꽃이 지는데

 

꽃 지는 그림자
뜰에 어리어

 

하이얀 미닫이가
우련 붉어라.

 

묻혀서 사는 이의
고운 마음을

 

아는 이 있을까
저어하노니

 

꽃이 지는 아침은
울고 싶어라.


- 조지훈, 〈낙화〉(落花)

 

이 선연하고 자명한 선생의 시엔 웃음을 넘어 울음의 고단하고 기꺼운 포용의 고요가 서렸습니다. 나 자신 외의 다른 무엇을 탓하지 않는 마음, 이 시의 고풍스러움은 결코 의고적(擬古的) 선비의 시풍 하나만을 헤아린 바가 아닙니다. 제가 여기서 보고 싶은 것은 저 울음의 깊고 높고 늡늡한 시적 포월(包越)로서의 사랑의 분위기입니다. 분별하는 이기적인 웃음의 편재(偏在)로 그늘을 넓혀 가는 세상에, 선생의 울음은 낙락하고 냅뜰성 있게 세계를 아우르는 포월의 심성입니다. 마음이 잘 읽히지 않고 마음이 잘 잡히지 않는 세상에 저 포월의 울음은 불안한 한반도의 난제를 푸는 마음열쇠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곧 인류의 모든 숨탄것들을 긍휼히 여기는 포월의 아침울음이어야 합니다. 또 새로이 시를 깨쳐나가야 할 제 자신을 변주하는 울음의 현몽입니다. 울음 한 번 잘 울고 나면, 부처가 오고 하느님이 오고 마호메트가 패키지로 우리 맘에 오지 않겠습니까.


지훈 선생의 선연한 울음빛깔은 마음의 지향입니다. 연암(燕巖) 선생의 열하일기의 호곡장(好哭場) 대목처럼 크게 한 번 유쾌히 울어봄 직합니다. 삼라만상에 대한 연민을 다시 깨우듯 사랑의 부름이자 번짐을 재장구치는 일입니다. 인류가 스스로 들여다보듯 크게 한 번 울어 본 적이 언제였을까요. 울음 한 번 잘울어 봐야 할 것이 먼저 저의 시이고 당신이고 또한 숨탄것이라 여기는 지금, 그울음의 심연을 깨우쳐 주신 선생의 눈길이 새삼 떠오릅니다.

 

제가 사랑의 무극(無極)을 말하기에 앞서, 저는 잡인(雜人)의 자유로움으로 여러 밑바닥에서 세상의 가장 허황된 높이를 아우르는 무극의 시쟁이를 꿈꿉니다. 극단으로 치닫는 지구촌과 인류, 협량한 정치, 세계 도처의 테러리즘과 종교적 극단주의, 다양한 불평등과 불신들, 경제적 양극화의 그늘을 우리는 살아갑니다. 제가 무슨 대단한 인류애를 말씀드리는 건 아닙니다. 사실이 새삼스러울 따름입니다. 우리가 사는 지구촌을 건너다보는 방심한 시쟁이의 누추(陋醜)한 고백일 따름입니다. 그러나 선비인 지훈 선생의 정신엔 누구도 함부로 핍박받을 수 없고 배척당할 수 없다는 늡늡하고 낙락한 인문주의자의 자애로운 품성이 있습니다. 그 올곧은 정신이 품는 넉넉한 난초향기가 그립습니다. 그래서 냅뜰성 있게 화해의 분위기를 새로 얼러 내 이 한반도의 백두에서 한라까지 다시 사는 시를 그려 봅니다.


저는 끝까지 변방을 살아 열겠습니다. 그리고 시로 뒹굽니다. 제 자신이 불만스럽고 궁색하더라도 저는 저를 살겠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단독자가 아닌 광활한 연대자로서의 나에 대한 모색이겠습니다. 그러니 저를 모으고 살겠습니다. 사랑의 입김과 이슬과 말을 모으고 마련하는 일, 내내 부족하더라도 내내 부족함을 알아 가겠습니다. 저에게 욕을 주십시요. 제가 그 욕을 받아들이고 되새기고 새롭게 얼러 낼 사유(思惟)의 나무를 키우겠습니다.


그리고 당신과 함께 유쾌해지겠습니다. 저는 여전한 해코지가 없는 욕망이고 엉뚱한 건설이며 남다른 전망이고 싶습니다. 이 모두는 저의 어리석음과 욕망과 번뇌와 갈등에서 나온다 여겨집니다. 저는 결코 해탈을 이웃할 뿐 얽매임의 천재로 살아갈 듯합니다. 우리는 모두 하늘이 내고 땅이 기르고 혈연의 육친들이 기른 천재들입니다. 그럴 때 울컥, 한 울음의 빛깔로 시를 깨우치는 바는 제 소슬한 기쁨이자 생득(生得)의 찬란입니다. 돌멩이 하나에 제 손의 땀이 배입니다. 아무려나 사랑의 불목하니가 돼보려 합니다. 변방을 잘 살려 인간을 열고 그 인간을 웅숭깊고 유쾌하게 하는 데 제 사소함과 슬픔과 미력을 놀려 보고자 합니다.


아내와는 즐거운 동업자가 되고 딸들에게는 엉뚱한 기쁨의 파초 그늘이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 어머니께는 그 속종을 이승에 대는 햇빛과 구름과 풀잎이 얼비치는 수로이고자 합니다. 그리고 다정한 형제자매가 있습니다. 그리고 술이 좋은 친구들, 참 맑은 변방을 사는 소박하고 위대한 이웃들이 지구촌에 벌려 있습니다. 어리석은 사랑이더라도, 어려운 사랑이더라도 잘 품어봄 직한 의연함을 어찌 외물(外物)에만 기대 살 수 있겠습니까. 나는 나를 모아야 합니다. 세상 모든 그대를 시로써 안아 보듯이, 나는 여전히 허술하고 그리우며 가난하나 세상당신과 함께 유쾌해지는 중입니다. 함께 마음의 시를 끌겠습니다.

 

척박해지는 한국의 문화적 토양에 못비를 주시는 조상호 사장님의 세심함과 대범함에 경의를 표합니다.
용렬한 시편에 후한 평을 주신 김사인, 김기택, 이영광 세 분 시인 선생님의과분한 선택과 그 용기가 향후 혜안이었음을 증명할 빚을 떠안았습니다. 나를 모으는 것은 당신을 모으는 것입니다. 또 나를 모으고 때로 비우는 것은 세상을 여는 것입니다.

 

지훈 선생의 고매한 넋 앞에 난초 몇 뿌리를 서려 두고자 합니다. 모처럼 술도 석 잔 올리고 싶습니다. 모두 고맙습니다.

 

2016년 5월 모란꽃 이우는 날에
유종인

심사평

본심에 오른 십여 권의 시집을 대상으로 심사를 진행하였으나, 결정은 쉽지 않았다. 손에서 놓기 어려운 시집들이 여럿이었을 정도로 근년 우리 시단의 원로, 중견 시인들의 노작들에 깃든 내공에 심사위원들은 깊은 감명을 받았다. 한정된 분량을 살핀 소감이지만, 어떤 시집들은 후배 시인들의 분방한 개성과 대화하며 변화의 계기를 얻고 있었고, 또 어떤 시집들은 실험이면 실험, 서정이면 서정의길을 지키며 기왕의 자기 시세계를 심화시켜 가고 있었다. 각각의 개성들을 한 저울에 달기가 난감하여 심사위원들은 상의 위상과 시인의 위상을 견주어도 보고, 상이 기리는 분의 시세계에 비추어 시집의 앉음새를 살피기도 한 끝에, 유종인 시인의 시집 《양철지붕을 사야겠다》를 제 16회 지훈상 문학부문 수상작으로 결정하였다.

 

유종인은 크고 으늑한 가슴에 뜻밖에도 섬섬옥수를 장착한 시인이다. 그의 시의 애잔하고도 유장한 호흡은 “두 개 차선을 걸치며 커브를 꺾는”(〈리무진을 보내다〉) 리무진의 움직임을 닮았다. 이 미려한 몸이 짚어 나가는 마음의 기착지들은, 오래된 옛날의 어느 시공이거나 눈 내리는 산야이거나 나무와 새 울음, 무덤과 이끼가 차려진 고요지대이다. 우리가 더는 현실이라고 부르지 않는 그곳의 정경을 이곳에 모셔 오는 것이 그의 골똘한 일인데, 이렇다 할 주장을 물려 두고 그 세계의 사물들을 지극정성으로 매만지고 있어 흔연한 느낌을 준다. 유종인 시인은 의고와 고답에 친숙하지만 그의 말과 사물이 새롭지 않거나 흐트러져 있는 경우는 드물다.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보법을 바꾸는 듯 의외의 느낌, 사유의 생산적 혼란이 조성되고, 이들은 또 섬세하고 감각적인 언어운용에 의해 조율된다. 그의 시에서 버릴 말을 찾기 어려운 것은 그가 이미 버려서이다. 앞은 옛날에 닿고 뒤는 지금을 밟고 선 리무진의 긴 동체처럼 오래고 먼 것을 선호하는 그의 목소리는, 기실 어지러운 오늘의 현실을 고스란히 비춰 보여 주는 반성의 거울이기도 하다.
 
이 시집의 자연 취향을 음미하다 보면, 지금의 한국시에는 어쩌면 자연이 너무 부족한 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상처 입은 자연의 상상적 향유도 문제지만 있는 자연을 외면하는 것도 어떤 게으름이 아닐까. 자연은 그저 허망한가상의 매트릭스가 아니라 “도심의 숨겨진 뒤뜰 같은 들판”(〈주문〉)처럼 문 열고 한 발 나서면 있는 것이기도 하다. “나의 방의 옆방은 자연”(〈이사〉)이라고 김수영은 노래한 바 있다. 이 시집에는 자연 속에 들어가 웅얼거리는 사람의 자연이 들어 있다. 이것은 자연을 건너다보고 인간적 시선으로 편집・가공하는 숱한 자연파 시인들의 경우와는 달리, 훼손을 모르지 않으면서도 더불어 앓으며 그 본연의 상태를 끈기 있게 탐구해 얻은 시적 성취이다. 자연은 이런 모습과 소리와 향기를 지닌 숱한 조수충어(鳥獸蟲魚)들과 말 없지만 뜻있는 사물들의 세계였구나, 그래서 자연과의 교감이란 이런 자세와 절차에 따라야 하는 것이었구나 싶은 새 앎을 선사한다. 시인은 그 자연 속의 보행자이자 관찰자이고, “장고에 빠져 골똘해지는 돌”(〈저녁의 포석〉)처럼 마음을 다해 꽃, 나무, 짐승, 바람을 부르는 대화자이다. 앎을 가지고 그리로 가지 않고 가서 앎을 얻어 오기에 시인이 바라는바 마음의 평화라는 것도 행간에 겸허히 배어날 뿐이다. 이 시집의 자연은 따라서 인간사의 손쉬운 유비가 되지 않고 인간의 상념이 다하는 지점에서도 제자리를 오롯이 지켜 내는 듯하다. 요컨대 이 시집의 자연은 관념의 거처가아니라 생동하는 감각의 세계이다.
 
심사위원들은 이 시집의 이와 같은 면모를 높이 샀다. 유종인 시의 웅숭깊은서정은 ‘지훈’ 시의 고전주의적 기품에 닿아 있는 것이면서, 동시대 우리 시의변화무쌍한 흐름 속을 조용히 흘러온 저류의 하나이다.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에서 외롭고 꿋꿋이 이어 온 노력을 상이 찾아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듯하다. 수상을 축하드린다.

 

제 16회 지훈문학상 심사위원회
심사위원장 김사인
심사위원 김기택・이영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