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회 지훈문학상

수상자
윤제림
수상작품
《새의 얼굴》
수상자의 말

언젠가 화물트럭을 운전하는 이들이 연대하여 일손을 놓았을 때, 이런 상상을 해본 적이 있습니다. ‘어느 날 문인들의 단체가 파업을 선언한다면. 광장에 모여서 시위를 하거나 머리띠를 두르고 행진을 한다면.’
곧바로 시로 옮겼습니다.

 

화물연대가 파업을 했다, 일값 사람값이 너무 싸다고
수출용 컨테이너를 산처럼 쌓아놓고 트럭들이 섰다
세상을 바꿔보자고 화물을 내려놓았다
생각해보자 만일 오늘 우리가 붉은 띠를 두르고
아니, 시인협회가 작가회의가 스크럼을 짜고
시청 앞 광장에 나가서 구호를 외친다면?
화물값을 너무 안 쳐준다고 펜을 멈추겠다고.
-졸시, 〈화물의 종류에 대하여〉
 
변화를 기대할 수 있을까요? 안타깝게도, 세상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섭섭하게도, 일제히 펜을 멈춰 세운 보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가끔 경험하듯이 화물트럭을 일제히 멈춰 세운 결과는 무섭습니다. ‘물류(物流)를 세워서 세상을 바꾸자’는 그들의 외침이 헛말이나 과장이 아님을 만천하에 확인시킵니다.
아무리 시시해 보이는 일이라도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나라 안의 동업자들이 합심하여 상점 문을 닫아걸거나 영업을 중지하는 순간, 많은 사람들이 답답해집니다. 불편해지고 불안해집니다. 하지만 문인들의 시위에 가슴을 졸이거나 발을 구르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요. 어쩌면 경찰버스 한 대 출동하지 않고 방송국 카메라 한 대 오지 않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저는, 아이러니컬하게도 바로 거기에 우리 하는 일의 행복한 숙명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문학이라는 탈것(vehicle)은 ‘멈춤’으로서가 아니라 간단(間斷)없는 ‘주행’(走行)으로만 세상을 바꿔 낼 수 있다는 믿음이지요. 우리의 취급품목은 시간의 이삿짐이거나 광활한 우주의 수하물이라서, 찰나의 문제를 수습하느라 서 있을 시간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 대목에서 저는 낡았지만 여전히 쓸모 있는 비유 한 가지를 새삼스레 들추고 싶어집니다. ‘문학은 마라톤을 닮았다.’ 화물트럭 운전기사로서의 시인은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그의 마라톤엔 종점도 반환점도 없다.’ 당연히 지루하고 심심한 경기일 수밖에 없지요.
저는 가끔 이런 궁금증을 참기 어려울 때가 있습니다. ‘마라톤은 왜 올림픽에서 빠지지 않는 걸까.’ 왜 그럴까요. 개최지가 바뀔 때마다 어떤 종목은 인기가 없다며 제외하고, 어떤 경기는 재미가 없다면서 규칙을 바꾸곤 하는데 마라톤은 왜 천 년, 이천 년을 가만히 두는 걸까요. 고대올림픽 종목인 레슬링도 없애는 판국인데 말입니다.
싱거운 결론이지만, 마라톤이 올림픽에서 빠질 가능성은 없습니다. 그것을 기대하는 것은 올림픽대회가 폐지되기를 기다리는 것만큼이나 어리석은 희망일 것입니다. 인류는 결코 마라톤을 버리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이 가장 소박한 방식으로 자신의 정체성과 존재가치를 확인하는 일인 까닭입니다.
마라토너가 맨몸으로 대지와 겨룬다면, 시인은 맨손으로 ‘시간의 강물과 맞섭니다. 시쓰기는 보르헤스(Jorge Luis Borges)가 그의 시 〈시학〉(詩學)을 통해 말했듯이 ‘세월의 전횡(專橫)을 음악, 속삭임, 상징(象徵)으로 바꾸’는 일입니다. 지훈 선생님의 싸움도 그랬던 모양입니다.
 
나는 세월과 함께 간다. 세월은 날 떨어뜨릴 수가 없다.
 
다만 세월은 술을 마실 줄 모른다. 내가 주막에 들어 한잔 기울이고 잠이 든 사이에 세월은 나를 기다리며 저만치 앞서 간다. 나는 놀란 듯이 일어나 세월을 따라간다. 나는 벌써 세월보다 앞에 가고 있었다. 숨이 가쁘다. 길가에 쓰러진다. (중략)
 
나는 또 주막에 들어 한잔 기울일 수밖에 없다. 한잔 마시고 싸움하는 구경 좀 하고 나도 덩달아 큰 호통을 치고 멱살을 잡히고 이내 긴 노래 한 굽이를 꺾어 넘길 수밖에 없다. 그 무렵은 내게 黃昏이었다.
 
새 세월이 작은 종이쪽 하나를 가지고 온다. 죽은 세월의 遺書! 종이를 펴든다. 거기 내가 그에게 들려준 노래가 적혀있다.
-조지훈, 〈길〉
 
원컨대, 시인으로 살아가는 시간들이 지상의 모든 맨손, 맨발, 맨몸으로 이 부박(浮薄)하고 포악한 세월과 맞서는 동업자들의 나날처럼 뜨거운 순간들의 연속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어렵겠지만, 제가 하는 일이 화물트럭 운전만큼 세상에 보탬이 되길 바라는 꿈도 변함없이 지속되었으면 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간절한 소망은 제 시의 값이 제 ‘밥값’에 부족하지 않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저는 ‘밥값을 한다’는 행위의 지난(至難)함을 압니다. 석가모니의 열 가지 이름, 곧 ‘여래십호’(如來十號)에 ‘응공’(應供)이란 것이 있지요. ‘마땅히 공양받을 만한 이’란 뜻으로서, 쉽게 말하면 밥 먹을 자격이 있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속되게 이르자면 ‘밥값 하는 사람’. 따지고 보면, 절간의 모든 스님네들이 불철주야 용맹정진(勇猛精進)하는 까닭도 밥값을 면제받기 위함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제가 오늘 받는 이 상(床)은 한량없는 복록(福祿)이면서 엄청난 채무(債務)입니다. 삶 자체가 청송(靑松) 녹죽(綠竹)의 그것이었던 지훈 선생님께서 때 묻고 흠결 많은 소인에게 이렇게 큰 상을 내려주시다니! 장한 일을 마치고 돌아온 장부(丈夫) 앞에 차려진 잔칫상이 아니라, 힘도 솜씨도 시원치 않은 일꾼의 기력과 용기를 북돋워 주시려고 마련해 주신 상일 것이라 짐작해 봅니다. 갚을 기약도 분명치 않은 은덕이라서 황공한 마음으로 엎드려 받습니다.
아울러 이 번다한 상차림을 위해 애써주신 분들 – 지훈상 운영위원회의 여러 선생님들과 조상호 회장님, 그리고 나남의 여러분들, 윤제림에게 한 상을 차려주기로 의견을 모아 주신 심사위원님들 –께 감사의 절을 올립니다.
<가정식백반>이란 시를 쓴 일이 있습니다. 어느 해 겨울 여행길의 식당에서 목격한 광경을 시로 옮긴 것인데, 이런 내용입니다.
 
아침 됩니다 한밭식당
유리문을 밀고 들어서는,
낯 검은 사내들,
 
모자를 벗으니
머리에서 김이 난다
구두를 벗으니
발에서 김이 난다
 
아버지 한 사람이
부엌 쪽에 대고 소리친다,
밥 좀 많이 퍼요.

-졸시, 〈가정식백반〉
 
그들은 무언가 거룩한 일을 마치고 돌아온 아버지들처럼 보였습니다. 저마다 눈보라를 헤치고 귀가한 가장들의 늠름한 표정이었습니다. 세상의 모든 식당이 제 집의 부엌이 될 수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아마도 그들은 오늘도 푸른 들판을 닮은 일터에서 그들의 농사를 짓고 있을 것입니다. 그런 이들 덕택에 저는 삽이나 괭이를 들지 않아도 되는 것이지요. 청소당번도 맡지 않고 밥 짓고 설거지하는 일 한번 하지 않고, 생애의 절반 이상을 보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생각이 저로 하여금, 글농사를 열심히 짓지 않으면 죄가 될 것이 분명하다는 각성에 이르게 합니다.
제 할 일 대신해 주시는 분들 덕분에, 윤제림은 시인으로 살아갑니다. 어제와 다르지 않은 저녁을 맞습니다.
 
내가 가도 되는데
그가 간다.
 
그가 남아도 되는데
내가
남았다.
-졸시, 〈사람의 저녁〉
 
1987년, 문단에 나올 때 등단 소감문에다 일찌감치 고백해 놓은 이야기가 떠오릅니다. 내 시는 그저 좋은 이웃들을 둔 덕분에 나오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남보다 조금 밝은 귀를 지닌 까닭에 시인이 되었다고 밝힌 글입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천지간의 두두물물(頭頭物物)과 생명들의 가가호호(家家戶戶)에 가만히 귀 기울여 받아쓰기를 해왔을 뿐입니다.
제가 지닌 것 중에 남보다 조금이라도 낫다고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를 생각할 때마다 저는 그저 제 커다란 귀를 만지작거릴 뿐입니다. 오늘 수상의 이유가 되기도 하는 시집 《새의 얼굴》 머리말에도 제 스물여덟 살의 믿음과 통하는 문장이 들어있습니다.
 
어깨에 고장이 생겨서, 한쪽 팔을 잘 쓰지 못한다. 당연히 다른 한쪽이 수고가 많다. 일 없는 이쪽 팔은 하릴없이 두 곱의 일을 떠안게 된 저쪽에 미안해서, 숨도 몰래 쉬는 눈치다. 가만히 매달려 있다.
팔이 둘인 것이 새삼 고맙다. 양팔이 날개가 아닌 것이, 내가 조류가 아닌 것이 다행스럽다.
어떤 시간이 와도 시절을 탓하지 않고, 어떤 세상이 와도 공밥은 먹지 않게 되기를 바랄 뿐이다.
내 시는 조화와 평화를 꿈꾼다.
-시집 《새의 얼굴》 시인의 말
 
끝으로, 지훈 선생님에 대한 공경과 예의의 인사를, 우리 옷 입고 당신의 시 한 편을 소리 내어 읽는 것으로 대신하려 합니다. 〈승무〉(僧舞)입니다.
(暗誦)
 
승무(僧舞)
 
얇은 紗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파르라니 깎은 머리
薄紗 고깔에 감추오고
 
두볼에 흐르는 빛이
정작으로 고와서 서러워라
 
빈 臺에 黃燭불이
말 없이 녹는 밤에
오동잎 잎새마다
달이 지는데
 
소매는 길어서 하늘은 넓고
돌아설듯 날아가며
사뿐이 접어올린 외씨보선이여
까만 눈동자 살포시 들어
먼 하늘 한개 별빛에 모도우고
 
복사꽃 고운 뺨에
아롱질듯 두방울이야
세사에 시달려도
煩惱는 별빛이라
 
휘여져 감기우고
다시 접어 뻗는 손이
깊은 마음 속
거룩한 合掌인 양하고
 
이밤사 귀또리도 지새는 三更인데
얇은 紗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감사합니다.
 
윤제림

 

심사평

세 사람의 심사위원들은 지난 2년간 출간된 중견시인들의 시집을 중심으로 각각 3권의 시집을 후보로 추천했고, 그 결과 추천이 중복된 2권 의 시집을 포함하여 7권의 시집이 추천되었다. 7권의 시집은 각각의 시 적 성취와 문학적 개성을 확보하고 있는 것들이어서 <지훈문학상>의 후 보로서 손색이 없다고 판단되었다. 현시점에서의 문학적 성취도를 중시하는 한편, <지훈문학상>의 문학적 지향점을 함께 고려하려 했다. 특히 심사위원들은 문학상의 수여가 기존의 문학적 평가를 재승인하는 절차 에 머물지 않고, 아직 충분히 호명되지 않은 문학적 성취를 발견하고 재평가하는 자리가 되어야 한다는 인식을 공유했다.


이런 입장에서 윤제림의 시집 《새의 얼굴》이 수상작으로 결정된 것은 자연스럽고 필연적이었으며, 세 사람이 합의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 지 않았다. 윤제림의 시적 화법은 소중한 개성을 확보하고 있다. 전통적 인 서정시의 재래적인 화법에서도 약간 비껴나 있고, 관념적인 탐구나 언 어적 실험으로부터도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다. 솔직하고도 담백하며 때 로 천진하고 유머러스한 언어들은 어떤 인위적이고 장식적인 것 없이도 독자들을 감동시키는 힘이 있다. 그의 시는 세속적인 현실의 자리를 외면하지 않으면서 그 안에서 연약한 존재들에 대한 깊은 감수성을 드러낸다. 특유의 위트와 시치미도 아프고 약한 얼굴들을 대면하는 성찰적이고 윤리적인 감각과 연결되어 있다. 이번 시집에서 등장하는 여행시편들과 사람의 이야기가 있는 시들도 흥미로우며, 그것들은 결국 풍경 너머의 인간의 얼굴을 대면하는 시쓰기라고 할 수 있다.


윤제림 시인의 시적 개성이 한국시에서 소중한 영역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정당하게 평가받고 온전하게 호명되지 않았다는 아쉬움이 컸기 때문에, 이번 지훈문학상 수상을 통해 윤제림의 시인의 시가 재평가되고, 한국시단의 다양성과 풍요로움을 확인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제 14회 지훈문학상 심사위원회
심사위원장 이문재
심사위원 김영승・이광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