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회 지훈국학상

수상자
정민
수상작품
《다산의 재발견》(휴머니스트, 2011),
《삶을 바꾼 만남》(문학동네, 2011).
약력
1960년 충북 영동 출생. 한양대학교 국문과 졸업, 동대학원 문학박사. 현재 한양대학교 국문과 교수.
저서 : 《조선후기고문론연구》(아세아문화사, 1989), 《목릉문단과 석주 권필》(태학사, 1999), 《비슷한 것은 가짜다》(태학사, 2000), 《초월의 상상》(휴머니스트, 2002), 《한시 속의 새, 그림 속의 새》(효형출판, 2003), 《미쳐야 미친다》(푸른역사, 2004), 《다산선생지식경영법》(김영사, 2006), 《18세기 조선 지식인의 발견》(휴머니스트, 2007), 《고전문장론과 연암 박지원》(태학사, 2010), 《한시미학산책》(휴머니스트, 2010), 《새로 쓰는 조선의 차문화》(김영사, 2011), 《다산의 재발견》(휴머니스트, 2011), 《삶을 바꾼 만남》(문학동네, 2011) 등.
수상자의 말

제 12회 지훈국학상 수상자로 선정되어 이 자리에 서니 감회가 남다릅니다. 저는 한양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다녔습니다. 그곳에는 박목월 선생의 체취가 짙게 남아있습니다. 학부 때 지훈 선생의 제자셨던 박노준 선생님께 향가와 고려가요를 배우며 자랐습니다. 술자리가 거나해지면 무용담처럼 목월과 지훈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제 문학과 학문의 근저에 목월과 지훈 두 분 선생의 DNA가 얼마간 녹아들어 있음을 느낍니다.

개인적으로 이 상이 제정된 첫 세 해 동안 스승이신 박노준 선생님의 말씀에 따라 수상자의 상장을 제 붓으로 쓴 인연이 있습니다. 그때는 남의 상장 그만 쓰고, 정작 상은 언제 받나 하는 푸념이 없지 않았는데, 막상 이 자리에 서고 보니 더 분발하라는 채찍과 격려로 느껴져 오히려 마음이 무겁습니다.

저는 ‘19세기 고전문장이론’으로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그때는 특별히 무서운 것 없이 글을 썼습니다. 김도련 선생님의 훈도를 통해 연암과 정면으로 만난 뒤로 공부에 대한 제 생각이 많이 바뀌었습니다. 공부와 삶은 따로 놀지 않고 서로를 간섭했습니다. 이후 〈18세기 학회〉에 참여하여 전 세계 18세기 연구자들과 학문적 대화를 시작하고부터는 이 시대가 참으로 흥미롭고 궁금해졌습니다. 어설프게 시작한 연암 공부가 이덕무와 박제가 등 연암그룹으로 확산되면서 18세기를 구성한 지적 토대의 변화에 눈길을 주게 되었습니다. 중국으로부터 쏟아져 들어온 백과전서적 지식이 정보의 우선순위를 어떻게 바꿔 놓는지, 그 변화가 생각의 뿌리를 어떻게 뒤흔들어 놓는지를 찬찬히 들여다보았습니다.

생각은 꼬리를 물고 이어져서 연암의 사유를 더듬고, 그들의 자취를 찾아 헤맸습니다. 이 과정에서 그들의 그 시대가 정보의 홍수 속에서 정신줄을 놓고 있는 오늘날 우리의 삶에 대단히 유용한 처방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들의 진단과 처방은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고 힘이 있습니다. 그들의 새로운 지식에 대한 열망과 기호에 대한 사유는 참으로 눈부시고 아름답습니다.

18세기의 조선 지식인들이 빚어낸 새로운 패러다임이 매뉴얼로 정착되는 지점에 19세기의 다산이 우뚝 서 있습니다. 저는 지난 2006년 미국에서의 안식년 기간 동안 그런 생각을 정리해서 《다산선생 지식경영법》(김영사, 2006)을 펴낸 사실이 있습니다. 또 그간 쓴 논문을 모아 《18세기 조선지식인의 발견》(휴머니스트, 2007)과 《고전문장론과 연암 박지원》(태학사, 2010)을 간행했습니다. 18세기 정보화사회의 생동감 넘치는 지적 담론들을 지켜보면서 저는 이제 우리 학계가 질문의 경로를 바꿀 때가 되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민족과 주체를 앞세운 국수주의 담론은 세계화의 시대에 자주 걸림돌이 됩니다. 정보화사회는 정보 자체가 아닌 정보 가치의 판단력에 무게가 실립니다. 모든 정보는 다 유용하지 않고, 또 모두 쓸모 있을 필요도 없습니다. 이전 시기 유용성의 잣대를 우선하던 실학 담론이 오늘의 학문세계에서 갈수록 광휘가 사라져가는 것은 그것이 옳지 않아서가 아니라 세상이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유득공이 《발해고》를 쓴 것과 관상용 비둘기 사육에 대해 쓴 《발합경》을 지은 것은 똑같은 저술 원리를 통해서였습니다. 이서구는 앵무새 사육의 경과를 《녹앵무경》에 담았고, 이덕무는 밀랍으로 조매를 만드는 단계를 하나하나 풀이해서 《윤회매십전》이란 책으로 엮었습니다. 심지어 이옥은 담배에 관한 모든 것을 담아 《연경》이란 책으로 묶었습니다. 이 책에는 담배를 맛있게 피우는 방법과 담배를 피울 때 꼴불견의 내용까지 담고 있습니다. 실학의 논리로 보면 선비가 공부 안 하고 잡질한 것이 되지만, 정보화의 관점에서 보면 이 모든 작업은 당대가 필요로 하는 지식정보를 편집, 가공해서 고급정보로 제공하는 과정일 뿐입니다. 전에는 완물상지(玩物喪志)로 금기시되던 일이 이제는 당당히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영역으로 격상되었습니다. 실학의 틀로만 보면 설명할 수 없고, 공존할 수 없는 현상들이 정보화의 과정에서 비일비재하게 일어났습니다. 관점을 바꾸어야 할 때가 온 것이지요.

실학만이 아닙니다. 임진왜란은 피해자의 시각을 벗어나지 않는 한 의병활동에 대한 과장과 이순신 장군에 대한 신격화된 숭모, 일본에 대한 맹목적 증오만 남게 됩니다. 그 결과 이 전쟁이 동아시아의 역사를 어떻게 바꿔 놓았고, 이를 통해 우리가 유념하고 음미해야 할 지점이 어디인지를 살피는 대신, 해마다 예산을 낭비해가며 바닷속을 뒤져 거북선의 잔해를 찾거나, 모형 거북선 만드는 데만 몰두하게 만듭니다. 이제는 우리 국학도 민족담론의 그늘을 털고 일어나 세계사적 전망에 눈을 돌려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다산에게서 《목민심서》의 청렴 코드만 읽으려 해서는 그 눈부신 지식경영의 노하우가 다 묻히고 맙니다. 개인적으로 《다산선생 지식경영법》을 펴냈을 때, 저는 사실 대학원생들의 논문작성에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집필했습니다만, 뜻밖에 CEO들에게 많이 읽히면서 매번 피터 드러커(Peter Drucker) 같은 서양학자들의 책만 보다가 우리 것을 읽으니 속이 후련하다는 말을 듣고 무척 기뻤습니다. 다산은 오늘날에도 얼마든지 먹히고 통하는 콘텐츠이고, 연암은 더 막강합니다. 우리가 이 콘텐츠의 현재성에 대해 주목하지 않았을 뿐이지요.

그간 제가 찾아내서 논문으로 정리했던 다산의 다양한 육필자료들도 그랬습니다. 신혼의 단꿈에 젖은 제자에게 부부 각방을 쓰라고 야단하고, 스승의 가르침이 부담스러워 이리저리 핑계대며 찾지 않는 승려 제자에게 네 마음대로 하라며 끝에 ‘과거의 사람’이라고 적는 새치름한 모습들은 지극히 인간적인 다산의 면모를 보여줍니다. 이런 자료들이 하나 둘 모이자, 이번에는 다산의 학습법과 제자들과의 집체작업 과정 등이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이렇게 정리된 다산의 제자 교학방식은 오늘날 교육현장에 적용해도 여전히 위력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교육뿐 아니라 학습법이나 웰빙의 관점에서도 다산이 던져주는 유익한 시사점은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이 모든 것은 질문의 경로를 바꾸자 자연스레 드러난 내용들입니다.

사실 공부의 과정에서 다산의 친필들과 만난 것은 어찌 보면 우연에 더 가까웠습니다. 안식년을 마치고 귀국 후 《다산선생 지식경영법》에 담을 실물자료를 보기 위해 강진에 갔다가 친필 편지를 처음 보았고, 그 집안에 전해오던 이런저런 자료들을 보았습니다. 그 뒤 고개를 돌려 바라볼 때마다 예상치 못한 곳에서 쏟아져 나오는 육필들 속에 다산의 거짓 없는 맨얼굴이 있었습니다. 가르침을 따라오지 못하는 제자들에게 낸 역정과 훈계, 때로 심하다 싶을 만큼 금전적으로 이기적인 모습도 보았습니다. 다산 자신이 감추고 싶었을 사연을 본의 아니게 들춰내기도 했고, 몰랐으면 더 좋았겠다 싶은 자료도 없지 않았습니다.

저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그리고 일제시대와 625전쟁을 거치는 동안 중요한 자료는 모두 불타 없어진 줄 알았습니다. 막상 찾아보면 하나도 없어지지 않고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얼마 전에도 다산의 제자 후손가에서 잇달아 연락이 와서 만나보니 그간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고 깊이 숨겨 보관해왔던 다산의 친필과, 다산 아들 및 손자들의 왕복 서한들이 뭉텅이로 나왔습니다. 이 자료들을 지켜내기 위해 이들이 기울인 정성과 노고는 참으로 감동적이었습니다. 지난 5~6년간 제가 직접 찾은 다산의 친필 편지가 근 200통에 가깝습니다. 제자들에게 직접 써준 필첩도 수십 종이나 됩니다. 문집에 빠진 시가 수백 수이고, 문집에 누락된 산문이 편지글을 제외하고도 1백 편가량 됩니다. 이런 시문들은 그간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던 다산의 진솔한 맨얼굴을 보여줍니다. 이를 통해 우리가 알고 있는 다산의 면모가 허물어지지 않고, 오히려 더 정답고 인간적인 모습으로 다가옴을 느낍니다.

지금처럼 다산에 대한 자료가 계속 쏟아져 나온다면, 머지않은 시점에 《다산의 재발견》을 한 권 더 써야할 듯합니다. 현재 찾아놓고도 미처 글로 발표하지 못한 자료들이 그만큼 됩니다. 저는 다산의 자장에서 조금 벗어나 연암으로 돌아가고 싶은데, 다산에게 붙들려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자료 하나가 나올 때마다 몰랐던 다산과 새로 만납니다. 부분이 보태지면서 전체가 업그레이드됩니다. 이것은 참 경이롭고 신통한 과정입니다.

올해는 다산 선생 탄생 25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곳곳에서 다산의 자취를 기리는 행사가 이어질 듯합니다. 다산은 우리 학술사의 거인입니다. 그는 위대한 학자였고, 대단한 스승이었습니다. 그가 제자들과 만나 빚어낸 아름다운 이야기들은 그대로 오늘날의 척박한 교육현장에 빛이 될 만한 사연들입니다. 《삶을 바꾼 만남》을 쓰면서는 인간과 인간의 만남이 이토록 장엄하고 숭고할 수 있구나 하는 감동에 글을 쓰다 말고 눈물을 여러 번 훔쳤습니다. 이런 것은 모두 위대한 인간승리의 기록이 아닙니까? 다산의 자취는 250주년이라서 더 빛나는 것이 아닙니다.

공부의 길에 다짐은 있어도 작정이야 할 수 없겠습니다. 연구자는 자료 앞에 충실히 대답을 적고, 자료가 지시하는 길을 따라 여기저기를 들여다볼 뿐이겠지요. 그 길에서 최선을 다할 따름입니다. 무엇보다 지훈 선생의 학덕에 누가 되지 않고, 저에 앞서 지훈상을 받았던 선학들과 지훈상 운영위원회에 부끄럽지 않은 학자가 되겠습니다. 스승께 자랑이 되고, 후학들에게 모범이 되는 연구자로 더욱 노력하겠습니다. 이것이 인사말에 갈음하여 드리는 제 다짐입니다. 고맙습니다.

정민

심사평

저희 심사위원들은 《다산의 재발견》(휴머니스트, 2011. 8)과 《삶을 바꾼 만남: 스승 정약용과 제자 황상》(문학동네, 2011. 12)이라는 방대한 두 저작을 출간한 정민 교수를 제 12회 지훈국학상 수상자로 선정했습니다. 2권의 저작을 수상작으로 선정한 것은 아마 이번이 처음일 듯합니다. 2권 모두, 조선후기 최고의 지성으로 손꼽히는 다산 정약용 선생의 18년간 강진 유배생활을 재구하고 있는 저작입니다. 모두가 경외(敬畏)의 마음으로 우러르고 있는 다산 정약용의 유배시절, 하지만 여기저기 잠자고 있던 자료들을 하나하나 발굴하고 재해석하며 촘촘하게 그 시절을 재구해낸 정민 교수의 노고 또한 경외의 마음을 갖게 만듭니다. 2부작으로 보아 무방할 이들 두 저작을 지훈국학상으로 함께 선정한 까닭입니다.

저희 심사위원들은 4월 10일 첫모임을 갖고, 지난 2년 동안 출간된 한국학의 성과를 문학역사철학 3분야로 나누어 살펴보기로 했습니다. 그런 뒤, 적지 않은 성과들 가운데 수상후보로 거론될 만한 저작을 선별하여 의견을 좁혀갔습니다. 그리고 그리 어렵지 않게, 정민 교수를 금년도 지훈국학상 수상자로 선정하게 되었습니다. 정민 교수는 다산 정약용 선생의 생동하는 또 다른 실상(實像)을 눈앞에서 만나게 해 주었고, 그런 만큼 한국학 연구의 새로운 진경(珍景)을 펼쳐 보여주고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몇 년 전부터 인문학의 위기라는 말이 학계에 떠돌고 있었고, 한국학 분야에서도 그런 우려가 종종 들려왔습니다. 하지만 저희들은 전혀 그렇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인문고전, 아니 인문학 전반이 요즘처럼 전 사회적으로 주목받던 시절은 없었습니다. 서점가에서 베스트셀러 목록으로 올라있는 면면을 보면 쉽게 확인됩니다. 물론 1970년대 이후 뜨겁게 달궈졌던 한국학 연구가 한동안 주춤거렸던 것은 사실입니다. 대학의 인문학 관련학과가 활기를 잃어가는 것도 부정하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민족주의라든가 내재적 발전론과 같은 거대담론이 위기를 맞은 결과일 뿐 한국학 연구는 또 다른 저편에서 새로운 돌파구를 꾸준히 개척하고 있었습니다.

개인의 구체적 일상과 섬세한 내면, 그리고 별로 주목받지 못했던 미시적 국면들에 주목하면서 거대담론의 과잉은 근본적 한계를 노정하거나 수정·보완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한국학 분야에서 이런 작업의 선두에 선 연구자로 정민 교수를 꼽는 데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거의 없을 겁니다. 이번에 수상하게 된 2권의 저작 또한 《한시미학산책》(1996)으로부터 시작된 정민 교수의 그런 근본적 반성과 구체적 실천의 한 정점을 보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다음 3가지를 이들 저작의 크나큰 미덕으로 모두가 합의했습니다.

첫째, 정민 교수는 국민적 상식으로 통용되는 실학자 정약용과는 전혀 다른 ‘인간 정약용과의 만남’을 체험하도록 만들었습니다. 다산 정약용 하면 대부분 경세가실학자 등 근엄한 이미지를 갖고 있지만, 이들 두 저작에서 만나게 되는 다산 정약용은 ‘곰살궂은’ 인간의 모습이었습니다. 사회정치적으로 한 인간의 삶을 재단하는 데 익숙했던 분들에게는 약간의 불만이 없지 않겠지만, 저희 심사위원에게는 인간 정약용을 투명하게 바라볼 수 있는 기쁨이 더욱 컸습니다. 더벅머리 소년 황상이 다산 정약용을 만나 평생의 삶을 바꾸었던 것처럼, 우리 학계가 정민 교수의 저작을 통해 비로소 다산의 진면목에 성큼 다가가는 계기를 마련했다 하겠습니다.

둘째, 정민 교수는 새로운 다산 정약용의 모습을 되살리기 위해 이제까지 그다지 주목하지 않고 버려두었던 관련자료의 발굴과 해석에 온 힘을 기울였습니다. 그들 가운데는 전혀 몰랐던 자료를 새롭게 발굴한 것도 많고, 다산 정약용을 근엄한 실학자로 만들고 싶었던 뒷사람들이 문집에 싣기를 주저했던 자료도 적지 않습니다. 하지만 정민 교수는 무슨 자료든 있다는 소문만 들리면 찾아가 모으고 정리하며 낡은 자료에 새로운 생명력을 불어넣는 노고를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노력이 저작의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곳곳에 배어있기에 새롭게 접하는 다산 정약용의 모습은 독자에게 낯설기는커녕 생동한 모습으로 각인되었을 것입니다.

셋째, 버려졌던 낡은 편린을 통해 다산 정약용의 삶을 추적하고 있는 정민 교수의 가장 큰 미덕으로는 연구대상에 대한 지칠 줄 모르는 애정을 꼽아야 할 것입니다. 지난 과거의 인물을 연구자가 바라보고 있는 지금 여기로 불러내어 연구대상과 연구자 사이의 아슬아슬한 긴장관계를 유지하기란 쉽지 않은 법입니다. 그런 점에서 정민 교수의 저작을 읽어가면서 느끼게 되는 긴장감은, 고전이 우리시대에 어떤 의미를 갖는가를 끊임없이 환기하게 만듭니다. 긴장감은 비단 여기에 그치지 않습니다. 진지한 학술성과 경쾌한 글쓰기 사이에서 유지되는 균형감각은 정민 교수의 또 다른 미덕입니다. 딱딱하게 읽힐 법한 《다산의 재발견》이란 학술서가 맛깔스런 문체로 인해 전혀 지루하지 않게 읽히고, 스승과 제자의 운명적 만남을 다루는 《삶을 바꾼 만남》이 독자로 하여금 울컥 치밀어 오르는 감동까지 주는 까닭은 정민 교수의 그런 공력에서 기인한다고 보아도 좋을 것입니다.

기존의 거대담론에 매몰되지 않고, 흩어진 자료를 발굴하여 새로운 기운을 불어넣고, 그걸 학문적 긴장감과 균형 잡힌 글쓰기로 되살리는 정민 교수의 저작은 그런 점에서 전문 연구자에게는 물론 일반 대중에게 깊은 각성과 감동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합니다. 이제 우리 학계는 다산 정약용의 내면을 정밀하게 들여다보게 되었고, 그걸 그가 몸담았던 외부와 아우를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안과 밖의 교호과정에서 수정보완되어야 할 사항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을 게 분명합니다. 그런 과정은 비단 다산 정약용 한 개인에만 한정되는 문제는 아닐 겁니다. 인간의 구체적 삶과 그가 살았던 사회와의 긴장관계를 주목할 때, 주춤했던 한국학 연구방법론의 갱신 가능성을 실감합니다. 또한 그런 아름다운 성과들을 조만간 만나보게 될 기대감으로 제 12회 지훈국학상을 선정한 우리 모두의 가슴은 더욱 설렙니다.

 

제 12회 지훈국학상 심사위원회
심사위원장 조성택
심사위원 정출헌·우응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