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회 지훈문학상

수상자
이영광(李永光)
수상작품
《아픈 천국》(창비, 2010년)
수상자의 말

시 원고를 마무리해 막 잡지에 보내려던 참에 수상 소식을 들었습니다. 혼자 놀고 있는데, 누가 잘 놀고 있다고 말해준 것 같아 당황스러웠습니다. 시 쓰기는 혼자 열렬한 시름으로 노는 일일 텐데, 과연 힘을 다해 놀았는가 하는 의구심이 들었습니다. 고심 끝에 저는 우선 이렇게 생각하기로 했습니다. “상에는 원래 상의 이유를 스스로 찾아내라는 숙제가 들어 있다. 그런데 그것은 오랜 시간을 두고 알아내어 한 번의 기회로 답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니 앞으로 진심을 다해 열심히 놀면 알게 될 것이다.”

저는 학창시절을 지훈 선생님의 절조와 시혼이 숨 쉬는 캠퍼스에서 보냈습니다. 그분은 그때 이미 거기 계시지 않았으나 교정 곳곳의 돌비(碑)들이며 여러 기념노래 속에, 학교 앞 술청의 때 절은 탁자와 벽에, 그리고 수업에서 전해 듣던 숱한 회고와 인용의 갈피에 마치 빛과도 같은 그늘로 살아 있었습니다. 모두가 그분의 부재를 아는데 아무도 그분의 부재를 느끼지 못하던 이상한 배움터를 떠올리자니, 높은 정신과 섬세한 감성의 한 자락이나마 현장 취득한 행운을 새삼 느끼게 됩니다. 그곳에서 배우고 헤매면서 작은 뜻을 세워 지금에 이르렀기에 저에게는 이 상이 각별하고도 무겁습니다.

저는 지훈 시의 고전주의적 기품과 세심한 언어 조형, 애수 띤 낭만적 감수성에 눈길이 가면서도, 초기작인〈봉황수(鳳凰愁)〉나 나중의 한국전쟁 종군시편들, 그리고 병고를 의연히 생의 일부로 거두어들이는〈병(病)에게〉와 같은 작품에 특별히 끌렸습니다. 그 시편들에는 여지없이 몸의 깊은 주름을 비집고 나온 불가피한 정념의 일렁임이 있고, 시의 얼굴과 인간의 얼굴이 한데 겹쳐서 생겨나는 떨림이 있고, 그래서 시와 인간이 동시에 간절하고 위태로워지는 어떤 뜨거운 순간들이 들어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요컨대 이 육성 아닌 육성들은 가누기 힘든 것을 가누어내는 영혼의 품위가 어떠한 것인가를 알려줍니다. 길지 않은 저의 시력에도 지훈 시의 이 힘센 맥락이 저류의 하나로 흘러왔지만, 때로 제 시작(詩作)의 난맥상을 확인하는 날이면 등골에 흐르는 식은땀을 감추기가 어렵습니다.

말의 계획적인 운용에서 생겨나는 낯선 느낌을 시의 본래 효과로 생각하던 데서 낯선 느낌 자체에 말과 의식을 개방하자는 쪽으로 움직여온 것이 제 시의 역정이었던 것 같습니다. 근자에는 이 계획성을 표 나게 누르고자 했습니다. 이러한 과도기적 혼란을 고스란히 드러내게 된 것이 이번 시집이 아닌가 합니다. 마음의 어두운 충동들을 따라다니다 보니, 모르는 사이에 혼란과 우울이 찾아왔습니다. 그것이 낳은 힘은 뚜렷하지 않은 데 반해 그것이 나와 남에 대한 낯선 적의로 드러났을 때가 이 시집에서 가장 낯이 뜨거워지는 부분일 것입니다. 그렇게 되지 않으려고 합니다. 무의식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무의식이 뭘 말하려고 하는지 더 귀 기울이다 보면, 인간의 결여와 세상의 결핍에 대한 애타는 말들이 새롭게 태어나지 않을까, 자신은 없지만 그렇게 기대를 걸려고 합니다.

시에는 내일이 있어도 시인은 내일이 없어야 한다고 여기기에 저에게는 쓰다가 쓰러질 일말의 각오가 없지 않습니다만, 품은 역량이 미미하여 혼란과 몽매에 시달릴 때가 많습니다. 인생이 약해지고 마음에 기갈이 드는 것은 어쩌면 제가 아직도 시를 두려워하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불현듯 들곤 합니다. 시에 몸을 내어주는 순간의 괴로운 희열에도, 시를 의지하여 환영인 듯 악몽인 듯도 한 세상을 헤쳐 나가는 인간 수업에도 용맹하게 젖지 못했음을 털어놓아야겠습니다. 하지만 이 정체와 두절의 시간에 ‘지훈’의 이름으로 저에게 내려지는 상이 방법이 아니더라도 지침이, 지도(地圖)가 아니라면 원기가 되어 주리라는 생각에 여러 날을 마음이 떨렸습니다. 그래서 이 상이 고맙습니다.

업적을 칭찬하는 일에도 괴력이 필요해진 세태에 하물며 미흡을 격려하는 것이 쉬운 일이겠습니까. 몸부림을 애씀으로, 헤맴을 모색으로 헤아려주신 최승호, 이남호, 김기택 선생께 감사드립니다. 그리고〈지훈상 운영위원회〉와〈나남문화재단〉의 관계자분들을 비롯하여, 그것이 무엇이든 다른 인간에게 뭔가를 주려고 애쓰는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놓지도 주지도 않고, 심지어 받지도 않는 것이 현실의 도덕이 된 메마른 곳에서 이 아름다운 행사가 길이 의연하길 바랍니다. 아름다운 건 대개 선한 법이고, 언제나 선한 영혼이 삶을 더 깊이 향수합니다. 나는 과연 살 만한 인간인가, 이 세계는 과연 살 만한 곳인가 하는 물음을 어떻게 물을까에 대해 더 전전긍긍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2011. 5
이영광

 

심사평

지훈문학상 심사는 ‘지훈’이라는 이름이 붙은 문학상에 걸맞은 수상자를 내는 일과 가장 우수한 작품을 선정하는 일을 모두 충족시켜야 하지만, 두 조건은 서로 부딪칠 수도 있다. 따라서 수상작을 선정하는 기준은 후자에 더 무게를 두었다. 최근 2년 내에 출간된 시집 중에서 심사위원들이 추천한 7권의 시집이 심사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어느 후보작을 수상작으로 한다 해도 좋을 만큼 모두 만만치 않은 성취를 보여 주었으므로 결정이 쉽지 않았다. 긴 논의 끝에 이영광의 시집《아픈 천국》을 수상작으로 선정하였다.

이영광의 이번 시집이 가진 미덕은 도저히 나오지 않을 수 없는 몸이 하는 말에 귀를 기울이고 그것을 정직하게 받아쓰는 데서 나오는 강렬한 힘이다. 그의 시들은 제 몸을 억압하는 삶의 부조리한 현실과 환경을 조금도 피하려 하지 않는다. 시〈수화〉에서 밝힌 바와 같이 시인은 “들리지 않는 몸의 말”, “터질 듯 입 다문 마음”, “대화를 포기하고 몸속으로 들어가 돌아눕는 말”에 끈질기게 다가가 “끝내 발설되지 않는 몸의 말”을 들으려고 한다. 그래서 기꺼이 “몸을 쥐어짜서 마음의 눈빛을 뽑아내고 마음을 뽑아내고 싶은 자/ 마음을 쥐어짜서 붉은 혀의 목청을 꺼내고 싶은 자”가 된다.

그의 몸말은 제 몸을 끊임없이 닦달하여 안락과 편안함이 제 몸 안에서 드러눕지 못하게 하고, 귀찮아서라도 삶과 인간 속에 들어있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지 묻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끝났다고 생각하는 대답, 끝내고 싶어 하는 대답을 끝나지 않게 만든다. 굳건하고 확고하고 당연한 듯 보이는 안전한 세상의 정답들을 들쑤셔 불안한 질문으로 만들려 한다. 다시는 질문이 들어오지 못하게 질문이 들어올 틈을 단단하게 막아놓은 정답들에게 균열을 가하려 한다. 이 정답과 질문 사이에서 과장과 왜곡, 반어와 역설이 풍부한 이영광식 유머가 나온다. 거칠고 투박해서 웃지 않을 수 없는 이 슬픈 유머는 마음에서 최단거리로 거침없이 나오는 것이기에 강렬한 힘이 느껴지게 한다. 이 블랙유머가, 마음껏 내지르는 비명과 거친 야유와 날것의 감정이 시 바깥으로 나가지 않도록, 아슬아슬하게 붙들어주는 것 같다.

그러나 이영광의 시집은 충분히 숙성되지 않은 감정이나 정서로 크게 소리 지른다는 점과 설명이 많아 산문적이라는 점이 단점으로 지적되어 수상작으로 결정하기를 주저하게 만들었다. 함께 논의된 다른 작품들도 높은 완성도와 주목할 만한 특징을 지니고 있어서 논의는 서로 부딪치며 길어졌다. 그러나 심사위원들은 그의 몸말의 진정성과 힘이 상을 받을만한 소중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판단하여 수상을 결정하기에 이르렀다.

2011년 4월 16일

 

제11회 지훈문학상 심사위원회
심사위원장 이남호
심사위원 최승호ㆍ김기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