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회 지훈문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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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자의 말어찌된 일인지 시쓰기의 어려움과 시인으로 사는 일의 고단함은 갈수록 커져만 갑니다. 시를 그만 내려놓고 싶은 생각이 들 때마다 떠올리곤 했던 지훈 선생의 말이 있습니다. “시인이 시를 버리고 무엇으로 생각하며, 시를 잃고 무엇으로 사랑하며, 시를 버리고 무엇으로 무기를 삼을 것인가.” 이 말은 도망치려는 저를 다시 시 앞으로 불러 앉혔고, 시를 떠나서는 살 수 없게 되었음을 고백하게 만들었습니다.
심사평지훈 선생의 시가 도달한 언어의 드높은 품격과 고아한 향기는 이후의 한국 현대시가 넘어야 할 뚜렷한 봉우리를 만들었다. 그럼에도 지금까지 지훈 선생의 시를 넘어설 수 있는 시가 나타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도 지훈 선생의 시가 보여준 품격과 향기는 재주가 만들어낼 수 있는 기술적인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뛰어난 지성인이 지행일치의 삶을 살아가며 풍기는 인품 차원의 문제이기 때문에, 다시 말해 ‘삶의 품격과 동일한 것이기 때문에’라고 생각한다. 지훈문학상 심사위원들은 지훈 선생의 시가 지닌 이같은 성격을 염두에 두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최근의 많은 부박한 시들이 보여주는 깊이의 결여를 걱정하면서 심사에 임했다.지훈문학상 심사 위원들은 송찬호, 나희덕, 최승자, 이병률 등 6~7명의 시인들이 생산한 시집을 대상으로 삼아 논의한 결과 수상 후보자를 어렵지 않게 송찬호와 나희덕 두 사람으로 좁힐 수 있었다. 송찬호의 《고양이가 돌아오는 저녁》에서는 그의 반성적 상상세계가 이미 일정한 경지에 도달한 시어구사 능력에 힘입어 한층 자유롭게 구사되고 있으며, 나희덕의 《야생 사과》에서는 ‘나’에 대한 응시와 ‘나’에 대한 성찰로 귀결되는 고통의 시간을 팽팽한 언어로 줄기차게 형상화하는 집요함과 성실함이 들어 있다. 그래서 세 사람의 심사위원들은 이 두 시인의 시집 중 내용의 깊이와 형상화가 보여주는 미덕으로 미루어 보아, 어느 쪽이 수상작이 되든 유감이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그러나 송찬호의 경우 동일한 시집이 중복수상이 될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하여 결국 나희덕의 《야생 사과》를 수상작으로 결정했다. 나희덕의 《야생 사과》는 20여 년에 걸친 시작생활이 만들어낸 여섯 번째 시집이다. 그의 이 시집은 과거를 과거로 만들기 위한, 그러나 과거를 넘어서서 자신의 삶을 새롭게 건설하려는 의지가 만들어낸 반성적 언어의 집합이다. 나희덕의 그 같은 의식을 우리는 “나는 바늘이다/하얀 무명의 장막 속으로/떨리는 몸을 밀어 넣기 시작한다”라든가 “나는 박쥐다/나는 새가 되지 못한 게 아니라/쥐가 되지 못했다”라는 말 속에서 예민하게 감지할 수 있다. 또 “나는 이미 지워졌다”라는 말 속에서 과거와 결별하려는 자세에도 불구하고 과거는 안개 속에 숨겨진 형체와 같기 때문에 완전한 결별을 손쉽게 이루지 못하는 인간적인 모습도 읽을 수 있었다. 나희덕의 《야생 사과》는 이런 강렬한 반성적 성격 때문에 주어가 ‘나’이다. 서정시의 일반적 화자인 1인칭보다 훨씬 강도 높은 주관적 1인칭으로서의 ‘나’가 그의 시를 지배하는 주어이다. 그리고 이 ‘나’는 반성적인 의식과 자세 때문에 긴장되어 있으며, 이 긴장은 이 시집의 미덕을 이루는 팽팽한 언어, 팽팽한 의미로 나타난다. 특히, 나희덕이 〈결정적 순간〉이란 시에서 “사진을 찍을 때 피사체와 빛이 절묘하게 만나는 순간을 포착해야 하듯이 결정적 순간이란 게 있다. 잎맥을 따라 흐르던 물기가 한 꼭짓점에서 일제히 끊어지는 순간, 단호하면서도 부드럽게 제 발목을 내리쳐야 한다”고 쓰고 있는 시구가 바로 그런 미덕의 소산일 것이다. 또한 나희덕은 이어지는 시구에서 “그러면 짧으면서도 아주 긴 순간 한 생애가 눈앞을 스쳐갈 것이다”라고 썼는데, 이 순간이야말로 그의 반성적 의식이 만들어낸 완전한 결별이며 결정적 순간이라고 말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말하여 그의 이번 시집은 이런 완전한 순간을 향해 자신의 내면을 비우고 게우는, 그리고 시간과 풍경과 삶을 재인식하고 재정비하는 줄기찬 노력의 성과이다. 시인 조지훈의 시와 정신과 생애에 부합하는 길을 걸어간 시인에게 이 상이 주어지기를 바라는 것은 지금까지 심사위원들의 한결같은 소망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소망은 지훈 선생이 걸어간 길을 편협하게 축자적으로 해석하는 방식으로는 달성할 수 없다. 올곧게 자신의 삶을 추스르며 최근의 경박한 시어에 대응하는 팽팽한 의미의 언어를 만드는 작업에 지훈상을 수여하는 것은 이 상의 본질에 어긋나지 않는 것이라고 우리 심사위원들은 생각한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나희덕 시인에게 지훈상을 수여하는 것을 기쁘게 생각하며 시인이 희망하는 새로운 세계가 시를 통해 우리 앞에 환하게 나타나기를 기대한다. 2010. 5. 24
제10회 지훈문학상 심사위원회
심사위원장 오생근 심사위원 정현종·홍정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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