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메 단풍 들것네”
작성일 : 2017-11-01   조회수 : 345

“오메 단풍 들것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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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가을, 나남수목원 책박물관 앞 호숫가에서.(사진 신동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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닥터 지바고의 자작나무 숲을 꿈꾸어본다. 



이마에 스치는 삽상한 기운이 가을이다. 한번은 고개를 들어 공활한 하늘에 잠긴 산이라도 둘러 볼 일이다. 계절의 감각을 찾아 욕망의 다람쥐 쳇바퀴를 벗어나는 작은 반란이라도 조심스럽게 감행할 일이다. 계절이 다른 색깔로 색칠한 익숙한 것들의 새삼스런 변화에 눈이 부시다. 위대한 여름의 천둥 몇 개씩이나 품었던 열매를 맺고는 내년 봄의 나무건강을 위해서 잎을 떨굴 준비를 하는 빛과 색의 향연이 절정이다. 계곡의 물소리도 한층 맑고 청아하다. 자연의 아름다움 앞에 겸손해야한다는 다짐 속에 또 한 해가 지나는 쓸쓸함도 언뜻 스친다. 잎을 떨군 정직한 나목(裸木)의 모습대로 한겨울을 견뎌 내고 봄을 준비해야 하는 나무들의 결연함도 예비되어 있다. ‘시몬, 너는 낙엽 밟는 소리가 좋으냐?’라는 낭만은 나무들의 살신성인(殺身成仁)의 메아리일 수 있다. 버리지 못하면 새로 얻지 못한다. 낡은 인연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익숙한 일상에 가까스로 안심하는 우리들에게 해마다 내리치는 나무들의 죽비소리인지도 모른다. 항상 푸르다는 소나무도 솔잎 몇몇은 노란 낙엽인 갈비를 바람에 흩날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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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천여 그루의 반송밭에 노란 은행잎과 홍단풍의 풍경이 콘트라스트를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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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수전 정자의 고즈넉함에 단풍이 수줍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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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인석 30여 분이 맡는 가을의 향기는 무엇일까?


 

누이가 서성거리는 뒤뜰 장독대에 날아든 붉은 감잎 한 장에 가을이 무르익는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찬란한 슬픔의 봄을 기다리겠다는 김영랑 시인이 가을을 맞는다. 〈누이의 마음아 나를 보아라〉에 가득 찬 가을 풍경은 “오메 단풍 들것네!”라는 탄성이다. 누이와 시인의 합창인지도 모른다. 감나무는 고향이다. 오늘 따라 아버지가 장대 끝이 미치지 못해 까치밥으로 남긴 마지막 빨간 감 하나가 그립다. 산 너머 신기루를 쫓아 무엇을 이루는 동안 고향에 다시 돌아가지도 못한 채 소년은 그렇게 성장했다. 가을은 불면의 밤이기도 하다. 고등학교 교과서에 실렸던 서정주 시인이 1947년에 발표한 〈국화 옆에서〉는 지금도 짙게 마음에 각인되어 있다.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하여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하여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 보다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머언 머언 젊음의 뒤안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노란 네 꽃잎이 피려고

간밤에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

내게는 잠이 오지 않았나 보다


‘들국화’라고 불리는 구절초, 쑥부쟁이, 벌개미취가 자취를 감출 무렵에 유별나게 향기 짙은 작은 야생 황국(黃菊)인 산국(山菊)이나 감국(甘菊)에서 누님의 모습을 읽었는지 모른다. 내면의 나를 대입시키며 자위하는 것은 아닐까. 요즘 비닐하우스에서 재배한 색색의 개량국화들은 꽃도 크고 아름답다는 사치를 부리지만 천둥과 무서리를 이겨낸 이 향기가 없다. 도회지의 날렵한 사냥꾼이 되어 갈수록 눈에 보이지 않고 손에 잡히지도 않는 아버지의 향기와 겹치는 이 국향(菊香)을 가을만 되면 되찾고 싶어 안달한다. 아무래도 가을은 “괴로움과 혼돈이 꽃피는 고요에로 거두어들여진” 시간이 쌓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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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남출판사 사옥의 가을 담쟁이덩굴


어느새 담쟁이덩굴이 붉게 물들었다! 정현종 시인은 “살 만하지 않은가, 내 심장은/ 빨간 담쟁이덩굴과 함께 두근거리니! … 시간의 정령, 변화의 정령, 바람의 정령들 함께 잎을 흔들며/ 저렇게 물을 들여놓았으니, 세상의 심장이여/ 오, 나의 심장이여”라고 노래한다.


15년 전 파주출판도시에 나남 사옥을 완공했다. 친구인 김영섭이 설계한 바람길의 곡선을 강조한 약간 유선형의 남향받이로 아름다운 건축상을 받기도 했다. 이 건물의 북쪽 면은 한강 하류 파주들녘의 찬바람을 막기 위해 거대한 콘크리트 성벽을 올렸다. 300평이 넘는 이 공간을 관리하려면 3〜4년마다 몇 천만 원을 들여 도색해야 한다고 했다. 이곳에 담쟁이를 심기로 했다. 현대식 건물을 망친다고 팔을 붙드는 그를 뿌리치고 10년만 기다리라고 했다. 이젠 담쟁이의 힘찬 푸르름이 이 회색의 벽면을 거의 뒤덮으며 주인이 되었다. 안도 다다오의 노출콘크리트 기법의 값비싼 다른 벽면도 담쟁이덩굴의 세상이 되었다.

 

담쟁이는 손으로 벽을 타고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뿌리로 올라간다. 담쟁이는 보조뿌리에 해당하는 부정근(不定根)을 이용해서 벽을 타고 올라간다고 한다. 이른 봄 담쟁이가 벽을 타고 올라가는 모습에 감탄이 절로 나온다. 아주 가느다란 부정근을 벽에 붙이고 잎을 만들어가는 모습이 애처롭기도 하지만, 절실하게 살아가는 모습이 성(聖)스럽다.


담쟁이의 치열한 삶 덕분에 에너지를 많이 절약할 수 있는 이른바 ‘벽면녹화’가 가능하다. 고속도로 주변 소음방지벽에는 담쟁이를 심어 보기 흉한 모습을 가리기도 한다. 담쟁이는 이런 역할 때문에 ‘땅의 비단’, 지금(地錦)이라는 아름다운 이름도 있다. 담쟁이덩굴의 또 다른 한자 이름인 파산호(爬山虎)는 산에 오르는 호랑이라는 뜻으로 강인함을 상징한다. 


담쟁이의 특징인 큰 잎은 부모인 포도를 닮았다. 벽에 기대 살면서 잎이 작으면 햇볕이라는 영양분을 빨리 빨아들이기 어려울 것이다. 더욱이 잎을 크게 만들지 않으면 줄기가 햇볕에 노출되어 화상을 입을지도 모를 일이다. 더운 여름날 벽면에 무성한 담쟁이덩굴이 바람에 흔들리면서 만들어 내는 부드러운 파도물결 따라 하늘을 오르는 것 같다. 담쟁이는 다른 나무와 풀이 범접할 수 없는 바위 절벽까지도 망설이지 않는 개척정신이 있다. 가끔은 이웃에 버티고 선 거목에게 자신의 소박한 몸을 의지하기도 한다. 그러나 분수를 지켜 절대로 가지 끝까지 오르는 법이 없다. 나무를 덮어 고사시키는 칡덩굴 같은 교만함은 찾을 수 없다. 

  


넓은 담쟁이 잎들이 뿜어내는 출판사 사옥의 붉은 가을단풍은 아마추어 사진가들이 찾는 명소가 되었다. 오 헨리의 ‘마지막 잎새’의 희망을 떠올리는지 카메라를 곧추 세우는 소녀의 얼굴에도 가을이 묻어난다. 잎을 떨구고 나면 담쟁이덩굴은 세상 가장 큰 캔버스에 맘껏 펼친 속인들이 감히 흉내 낼 수도 없는 우주의 형상이 드러난다, 나목(裸木)이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다는 웅변에 다름 아니다. 시간이 쌓일수록 그 모습은 더욱 현란해질 수밖에 없다. 


나의 담쟁이 실천을 못내 부러운 마음으로 훔쳐보던 우리의 건축가는 어느 성당을 설계하고 영생을 간구하는 신부님을 설득하여 10년만 지나면 예술이 따로 없다고 벽면에 담쟁이를 정성스럽게 심게 했다고 계면쩍게 고백했다. 무슨 일이든 10년은 몸부림쳐야 한다. 가끔 지나치다 올려보는 제법 자란 그 성당의 담쟁이덩굴을 보는 나만의 기쁨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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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곡의 물소리도 한층 맑고 청아해지는 수목원 초입의 단풍길이다

 

 

 

 

이 글의 일부는 2017년 11월 2일 〈한국일보〉의 '삶과 문화' 칼럼에 기고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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