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처 못다 부른 노래
작성일 : 2013-05-24   조회수 : 1271

미처 못다 부른 노래

 

 

박목월의 윤사월은 “송홧가루 날리는 외딴 봉우리 / 윤사월 해 길다 꾀꼬리 울면 / 산지기 외딴집 눈먼 처녀사 / 문설주에 귀대고 엿듣고 있다”. 봄의 성숙한 내음을 온몸으로 엿듣는지도 모른다. 윤사월(閏四月)은 송홧가루가 푸른 5월의 하늘에 암꽃을 찾아 노란 별무리처럼 비행운을 남긴다. 상큼한 아까시 향기에 홀린 꿀벌들의 가냘픈 날갯짓이 절정에 이른다. 춘궁기에 돋보였던 쌀밥 같던 이팝나무의 풍성한 하얀 꽃이 하늘을 가릴 때면 꽃대궐 봄날은 여름에 그 자리를 내어주는 지금이다.

연비어약(鳶飛魚躍)하는 봄날이라고 해서 생성과 탄생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결코 죽지 않을 것 같은 생기 넘치는 청춘예찬의 젊음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장사익의 노래로 유명해진 김형영의 〈따뜻한 봄날〉은 꽃구경가자며 어머니를 업은 아들이 고려장(高麗葬) 의식을 치르려 산길을 나서기도 한다.


어머니, 꽃구경 가요
제등에 업히어 꽃구경 가요

세상이 온통 꽃 핀 봄날
어머니 좋아라고

아들 등에 업혔네

마을을 지나고

들을 지나고
산자락에 휘감겨

숲길이 멀어지자
아이구머니나

어머니는 그만 말을 잃었네

봄구경 꽃구경 눈감아 버리더니
한 움큼 한 움큼 솔잎을 따서

가는 길바닥에 뿌리며 가네

어머니, 지금 뭐 하시나요
꽃구경은 안 하시고 뭐 하시나요
솔잎은 뿌려서 뭐 하시나요

아들아, 아들아, 내 아들아

너 혼자 돌아갈 길 걱정이구나
산 길 잃고 헤맬까 걱정이구나.



어머니는 자기가 산에 버려지는 것보다 아들 혼자 집에 돌아가다 행여 길을 잃을 일이 더 걱정스럽다. 어머니는 아들의 널찍한 등에 업혀 세상 소풍을 마치고 마지막 가는 길에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솔잎을 한 움큼씩 따서 아들 몰래 뿌릴 수밖에 없는 따듯한 봄날이기도 하다.


〈아무르〉 혹은 〈송포유〉

지난 연말에 아내가 등을 떠미는 바람에 프랑스 독립영화 〈아무르〉를 함께 관람했다. 잔잔한 감동 속에 어느새 눈물을 훔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치매에 걸린 아내를 간병하는 할아버지의 순애보(殉愛譜)였다. 카메라는 50년 가까이 부부가 공유한 삶의 공간이었던 좁은 식탁을 중심으로 부부애의 꽃을 비춰준다. 피아니스트였던 아내의 황홀한 순간들을 같이 반추해보기도 한다. 차츰 당혹스럽기 짝이 없는 몸의 쇠락과 소멸을 자연스럽게 수용하려는 죽음과의 소통을 시도하는 모습이 남의 일 같지 않게 안타깝다. 체험학습되어야 하는 죽음 앞에서 인간의 존엄성을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하는 삶과 죽음의 정밀(靜謐)한 현장 다큐멘터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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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개봉된 ‘아내 메리언에게 바치는 노래’라는 영국영화 〈송포유〉의 감동도 그러하다. 투병 중인 아내는 마을 합창단에서 노래하면서 마지막 남은 삶의 의미를 찾는다. 젊은 합창단 지휘자는 몸도 불편한데 합창단 일에 열심인 아내를 말리는 무뚝뚝한 할아버지가 밉다. 아내는 노래 속에 행복을 느끼며 눈을 감는다. 할아버지는 쑥스러워하면서도 합창단에 동참하여 아내의 빈 자리를 대신 채운다. 최종 콩쿠르에서 아내에게 미처 다하지 못한 사랑의 노래를 바치는 속 깊은 늙은 남편의 짙은 사랑은 우리에게 큰 울림과 떨림으로 눈물짓게 한다.

죽음이라는 미지의 불안과 공포를 직접 체험한 경험담은 있을 수 없다. 우리는 죽음에 대한 자신 없는 정면 돌파보다는 단지 간접체험으로 지금 죽음을 산다. 그리고 항상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애써 외면하는지도 모른다. 죽음은 언제, 어디서, 어떻게 우리에게 다가올지 모르는 그 불확실성과 또 누구나 반드시 죽는다는 그 확실성의 동시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며칠 전 경북 청송에서 4년간 치매 아내를 간병하던 건강한 80대 할아버지가 저수지로 차를 몰아 동반자살했다. 크게 과수원을 일구던 평범한 노부부였다. 할아버지는 대소변도 가리지 못하는 아내 모습이 자부에게 보이는 것이 민망해 집을 따로 짓고 스스로 간병을 했다. 그러나 자신이 죽고 나면 아내가 요양원에 보내질까가 더욱 두려웠다 한다. 잠시 정신이 돌아올 때 작성한 유서에는 자식들에게 슬퍼하지 말라며, “이 길이 우리에게 가장 행복한 길이다”고 했다. 이 할아버지가 〈아무르〉 영화를 보았을 리 없지만 영화 그대로의 상황이 재현되고 있다. 부부간의 사랑과 죽음 앞에 인간의 존엄에 대한 성찰이 어떻게 승화되는지는 동서양의 문화 차이를 넘어서는 진리인지도 모른다.


《사랑》

자그마한 일에도 눈물을 보이는 일이 잦아지는 요즈음이다. 일상사의 작은 행복을 확대해서 받아들여서 인지도 모른다. 세상에 새로운 것은 없다. 다만 내가 이제 눈을 떠 발견했을 뿐이다. 솔제니친의 《암병동》을 찾아 읽는 사치가 부끄러웠다. 대형종합병원마다 신축하는 초고층 병원건물은 '암병원'이라고 크게 간판을 내건다. '암병동'이 '암병원'으로 확대될 만큼 더 많은 환자와 더 많은 죽음이 우리 곁에 일상의 하나로 가까이 와 있다. 단지 우리는 죽음이 두려워 죽는 과정을 회피하고 있을 뿐이다.

원로 언론인 강한필 씨의 《사랑: 아내간병실록 2,042일》을 미리 읽다가 흐르는 눈물은 감정이입 그 이상이었다. 아내가 난소암을 선고받고 돌아가실 때까지의 5년 7개월 동안의 비망록에는 희망과 절망, 기도와 절규, 분노와 회한, 고통과 슬픔, 눈물과 한숨이 가득 차 있다. 생사를 넘나드는 5번의 대수술, 50차례의 항암치료, 100번의 입원과 퇴원, 그리고 그사이 잠깐잠깐 찾아온 행복과 희망의 날들에 대한 사미인곡의 끝나지 않는 노래가 그것이다.

이 기록은 치열한 기자정신으로 쓴 불멸의 러브레터 이상의 아름다운 한 편의 위대한 서사시에 다름 아니다. 속살을 드러내는 쑥스러움에도 불구하고 죽음을 사는 과정을 공개하는 용기 있는 결단은 미처 못다 부른 아내 사랑의 그 폭과 깊이와 울림이 우리가 감량하기 어려운 그 이상의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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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이상 주삿바늘 하나 찌를 곳도 없이 앙상하게 말라가는 아내의 초췌한 모습, 피눈물이 밴 병상, 이어지는 마취와 혼수상태, 항암제에 강요당한 반복되는 삭발, 기약 없는 완치의 희망을 배신하는 아픈 시간들, 죽음에 대한 알 수 없는 두려움, 기도와 체념 사이의 너무나 먼 거리, 인간의 인내와 존엄성의 한계는 어디까지여야 하는가를 웅변으로 말하고 있다.

사회에선 신문사 편집국장, 방송사 사장직대까지 했음에도 병과 사투하는 아내에겐 무엇 하나 해줄 수 없는 무력한 남편의 안타까움에서 우리는 자유스러울 수 없다. 무슨 그리 큰일을 성취한다고 아내를 망각하며 치열한 도시의 사냥꾼 노릇에 애면글면했던가. 투병 중에 잠시 건강이 회복되어 막내 결혼식장에 나타난, 머리칼이 자라 파마를 한 아내의 예쁜 모습에 감격하는 남편의 잔영이 나를 또 울린다.

아내가 베푸는 사랑의 무게와 그 울림은 천둥소리보다 크다. 투병 중에도 이번이 마지막이 아니어야 한다는 자기암시 속에 김장을 계속하고, 남편 입맛에 맞춘 밥상을 준비한다. 밥 한 끼 차려 먹을 수 없는 바보 남편을 자신보다 더 걱정하며 나날을 고통의 축제로 기획하고 싶어 한다. 착한 사람만을 골라 형극의 길에 내던지는 강퍅한 세상을 온 가족이 함께 활활 타오르는 노을로 장엄한 세월을 승화시키고 있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죽음의 춤을 추어야 하는 인간의 길과 그 진실을, 가족의 길과 그리고 가족의 힘과 그 사랑이 무엇인가를 되뇌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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