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시청 광장에 손자를 안고
작성일 : 2013-01-29   조회수 : 1505

새해 시청 광장에 손자를 안고

 

 

새해는 항상 설렘과 함께 와야 한다. 그래서 미지(未知)의 순백(純白) 같은 가능성을 꿈꾸며 나름의 다짐을 해야 한다. 이러저러한 속세의 일들로 지난해가 신산(辛酸)했던 사람일수록 더욱 그러하리라. 어쩌면 남아 있는 세월이 손에 잡힐 듯 헤아려지면서 새해의 찬란함도 그저 그런 일상이 될 무렵에 하늘이 3세를 선물로 안겨준다. 


항상 귀엽기만 한 어린 딸이라고 생각했는데 벌써 어머니가 된 것이다. 손자가 지 에미를 빼다 박았으니 외할아버지를 많이 닮았다는 것은 당연한 일인데도, 할아버지와 붕어빵이라고 호들갑을 떠는 주변의 치사는 아부인 줄 알면서도 그리 싫지 않은 손자 바보가 된다. 주민등록번호 뒷자리가 3으로 시작하는 김강민이 그 녀석이다. 


30여 년 전 남매를 키워봤지만 그때는 어떻게 키웠는지 이 새 생명이 전혀 생소하기만 하다. 어떻게 안아야 이 녀석이 편할지? 울음의 의미는 무엇이 불편해서 보채는지? 배가 고픈 건지 기저귀를 갈아 달라는 건지? 밤낮은 구별하는지, 할애비를 알아보는지? 뒤집는 건 몇 개월부터인지? 기기 시작하는 건? 일어서는 건? 걸음마는? 이는 위에서부터 나는지 아랫니가 먼저 나는지? 애들을 키워 보았으면서 별걸 다 묻는다고 아내에게 핀잔을 들으면서도 궁금하기는 마찬가지다.


갑자기 할 일이 생긴 것처럼 마음이 바빠진다. 눈길을 마주치면 웃음도 띄울 줄 아는 돌도 되지 않은 손자에게 세상 구경을 시켜주고 싶어 안달이 난다. 새 이가 나오면서 간지러운지 오물거려보기도 하고 손가락을 넣어 부지런히 빨기도 하는 손자를 안고 서울시청 서울도서관을 처음으로 찾아 나섰다. 직업의식의 발로이기도 했지만 새로 생긴 서울도서관을 찾아보아야지 하면서도 짬을 내지 못하다가 밀린 숙제를 하는 마음도 있었다. 


서울광장을 건너기 전 무교동 쪽 부산은행이 있는 빌딩 앞에 다소곳이 자리한 돌에 새긴 “어린 것들 잇몸에 돋아나는 고운 이빨”이라는 시비(詩碑)의 글귀가 섬광처럼 스쳤다. 20년 넘게 그 앞을 스쳐 지났지만 신호등을 기다리며 칭얼대는 녀석을 다독이다가 오늘에야 내 눈에 띈 것이다. 처음 돌을 세울 때는 눈에 잘 띄는 곳이었겠지만 교통신호 박스가 그 앞을 가로막기도 했고 유동인구도 많이 늘었으리라.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고 한다. 내가 이제 발견했을 뿐이다. 지훈상 운영위원으로 모셨던 김종길 시인의 〈설날 아침〉이었다. 돌에 새긴 서희환 선생의 글씨도 돋보였다. 



세상은 험난하고
각박하다지만
그러나 세상은 살 만한 곳

한 살 나이를 더한 만큼
좀더 착하고
슬기로울 것을 생각하라

아무리 매운 추위 속에
한 해가 가고
또 올지라도

어린 것들 잇몸에 돋아나는
고운 이빨을 보듯
새해는 그렇게 맞을 일이다.


시청 광장에 젖먹이 손자를 안고서 다시 섰다. 이 광장의 품에서 성장한 나의 궤적이 어슴푸레하거나 혹은 뚜렷이 각인된 액자의 사진처럼 떠올랐다.


52년 전 까만 선글라스를 낀 박정희 쿠데타의 주역들이 시청 앞에서 거사의 성공을 알리는 흑백사진은 내가 직접 경험하기에는 어린 중학교 때의 일이다. 다시 시청광장에 선 것은 대학 때의 일이다. 9년이 지나 대학에 입학하고서 9월 마지막 주말에 치러진 고연전(高延戰)의 마지막 행사는 동대문 서울운동장에서 시청까지 장안을 뒤흔드는 승리의 행진이었다. 시청 광장은 대학생에 대한 기대가 높았거나 젊음의 야성이 이뻐 보였거나 시민들과 함께 어울리는 낭만적인 잔치마당 같았다. 


26년 전 민주화를 쟁취한 6ㆍ10 항쟁의 그날에는 출판사가 있었던 충정로에서부터 신촌에서 출발한 대열에 합류하여 시청까지 행진했다. 초여름 날씨의 무더움보다는 민중의 열기에 휩싸여서 김대중ㆍ김영삼 선생 등 원로 민주투사분들의 뒤를 따른 꽤나 먼 거리의 행진이었다. 26년간의 군사통치가 외형적으로라도 종언을 고하는 6ㆍ29 선언으로 나타나 또 하나의 시민의 승리를 쟁취했던 기억이 새롭다. 


그리고 또 15년이 지난 그 6월은 2002년 월드컵 축구경기가 열기를 더하면서 시청 광장은 젊은 붉은 악마로 뒤덮인다. 분단의 상흔으로 빨갱이라는 레드 콤플렉스 유령에 주눅 들었던 금기의 붉은 색이 응원 티셔츠가 된 것이다. ‘Be the Reds!’라고 인쇄된 자극적인 응원문구가 춤추었고, 단군의 환단고기(桓檀古記)에서 찾아냈다는 도깨비 형상의 치우천왕이 전쟁승리의 표상으로 젊은 그들의 깃발이 되어 흩날렸다. 10년이 지나면 보수당인 집권세력의 대통령 후보의 선거전이 온통 붉은 머플러에 뒤덮이게 된다. 세계축구의 4강에 진출하는 가슴 벅찬 최초의 승리라는 축제의 물결은 우리가 직접 경험한 어떤 의미의 사육제(謝肉祭)였다. 88올림픽처럼 국가가 기획한 것도 아닌 자발적인 청년 시민들이 12번째의 축구선수가 되어 같이 뛰었다. 그동안 제도의 그늘에 가려지고 억눌리고 인내해야 했던 그들 맨얼굴의 열정과 희망과 욕망의 찌꺼기까지 활화산처럼 폭발한 셈이다. 그 중심에 시청 광장이 있다. 2002년의 체험을 기점으로 그 이전과 이후의 시민의식을 선명하게 나누어 보아야 하는지도 모른다. 


2009년 5월은 시청 광장이 노란색으로 물들었다. 바로 한 해 전에 광우병 소고기 촛불시위대가 섰던 그 자리에 노무현 전 대통령의 노제(路祭)가 치러진다. “…너무 슬퍼하지 마라. 삶과 죽음이 모두 자연의 한 조각이 아니겠는가. 미안해하지 마라. 누구도 원망하지 마라. 운명이다.…”라는 짧은 유서를 남기고 고향 뒷산 봉우리에서 투신자살한 젊은 대통령을 마지막 보내야 하는 시청 앞 광장은 울음바다였다. 우리 현대사에 민주화의 꽃봉오리를 활짝 펴보지 못하고 임은 떠났다. 그이의 유언과는 반대로 너무 슬펐다. 그이를 죽음으로 내몬 권력을 원망했다. 그이를 지켜주지 못해서 정말 미안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이 자꾸만 왜소화해가는 내 모습이 못마땅해서 울고 또 울었다.

시청 앞 광장에서 손자를 안고 스치는 생각들이 나의 44년 서울사람 시간들을 메꾸고 있다. 이 녀석이 자라 그들 세대가 꿈꾸는 광장은 또 어떤 모습일지는 전혀 상상할 수는 없다. 그 나름의 환희와 고통의 물결이 시청 앞 광장을 교차하며 그들의 역사를 써 내려 갈 것이다. 


지난해 가을 완공된 새 시청사는 유리로 뒤덮인 시카고의 현대 건축물처럼 위용을 뽐내지만 그 모습은 눈에 익지는 않는다. 당초 설계에는 없는 위풍당당한 장송과 느티나무 몇십 그루가 심어져 삭막함을 감추게 한다. 이제는 유물처럼 자그마해진 일제 식민지통치의 잔재인 구청사를 전부 부수지 않고 시청 도서관으로 개조한 박원순 시장의 창조적 상상력이 돋보이는 문화리더십이 고마웠다. 어쩌면 서울 르네상스 같은 현란한 선전문구로 도배되었을지도 모를 소중한 공간이 그곳이었기 때문이다. 지도자 한 사람을 잘 선택한 시민의 기쁨이 이런 것이다. 20년 전 참여연대를 설립하여 시민운동에 앞장서던 독서광인 그이의 아파트에 초대받았던 적이 있다. 강남의 넓은 아파트 안방을 통째로 서고를 꾸미고 그 속에서 열띤 토론을 벌였던 그이의 책에 대한 열정이 데자뷔처럼 떠올랐다. 


권력의 욕망 쓰레기로 넘쳤던 곳이 희망과 꿈의 책으로 청정(淸淨)의 생태계를 이루고 있다. 높은 책장의 벽엔 책이 가득하고 넓은 계단을 꽉 채우고 있는 부모의 손에 이끌려온 아이들이 책에 빨려 들어간 모습은 장관이며 희망의 폭포다. 좀이 쑤시는지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녀석들도 있다. 처음 경험하는 도서관인데 조금 부산을 떨더라도 웃어넘기기로 했다. 바로 문을 열면 시청광장에서 스케이트를 지치고 있는 친구들보다야 훨씬 인내력 있게 미래를 준비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어쩌면 한 세대가 지나면 이 사회를 이끌 꿈나무들이 그들 속에서 성장할 것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손자 세대에게 녹색 공간을 남겨주어야겠다는 가까운 미래의 약속보다는 내가 살아가는 정직한 모습이 나남수목원 조성인지도 모른다. 겨울 산은 나뭇잎 떨어진 그 나무의 키만큼이나 다소곳이 낮아진다. 폭설(暴雪)로 쌓인 눈으로 다시 키가 조금 커진다 해도 그 고즈넉한 나목(裸木)들의 합창으로 포근하긴 마찬가지다. 해서 무릎까지 빠지는 눈길이 초대하는 겨울 산의 초대는 쉽게 뿌리치기 힘들다. 겨울이 한겨울로 성숙하는 원시의 폭설 속에 나남수목원 산행에 초대된 외우(畏友) KBS 임병걸 시인이 〈세상 가장 큰 책〉이란 시를 선물했다. 과거완료형이 아닌 ‘푸른 쉼표’라는 시구의 새해 축복이 그지없이 고맙다. 손자가 청년이 되어 이 시를 통해 할애비의 한 단면이라도 그려볼 수 있으면 정말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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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향해
종이위에 침묵의 말
건네던 사람
언제부턴가
더 큰 침묵의 소리로
외치기 시작했다

돌멩이로 모음을 쓰고
나뭇가지로 자음을 썼다
흐르는 계곡의 물과
능선을 넘어온 바람으로
줄거리를 만들었다

책은 나무가 산고 끝에
잉태한 아들
평생 책의 아들이었던
그는
연어가 태어난 곳으로 회귀하듯
나무속으로 들어갔다

세상의 유혹에 흔들릴 때
구상나무 심고
세상이 그리울 때
빠알간 복자기 심었다
세상이 답답할 때는
쭉쭉 뻗는 낙엽송 심었고
세상에 고함치고 싶을 때는
활활 타오르는
자작나무 심었다

때로 그를 시샘한 세상이
폭우를 쏟아부어
나무를 덮칠 때는
뒹굴던 돌을 쌓아
세상의 역류를 막고
흔들리는 마음
단단히 가두었다

마침내 세상 가장 큰 책을 쓰고는
흙묻은 등산화에
낡은 청바지를 입은 그도
한그루 느티나무 되어
책속의 쉼표로 찍혔다
겨울에도 푸른 쉼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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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읽었습니다. 숙제하듯 읽진 않았습니다. 책의 아들.... 이 남습니다.

 

곽윤섭  |   2013-04-17 13:52:00  |   댓글  |   수정  |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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